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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온 May 07. 2021

에필로그: 새로운 시간감각 갖기


에필로그: 새로운 시간감각 갖기 devising the new sense of time


얼마전 그레타 거윅 감독이 각색해 만든 영화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을 봤다. 캐스팅 소식을 들었던 순간부터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만만찮은 기대를 품고 봤음에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졌다. 한없이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작품들이 있다. 그럼 물론 내 일상에 지장이 오겠지만, 그래도 좋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나,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폴리 4부작>, 더 어릴 때의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요즘은 세상을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구분하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일 것이다. 명확한 구분은 아니고, 상호의존적인 두 세계 각각에 대한 존중에 가깝달까. 이야기의 세계가 없다면 어떻게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었을까. 오늘 이전에 어제가 있었고, 어제의 어제가 있었고, 한없는 어제들이 있는 반면, 오늘 이후엔 내일이 있고, 내일의 내일이 있고, 한없는 내일들이 있으리란 걸, 사람들이 써놓은 이야기를 보며 알게 된다.


어쩌면 인간이 만든 것 중 내가 가장 신뢰하는 개념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일지 모르겠다. 인간들은 여태껏 세상을 온갖 방면으로 꼼꼼하게 관찰하면서 시간이 흐른다는 걸 감각할 수 있는 지표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기반한 문명을 부단히 만들어왔다. 짧은 이야기 속에도 시간의 흐름이 있다. 시간이 흘러야만,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풀리고 자기 자신 또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전보다 더 깊이, 질적으로 도약한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하게 된다. 나는 이 플롯에 환장한다. 마치 여기에 내 모든 구원이 달린 것처럼. 한 사람의 생애 속에서는 그가 태어난 이후로 쉼 없는 시간이 흘러 죽음에 다다른다. 내겐 이 사실이 숭고하다. 그래서 종종 어떤 죽음을 맞고 싶은지 상상해보고,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음성,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무엇일지, 그 순간의 내게 '품위 있는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지 가늠해본다.


그런데 최근 죽음을 향한 이미지가 바뀌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시간이 언젠가 멈춰버릴 수 있겠구나 싶어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너무나 명백하게도 '인간'의 시간이다. 인간 종의 멸종과 함께 멈춰버릴 시간은 다만 인간들의 이야기가 쌓이는 시간일 것이다. 가소롭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해 느끼는 심상을 적어본다. 전에는 죽음이란 게 멈춰있고 내가 삶을 누리면서 서서히 지그재그로 다가가는 거였다면, 이제는 죽음이라는 신비로운 어둠의 장막이 딱딱한 벽이 되어 앞으로 다가온다. 예능 같은 데서 나오던 좁아지는 방, 심지어 검은 스폰지들로 방음 처리가 되어있어 소리를 질러도 흡음되어 버린다. 자연재해, 전염병, 그로 인한 사회적 재난을 마주하면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서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공포로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사건이 풀리는 게 아닌데도 왜 나는 시간이 흐르는 것에 집착하는가? 강물이 바다가 되고 수증기가 되어 비로 내리고 다시 강물이 되는 순환처럼, 시간이 계속 흐르다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마음 때문인 듯하다. 어떤 기회? 살아온 시간이 늘어가면서만 얻을 수 있는 배움과 깨우침,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면, 힘든 일도 있겠지만 어떤 좋은 일이 다가올 지 알 수 없는, 적절히 포장된 선물상자 같은 게 인생이라면, 그런 상자를 풀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참 감지덕지한 기회였겠다. 내게도 그런 기회가 올까?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어떨까? 뒤엉킨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마냥 헛된 희망보다는 새로운 시간 감각을 갖고 싶다. 그 감각을 바탕으로 남은 시간 망설임 없이 움직이고 싶다. 시간이 충분하기를 여전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고자료 


백영경 “기후위기 해결, 어디에서 시작할까” 창작과비평 187호 (2020년 봄호)

사스키아 사센 (박슬라 역), <축출 자본주의>, 글항아리, 2016

조천호 <파란하늘 빨간지구-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 동아시아, 2019

제임스 퍼거슨 (조문영 역) <분배정치의 시대- 기본소득과 현금지급이라는 혁명적 실험>, 여문책, 2017

케이트 레이워스 (홍기빈 역) <도넛 경제학>, 학고재, 2018

폴 호켄 엮음 (이현수 역) <플랜 드로다운>, 글항아리사이언스, 2019

피터 반스 (위대선 역) <우리의 당연한 권리, 시민배당>, 갈마바람, 2016

한재각 엮음 <1.5 그레타 툰베리와 함께>, 한티재, 2019

Burke, K. D., Williams, J. W., Chandler, M. A., Haywood, A. M., Lunt, D. J., & Otto-Bliesner, B. L. (2018) Pliocene and Eocene provide best analogs for near-future climates.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15(52), 13288-13293

Knight, KW, Rosa, EA and Schor, JB. (2013) Could working less reduce pressures on the environment? A cross-national panel analysis of OECD countries, 1970–2007. Global Environmental Change 23(4): 691–700.

Nässén, J and Larsson, J. (2015) Would shorter working time reduce greenhouse gas emissions? An analysis of time use and consumption in Swedish households. Environment and Planning C: Government and Policy 33(4): 726–745.

Vornholt, Lara (2020). Values in Future Perspectives about Life with a Basic Income: A Qualitative Study. Master’s Thesis. Faculty of Behavioral, Management and Social Sciences, Psychology Department, Positive Psychology & Technology, University of Twente. [January 2020] https://essay.utwente.nl/80447/1/Vornholt_MA_PSY.pdf

Michael Lettenmeier (Aalto University), Lewis Akenji (IGES), Ryu Koide (IGES), Aryanie Amellina (IGES), Viivi Toivio (D-mat ltd.) (2019) <1.5-degree lifestyles: Targets and options for reducing lifestyle carbon footprints – A summary>, SITRA  https://www.sitra.fi/en/publications/1-5-degree-lifestyles/ 


온라인 포스트

BIYN <기후위기 시대의 기본소득 운동> 워크샵 기록 

Futures in Long-termism <Long Welfare>

https://medium.com/futures-in-long-termism/long-welfare-3476004d2e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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