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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온 Jan 24. 2022

시간을 선물하는 관계 속에서 보낸 시간

온전한 마을 첫해를 돌아보며

2021년 초, 온라인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서로의 ‘이웃’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온전한 마을에 입주했다. 10년전 쯤 알게된 친구들과 ‘가족’을 이루어살고 있음에도, 내게 이웃은 여전히 낯선 개념이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중심에 두고서 성취, 완수, 달성의 관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선보이려는 압박 속에서 억지로 애쓰기보다, 함께 존재하기 위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 또한 소중하다는 걸 배운 듯하다.


(*온전한 마을은 BIYN에서 2020년에 기획하고 진행한 <기후위기 말하면서 기본소득 말하기> 북클럽의 멤버들과 전환마을 운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함께 만든 온라인상의 마을이다.)  


그런 이웃들과 함께 읽은 마지막 책은 게일 콜드웰이 쓴 <먼길로 돌아갈까?>이다. “Let’s take the long way home”이라는 원제 옆에 “우정의 회고록A Memoir of Friendship”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온전한 마을의 주민이 되어 살아본 한해를 돌아보려는데 이 책을 읽었다는 게 의미심장했다. 그전까지는 줄창 기후위기 관련한 책만 읽었었는데, ‘우정’에 관한 책이라니(그러고보니 우리 마을에 ‘우정’님이 살잖아!) 여경이 사놓고 읽지 않은 책 무더기에서 고른 것치고는 너무 절묘하달까. 우리가 여기, 이 온라인상의 장소에 모여 도대체 무엇을 한건지 헷갈릴 때 ‘우정을 쌓았다’고 답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어떤 우정을 쌓아왔을까? 그 우정의 시작은 ‘위기’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으나, 우정의 지속은 위기에 압도되지 않고 삶을 꼭꼭 씹으며 즐겁게 살아가려는 의지에 기반했다. 그런 우정의 관계 속에서 여기가 아니라면 일상 안에서 엄두를 못냈을 어렵고 사치스런 질문을 품고, 같이 헤맬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몹시 소중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치스런 질문이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질문을 의미한다. 그냥 살기도 벅찬 시대에 감히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을 냈으니까. 기후위기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기후위기를 더 깊이 감각하고 삶을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단번에 되지 않는 몸에 밴 습성과 자본주의적 욕망들로 인한 딜레마를 진솔하게 나누었다.


매번 온전한 마을 모임을 하고나선 숨을 고르게 됐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성껏 듣는 게 제일 중요한 안건이었던 도토리 반상회들.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찬 일정표의 틈새에서 ‘삶’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게 하는 시간. 그게 이 시대에 제일 필요하고도 사치스러운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같이 헤매는 시간이란 뭔가? 그 헤맴에 의미가 생겨난 건 뜰님이 건져올린 ‘산책’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임금노동을 쉬는 동안 자신에게 뒷산을 산책했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말하며, 이 모임에도 감사를 표했을 때.


<먼길로 돌아갈까>라는 책에서도 산책은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제목부터가 두 개와 두 사람이 더불어 산책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친구인 캐럴라인 냅(<명랑한 은둔자>의 저자이기도 한)이 자주 쓰던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정작 우리는 서로를 처음 만난 2020년 가을 이래로 단 한 번의 오프라인 모임을 갖지 못했다. 각자의 노트북 앞에 붙박이처럼 앉아서, 똑같은 배경을 보면서 만나왔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화 속에서 멀리 나갔다온 것처럼, 각자가 살고 있는 동네를 함께 걷고 온 것처럼 기분이 전환된다. 사려깊은 말들의 산책. 늦은 저녁 시간이 달려가고 내일이 엄습해올 때, 집까지 먼 길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낀다. 이 작은 산책들이 모여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게 될까?


지금 돌아보면 마냥 좋기만 한 것 같지만, 실은 조바심이 들어 혼자 불안해하던 시간도 있었다. 참석자가 적어 모임이 미뤄졌던 어느날 쓴 일기를 보면,

 

“온전한마을 모임은 어떻게 될까? 같이 뭘 해낸다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후위기를 고민하며 삶을 공유하는 모임으로서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때로는 불안이나 조바심이 든다” (11월 24일) 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그보단 이런 기록이 더 많았다.   


“저녁의 온전한 마을 반상회 덕에 부정적인 에너지 흐름이 전환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시간을 선물하자"고 이야기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말하면서 깨달은 거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만 생각지 않게 된 것도 내게는 놀라운 순간이었다.”(6월 7일)  


정말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펑펑 써도 될만큼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라,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실천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걸 다하려고 허둥대다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온전함을 지키는 방식으로, 서로를 믿으며 자신의 삶 안에서의 최선을 고민하면서…


아무튼 우정은 프로젝트나 사업이 아니라서, 도달해야할 목표치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우정에 기반한 기후위기 운동을 떠올려본다. 그 운동의 모양은 무엇일지, 그 운동 안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다큐멘터리 <아이 엠 그레타> 속 그레타와 벨기에의 활동가 아누나가 서로 주고받는 공감과 위로의 눈빛, 그레타가 개와 말과 끌어안고 나누던 침묵 속의 위로 같은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물론 수치로 표현되곤 하는 기후운동의 선명한 목표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두의 삶으로 이루어진 운동을 상상해보고 싶은 것 같다.)


끝으로 <먼길로 돌아갈까?>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싶다.

“캐럴라인은 강과 나의 관계가 송두리째 달라질 거라며 운전에 주의하라고 미리 경고했었다 ㅡ찰스강은 메모리얼 드라이브를 따라 굽이져 있는 탓에 수면상태를 보느라 목을 빼고 있다가는 마주 오는 차량을 놓치기 십상이라고. “강이 자기 인생에서 하나의 인격이 될 거야.” 캐럴라인이 말했다. “자기의 하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아마 깜짝 놀랄걸.” (153페이지)


강이 인격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던 한여름의 반상회가 떠오른다. 각자 흘러가던 삶이 여기서 교차하고 있다.

우리 마을 옆엔 어떤 강이 흐르고 있을까? 강 어귀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을까? 강의 너비와 유속은 어떨까? 그 강은 우리 마을에 어떤 인격을 부여해줄까?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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