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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Apr 21. 2018

빈 집

떠난다는 건,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빈 집     


골목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지난다. 위풍도 당당하게 지나는 대형 탑차에서 추레하게 덮은 비닐포장 아래 손때 묻은 세간을 드러내며 가쁘게 굴러가는 소형트럭에 이르기까지, 이사행렬은 어둡도록 이어진다. 형편이 나아져 더 넓은 집으로 들어가는 이사와 달리 세간을 줄이고 줄여 작은 곳으로 떠나고 난 자리엔 긴 그늘이 드리워진다. 평소와 달리 활짝 열린 대문과 창 너머로 가구가 빠져나가 휑한 자리가 마치 굶주린 구강을 보는 것 같이 휑하다.


얼마 전, 이사를 간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빚 때문에 해마다 조금씩 싼 집으로 옮기더니 아예 무상임대해주는 벽지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시내에서 두 시간이 넘는 거리에 차편도 적고, 시골에서 살던 사람도 도심으로 나오는 마당에 돌쟁이를 들쳐 업고 시골로 들어간다는 게 속상해 꼭 가야겠냐고 한소리를 했다. 그럼, 어떡하냐는 친구의 담담한 음성을 들으며 나는 생판 낯선 곳으로 이사 갈 친구 맘이 더 속상할 것 같아 결국 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슬쩍 친구집을 찾아가니, 그새 이사를 떠났는지 텅 비어 있었다. 마당 안에 미처 챙기지 못한 낡은 집기 몇 개가 동풍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옷깃을 여미며 여러 번 돌아보며 떠나는 친구를 보는 것 같았다. 짧은 겨울해가 이울고 사람 없는 집에 칼바람소릴 내는 어둠만이 윙윙 거렸다.

 

뻣속까지 시린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데, 어스름한 골목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불빛들이 하나씩 켜졌다. 옮기는 발걸음을 따라 오듯 창가의 불빛이 이어졌다. 문득 날 기다리고 있을 불빛 하나가 생각났다. 휘황한 수많은 불빛 중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따뜻한 불빛 하나. 


그래. 어쩌면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은 다른 어딘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늘 황망하고 신산한 삶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불빛 하나로 살아갈 힘을 얻곤 한다. 아마 친구는 낯선 그곳에서 새로운 불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비어 어둠과 냉기뿐이었을 곳에서 새 등불을 켜고 따스히 데우고 있을 친구의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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