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달의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혜영 Apr 25. 2018

어름집 김씨

어릴 적 기억은 눈꽃으로 날리고

작은 소란이 인다. 뭔가를 피해 비껴서는 사람들 사이로 노인이 나타난다. 새까맣게 녹꽃이 핀 자전거 위에서 노인은  페달을 밟으려 애를 쓴다. 하지만 뼈만 앙상한 다리는 양쪽 페달을 동시에 밟지 못하고 번번이 한쪽 페달을 허공으로 놓쳐 노인의 자전거는 보폭보다도 느리게 움직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 모습에서 나는 오래된 기억 속에 잠식해 있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예전 내가 살던 시장 뒤편에는 붉은 페인트칠로 ‘어름집’이라 써 놓은 가게가 하나 있었다. 평수를 헤아릴 것도 없이 작은 가게 안에는 스티로폼으로 감싸고 함석을 덧대어 만든 간이 냉장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낮은 조명과 냉장고 주변에서 흐르는 하얀 김이 바닥에 고여 있어 마치 관 속처럼 간담이 서늘해지는 얼음가게였다.


주문이 들어오면 얼음가게 주인 김씨는 냉장고에서 큼직한 얼음을 꺼내 커다란 톱으로 쓱싹쓱싹 잘랐다. 김씨가 어깨 근육을 꿈틀거리며 톱질할 때마다 얼음이 쩍 갈라지고 하얀 얼음가루가 사방으로 날렸다. 마치 가위손이 눈꽃을 만드는 모습 같달까.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 종일 얼음집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김씨가 얼음을 자전거 뒤에 옮겨 싣고 시장 안으로 배달을 나가면 슬쩍 가게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얼음가루를 눈처럼 서로의 몸에 뿌렸다. 까르르 웃음 한바탕으로 한여름 무더위는 눈 녹듯 사라졌다. 


냉장고가 집집마다 들어오면서 얼음집은 문을 닫는 일이 잦아졌고, 김씨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동안 소식조차 들리지 않던 김씨가 갑자기 자전거를 끌고 동네에 나타났다.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겨우 알아볼 정도로 김씨는 많이 변했다. 좋던 풍채는 앙상한 가죽으로만 남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 민둥산 같은 머리 알만 번들거렸다. 마치 딴딴했던 빙산이 지독한 태양열에 녹아내린 것 같았다.     



노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를 끌고 얼음집이 있던 자리로 향했다. 벌써 낯선 건물로 변한 지 오래인데. 제 몸보다 뻣뻣한 자전거를 끌고 자꾸만 그곳으로 가는 노인을 보며 나는 어릴 적 ‘어름집’에서 나눠준 아이스께끼가 먹고 싶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 위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