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초등학교 베프가 산다. 늦잠자는 나를 깨우려고 아침이면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던 친구는, 어느덧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육아 동지가 되었다. 일요일 오후, 머리를 맞대고 애벌레 관찰하는 아이들 옆에서 친구가 말했다.
“너네 집에 진짜 신기한 책 많았던 거 알아?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책 속의 책>이라는 책이 있었어. 잡다한 지식이나 상식 같은 거 모아놓은 책이었는데, 성(性)에 대한 파트가 따로 있었어. ‘카사노바는 어떤 사람이었나’ 이런 거? 내가 열심히 보고 학교 가면 아는 척하고 그랬지.”
우리 집에 그런 책이 있었나? 쿡쿡 웃다가 그려봤다. 성장기 내내 방 한켠을 차지한 채 묵중한 무게감을 드러내던 책장을.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짙은 월넛색 넓은 책장이 가장 안쪽을 차지했고, 그 옆으로 각기 다른 가구점에서 구입한, 높이와 원목 색깔이 다 다른 책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일관성 없는 책장만큼이나, 꽂혀있는 책들도 난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과사전류의 크고 무거운 책은 밑 칸에 넣는다는 원칙 외에, 분야나 최소한의 연령 구분도 없었다. <을지문덕>, <유관순> 등의 이름이 고딕체로 쓰인 초등학생용 위인전 옆으로 유명 화가들의 미술 도록이 자리하고 있었고, 디자인 잡지가 그 위로 너저분하게 누워 있었다.
초등학교 친구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책 속의 책> 옆에는 <노스트라다무스 예언록>이 있었고,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와 로버트 풀검의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지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록만큼이나 두꺼운 책이 하나 더 있었는데….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온갖 신비한 일들을 모은 사례집 같은 책이었다. 이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시대와 지역의 차이가 있을 뿐 외계인을 비롯한 초월적 존재가 등장했다. 초등학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었지만, 완독에 성공한 적은 없다. 비슷한 사례가 끝도 없이 반복되었으니까.
이 난잡한 책장에서 ‘정신세계사’의 책들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신세계사는 1984년 설립된 후 ‘명상도서 출판의 대표주자’(출판사 홈페이지)로 일컬어지던 출판사로, 이 출판사의 스테디셀러는 <성자가 된 청소부>였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주인공 덕선과 선우가 한 방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성자가 된 청소부>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선우 같은 전교1등 전교회장 남사친은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 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이 책을 읽었다. 말을 하는 대신 허리춤에 매단 작은 칠판에 글을 써서 깨달음을 나누었다는 ‘침묵의 수행자’ 바바 하리 다스의 이야기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책 표지가 풍기는 느낌이 지금도 선명하다. 암회색의 표지 색깔과 크레파스로 쓴 느낌의 제목 서체, 하단에 박힌 정신세계사 로고 같은 것들.
이 출판사에서 나온 또다른 책으로 <잃어버린 지평선>이 있었다. 비행기 한 대가 히말라야의 샹그릴라에 불시착하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 샹그릴라의 주민들은 세상과 단절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지상 어딘가 존재하는 천국을 상징하는 샹그릴라는 이 책의 대중적 인기로 보통명사화되었고, 지금은 식당과 모텔, 마사지샵의 이름이 되었다.
이 책들은 모두 아빠의 정신세계다. 1990년대, 아빠는 감각 있는 디자이너로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경제성장기 경제적‧문화적 혜택을 고스란히 입었지만 물질주의에는 비판의식을 가졌던 사람. “예술하는 사람들은 조직 활동이랑은 거리가 멀어”서 민주화운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나이나 족보로 찍어누르려는 이들에게는 거침없이 대들던 사람. 영업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매일 야근하면서도 자신은 ‘조직인간’과 다르다고 구별지으려 애쓰던 사람, 일본과 미국으로 출장을 다녔지만 히말라야의 샹그릴라를 꿈꾸던 사람. 젊은 시절에는 뇌호흡과 기체조를, 은퇴 후에는 침술을 배웠던 사람.
젊은 아빠의 초상은 아빠만의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은 정신수양을 소재로 한 책들의 전성기였고, 이 시기에 칼릴 지브란,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다수의 명상 서적을 번역하고 직접 쓴 류시화는 1990년대 후반 부동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1960년대 이후 서구에서 일어난 대항문화 운동, 오리엔탈리즘의 유행, 소련의 붕괴, 급격한 경제 성장이 낳은 혼란 등 여러 흐름이 맞닿아있었을 것이다. 보헤미안의 저항정신을 가지고 성공한 부르주아, 엘리트에 반대하며 자란 엘리트, 물질주의에 반대하는 중산층…. 아빠와 같은 이들이 경제성장기를 타고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아빠의 책장은 그 분열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었으리라.
사춘기 이후 그런 아빠의 분열과 위선을 비웃었지만, 아빠의 책장은 나의 성장기 내내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였다. 길고 긴 방학을 때우려고, 언니가 학원에 가있는 동안 심심해서, 친구가 와서,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몇 번 읽었던 <성자가 된 청소부>를 또 꺼내 읽었고, 친구와 <책 속의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서로 퀴즈를 냈고, 아빠가 교보문고에서 새로 사온 책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책장을 뒤졌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이해하기엔 어렵고, 또 조금은 위험했던 그 세계(아빠가 조금 더 갔다면 사이언톨로지 같은 종교에 빠졌을 것이다.) 에서 나는 비밀스럽게 뛰어놀았다.
아빠는 더이상 보헤미안적 문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해본) 오쇼 라즈니쉬의 말년은 90대가 넘는 롤스로이스와 난잡한 성생활로 뒤범벅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빠의 책장은 내가 학창 시절 어떠한 비문학 지문도 쓱쓱 읽어내릴 수 있었던 비결, 써스데이아일랜드풍의 에스닉 원피스를 볼 때마다 '이쁘다…' 중얼거리는 이유,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순자산과 그의 반물질적 태도를 곱한 값"이라는 <보보스> 속의 우스꽝스러운 공식(이 공식에 따르면, 그럴싸한 소득을 올리면서도 동시에 세속적 성공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에 흠칫 놀라며 키득거리는 배경 같은 것. 아빠의 책장은 내가 물려받은 문화자본이고, 그것들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