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4년간 살던 집 근처에는 자연드림이 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아이쿱 협동조합 자연드림.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자연드림에 회원 가입을 했다. 이유식 스케줄에 맞춰 유기농 쌀가루와 무항생제 소고기, 유기농 당근 같은 것들을 샀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후에는 근처 공원을 산책한 후에 매장 테이블에 앉아 우리밀로 만든 빵과 유기농 주스를 하나씩 나눠 먹는 게 일과였다. 천원짜리 주스를 마시면서 매장 테이블에 죽치고 앉아있다고 눈치주는 이는 없었고, 매장에선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자연드림 음 음”을 반복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끔 화장기 없는 얼굴의 여성들이 모여 회의를 했는데, 그들은 소식지를 건네주며 ‘물품 모임’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내가 시민단체에서 교육강의를 기획‧운영하는 일을 하던 2010년대 초반, 생협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네트워크는 실로 막강했다. 단체의 회원 중에도 생협 활동을 병행하는 이가 많았고 교육강의를 홍보하면 생협을 통해 몇십 명이 교육신청을 하곤 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면서 네트워크를 조직해 지역 사회에 필요한 운동에 나서는 것도 이들이었다. 이들의 에너지에 나는 자주 감탄했다. 아이를 낳으면 나도 저렇게 살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상상도 했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고 부질없다…’ 내 앞에는 더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가 많았고, 생협 활동은 그에 비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생협 활동이 해당 생협에서 나오는 제품을 미리 써보고 고쳐야 할 점을 제안하는 ‘물품 모임’을 넘어서 의미 있는 교육의 장이 되는가도 관건이지만, 그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래전부터 생협 운동은 여성, 특히 기혼 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삼았다. 한살림은 “생명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고 보살피고 치유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생활을 화폐로 평가하는 시장시스템, 평균화시키는 행정시스템에 위탁하는 것의 위험을 자각한 주부들이 먹을거리를 매개로 생활을 자치해 나간다는 운동전략”(2005년, <한살림운동과 조합원노동의 이해>)을 세웠고, 다른 생협들 역시 ‘주부’를 운동 주체로 세웠다. 생협 운동이 기혼 여성에 주목한 것에는 여성들이 담당해왔던 재생산 노동에 대한 재평가, 생태적이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려는 고민이 담겨 있고 여기에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여성의 재생산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 성별 분업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기혼여성으로서 나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여성을 생물학적으로 종속시키는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되어야”)보다 캐롤 길리건(“정의 윤리를 넘어 돌봄 윤리로”)와 같은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해방감을 느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데 이미 많은 시간을 써버린 나의 삶이 부정당하지 않는 것에 기뻤고, 남편과 논쟁할 때마다 알뜰히 나의 지식을 써먹었다. 하지만 이 지식은 나의 노동을 정당화하고 ‘정신 승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페미니즘의 상상력이 1인분의 경제적 자립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 돌봄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나와 남편 사이에 그어진 성별 분업의 금을 넘나들 수 있어야 나의 지식은 완전해질 것이었다.
생협 운동 역시 나와 같은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나, 먹거리와 살림의 가치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성별 분업의 문제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2010년대 초반, 아이쿱에서 조합원을 부르는 별칭은 ‘윤소맘’(윤리적 소비를 하는 맘)이었다.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구성원을 배제하는 이 별칭이 함의하듯, 생협 매장의 제품 중에는 자녀가 있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많다.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과자, 첨가물이 들지 않은 주스, 해로운 화학성분이 첨가되지 않은 모기퇴치제와 선크림…. 이러한 생협의 마케팅 방식은 이후연구소 하승우의 지적처럼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의 먹거리’라는 틀을 여성들, 더 정확히는 주부들에게 선전”하며, “이 틀은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이 가진 문제점을, 가부장주의를 해체하지 않고 강화시킨다.”
생협을 이용하는 조합원뿐 아니라, 생협 활동가 역시 대부분 기혼 여성이다. 활동가로서 이들은 각종 모임 운영부터 회의 준비와 진행, 매장과 관련한 업무, 각종 캠페인과 집회, 연대 투쟁 등 다양한 일을 한다. 이들이 생협 활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의 뒷면에는 여성의 경제활동, 사회활동이 제약받았던 환경이 있으리라. 전업주부의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생협 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값싸게 동원한 것은 아닐까? 김이경은 <소비자생활협동조합 노동의 이중구조와 여성 활동가의 위치>라는 논문(2022년)에서 “생협 조직에서 생각하는 활동가 상은 가정 경제의 책임을 맡지 않는, 여성-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 업무를 임금노동으로 규정하길 주저하고, 급여와 직책 등을 과거와 같이 유지해도 무방하다는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부해왔다. 이에 대항하고자 하는 생협 역시도 여성, 특히 ‘남편이 돈을 벌기에 생계에 대한 부담감이 적다고 인식되는’ 기혼 여성의 노동력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이 노동력을 동원하여 성장해왔다면 이 성장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제 결혼으로 맺어진 유자녀 가정은 점점 줄어들고, ‘전업주부'라는 말은 점점 희소해지고 있다.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기혼여성이 점점 늘어날 뿐 아니라, 임금노동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 기웃거리며 고민한다. 자격증을 준비하거나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온라인 스터디를 하고, 남는 시간에 블로그 마케팅을 하기도 한다. 기혼여성의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쌓일 틈이 없다. 이런 변화 속에서 생협은 여전히 대안적인 운동으로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사를 가면서 자연드림에서 멀어졌다. 대부분의 장은 집 근처 시장에서 보고, 필요한 가공식품이 있을 때는 오아시스앱을 켠다. 오아시스마켓은 오프라인 매장에 ‘우리 생협’이라는 문구를 넣은 간판을 사용하지만, 생협이 아니다. 우리 생협 출신 경영진이 생산자 직소싱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서 만든 기업일 뿐. (‘우리 생협의 위탁판매자’에 불과함에도 생협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불법이라며 한살림, 아이쿱 등이 문제를 제기한 적도 있다.) 생협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유기농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면서도 새벽 배송의 편리함을 만끽하게 해주는 ‘유사 생협,’ 오아시스마켓은 이커머스 업계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하며 성장하고 있다.
과거, 생협 운동가들은 안전한 먹거리를 매개로 여성들을 임파워먼트하면서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갈 길이 있을 거라 믿었다. 2024년의 기혼여성인 나는 오아시스앱을 켜서 편리하게 유기농 달걀과 우유 등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이 간극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생협 :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준말로,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유기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시작하며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2021년 기준, 친환경 물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주요 생협 네 곳에 가입한 조합원은 약 137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