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읽고 싶었던 책. <야망계급론>의 문제의식은 흥미진진하다. 베블런이 1899년에 말한 '유한계급'과 다른 오늘날의 야망계급은 이런 사람들이다. 글로벌 경제에서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사람들, 혁신과 지식에 의존하는 경제의 부상 속에서 대학 졸업장과 전문적 숙련을 통해 지식을 획득한 사람들. 이들은 물론 소득수준이 높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지식 습득과 가치관에 있다. 이들의 지위는 “지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표들-디너파티에서 신문 칼럼을 놓고 나누는 대화, 정치적 견해와 그린피스 지지를 나타내는 범퍼 스티커, 농민 직거래 시장에서 장보기 등-을 통해 드러난다.”(39쪽) 이런 기표들이 야망계급의 가치관, 그리고 그런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 역시 드러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야망계급은 커리어에서부터 식품점에서 구입하는 식빵 종류에 이르기까지 온갖 선택을 하고 의견을 형성하는 데서 가치관과 문화적 사회적 의식, 지식 습득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은 크고 작은 온갖 선택을 할 때마다 자신이 사실에 근거해(유기농 식품, 모유 수유, 전기차 등의 장점에 관해) 올바르고 합당한 결정을 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결정이 식견 있는 것이며 정당하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요컨대 베블런의 유한계급이나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보헤미안 부르주아)와 달리, 이 새로운 엘리트는 경제학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야망계급은 특정한 가치관과 지식 습득에 기반한 집단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한 희소한 사회적 문화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39-41쪽
야망계급은 경제학적으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지식 경제의 주축을 담당하는 고소득자가 아니더라도 “예일대에서 문예창작 학위를 받은 이들, 아직 시나리오를 팔지 못한 시나리오작가들, ‘미국을 위한 교육’ 자원 교사들”(42쪽) 같은 이들 역시 포함될 수 있다. (돈 없는 힙스터를 표현한 이 대목에서부터 야망계급론이 남 얘기가 아니어버림...)
이들은 유한계급이 (은수저 같은) 과시적 소비에 몰두했던 것과 달리, 더 이상 과시적 소비에 목메지 않는다. 과시적 소비가 민주화되면서 더 이상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 대신 이들은 비과시적 소비에 몰두하는데, 여기에는 1) 정보비용이 드는 비과시적 소비, 2) 대단히 값비싼 비과시적 소비 두 종류가 있다.
정보비용이 드는 비과시적 소비는, 매니큐어 색깔이나 특정한 문화적 지식같이 그리 비싸지 않고 돈과 무관하다시피 한 기표다. 셰이머스 칸이 “학습된 형태의 자본”(명문 기숙사 학교 세인트폴의 아이들을 관찰한 결과, 돈과 무관한 행동으로 가치가 전용되는 것), 홀트가 “진정성과 감식안”(상층계급이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다큐멘터리 공유한다면 하층계급은 물질적 사치의 표지를 공유하는 것), 미셸 라몬트가 “상징적 경계선”(도덕이 전통적 계급 경계선과 문화 경계선을 초월하는 문제라고 주장)이라고 부른 문제들이랄까. 이런 기표들은 “먹는 것(미식, 유기농, 인간미가 풍기는 집밥), 식료품을 사는 곳(농민 직거래 시장과 홀푸드), 입는 옷(유기농 면과 라벨 없는 미국산 제품), 이야기하는 주제(월스트리트저널 기사나 시리얼 같이 화제가 되는 팟캐스트) 등 모든 것에서”(104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미묘한 신호들이 그들의 가치관과 지식 수준을 보여주는 계급 표지다.
대단히 값비싼 비과시적 소비는 육아, 의료, 대학 수업료 같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하는 동시에 기존의 계급 구분선을 강화하고 보강하는 것이다. 교육, 건강, 연금 등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지만, 결국 저자가 주목한 것은 교육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러한 고급 사립 유치원, 사교육비, 대학 등록금 등이 (비싸기도 하지만) 야망계급의 자녀들에게 상향 이동을 보장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4장에서 야망계급의 모성과 육아 문화에 집중한다. 자연주의 출산, 모유수유, 애착육아 등의 기표가 베블런 시대의 그리스어공부나 스포츠처럼, 과시적 유한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돈이 많이 들지는 않고 도덕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간과 여가가 풍부하고, 이런 형태의 모성을 장려하는 문화적 사회적 집단에 속해야만” (143쪽) 가능한 일이다. 유기농 소비 역시,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더 “정체성을 둘러싼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과 관련”(217쪽)이 있다. 소수자나 빈곤 계급과 대면하지 않으면서 선량한 시민이 되었다는 느낌만 준다는 것.
상층 중간계급 모성의 사회적 실천은 경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대다수 가정의 평범한 관계와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자본과 상징자본,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자유시간에 의존한다.
166쪽
저자는 모성, 과시적 생산, 도시 생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야망계급의 소비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이러한 소비가 결국 더 많은 지지를 받아서 사회 전반에 확산된다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중산층’의 문화라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 비판은 정당할까?
이 책은 야망계급의 소비 실천이 유해하다고 주장하지만, 왜 유해한지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이러한 실천의 유해성에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야망계급의 소비 실천은 가치있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계급간의 구별이라는 점에서 타자의 배제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과시적 소비가 민주화되자 비과시적 소비를 좇았듯, 야망계급의 소비를 누군가 따라한다면 이들은 즉시 그 실천을 버리고 새로운 실천을 찾아갈 것이다. 도덕적 선택처럼 보이는 이 실천들은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묘하고 의미심장해져서, 계급성을 가리고 자신과 같지 않은 선택을 하는 이들을 열등하게 보게 만든다.
돈 없는 힙스터이자 아이를 발도르프 어린이집에 보내고 유기농 매장을 들락거리는, 이전처럼 이끌리지 않지만 여전히 '자연주의 육아맘'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내가 한 선택들과 내가 간직했던 정체성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패대기쳐지는 과정은 통쾌하고 후련하다. 이 후련함을 바탕으로 새로운 글들을 써봐야지. 좋은 레퍼런스를 많이 만나서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