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자주 감탄하는 부분은, 그의 글이 전형적인 논쟁의 구도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래되고 익숙한 논쟁에 그는 매번 다른 샛길을 낸다. 예를 들면 이런 샛길이다. 임신중단을 여성의 ‘선택권’과 ‘생명권’ 경합이 아니라 남성 피임 의무의 문제로 보고, 성형 시술을 계급의 문제이자 의료 인력에 관한 문제로 접근하며, 성폭력이냐 성노동이냐가 아니라 성매매로 이익을 보는 집단이 누구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기존의 논쟁 구도에 문제를 제기”(9쪽)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 ‘성적 자기 결정권’을 비롯한 여러 여성주의의 주요 개념들은 비장애 남성의 인권 개념을 여성에게도 확대하고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전해왔다. 이 방식은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좁은 인권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한계 속에서 엎치락뒷치락할 수밖에 없다. 완전한 해체와 재구성은 어떻게 하는 걸까? 확실한 것은 이는 보다 ‘본질적인’ 사유를 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여기’에 집중하자는 주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같은 성적 자기 결정권의 의의와 한계는, 이 개념이 개인의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와 재구성이 아니라 남성의 경험에 기반한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몸/마음의 이분법을 그대로 수용하여 이를 여성에게도 확대하고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266쪽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나 사회구조가 작동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하는 방식이다. 이 체제 안에서 변화하는 성문화(섹슈얼리티)는 기존의 논쟁 구도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개인은 생존하기 위해 젠더를 포함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다이어트, 외모 관리, 성매매 등 여성성을 스스로 자원화하는 경우가 더 촘촘해지고 있다. ‘지금, 여기’의 문제는 계속 변하며, 이 현장을 중심에 둔 사유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너무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 본질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에 접근하는 ‘현장(local)의 정치’여야 한다. (...)
여성주의적 사유는 기원이나 원인보다는 차이, 흔적을 추적하는 데 강조점이 놓여 있다. 본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되기에 기원을 소급해가면 진리에 도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일직선적 사고방식은 수평적(horizontal), 공간적 사유와 달리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객관과 보편의 존재를 전제한다.
231쪽, 238쪽
(얼마전 어떤 회의에서도 '이 사안의 본질은...' 하면서 입을 턴 1인. 그 입을 다물면 정희진 선생처럼 독창적인 사유가 나올지니...)
그의 독창적인 사유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은 진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글을 쓰는 작업이 얼마나 두렵고 외로울까 생각한다. 미투의 정치학에 관한 글에서 그는 젠더화된 삶이지만 미투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는 것들에 천착한다. 이런 글은 승리와 희망에 빠지지 못하게 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다. 같은 진영이라 믿었던 이들과의 불화, 자기검열과도 싸워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 “사회 운동이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80쪽)이라는 선생의 문장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논쟁의 구도를 바꾸는 일, 다른 방식의 샛길을 내는 일, 지금, 여기의 조건을 사유하는 일… 이 일들이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이며, 변화의 방식이라는 걸 믿는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은 흔히 오해하듯 국가(민족)의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 ‘상상’이 숭례문 화재로 인한 슬픔이든 일본의 독도 ‘야욕’에 대한 분노든 간에,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국가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힘이라는 뜻이다. 이때 근대적 인식론의 원리인 물질과 언어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즉 언어(지식, 이데올로기, 이론…)나 감정 같은 무형의 것이 물리적 실체로서 현실을 만들어낸다. (...)
특정한 내용의 정치적 수사는 언술 행위자의 의도에 맞게 현실을 변화시키는 물리적 힘을 지니게 된다.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행위다. 약속이나 내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무엇인가가 행해지는 것이다.
159쪽, 162쪽
+ 내가 좀 변했구나 생각한 지점 중 하나. 몇년 전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면서 나는 남편이 '이런' 책을 읽는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내가 읽는 책을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하며 공부를 지지해주는 남편에게 '안도'하기도 했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나의 언어를 갖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걸, 내가 주체가 아니라 남성(남편)의 눈으로 바라보는 타자라는 걸, 이보다 실감한 순간은 없었다. 지금은? 그때는 그랬구나 싶다. 여전히 이런 문장에 밑줄을 긋지만, 더이상 아프지 않다.
고정희의 시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는 ‘남자는 사나운 사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사자는 움직일 필요 없이 가만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오로지 사자의 기분과 이익만이 법이요 정의인 사자의 우리 안에서 사자의 일거수 일투족에 마음 졸이고 눈치 보고 비위 맞추면서 끊임없이 사자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자가 되는 길’이다. 사회, 학교, 가정, 국가, 지구촌,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여자가 남자에게 맞춰야 하는 한 남성은 “네 탓이오” 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는 추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사자 우리 안에서 변해야 할 것은 세상과 여자들이다. 사자는 자아 구조 조정이라는 고통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흑인이 흑인으로 사는 한 백인이라는 범주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구를 숭배하는 비서구가 서구의 권력을 지속시켜주는 것처럼, 남자를 남자이게끔 만드는 것은 여자다.
125쪽
+ 이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썼던 글
https://blog.naver.com/iskii82/222353750771?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https://blog.naver.com/iskii82/222363094470?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