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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elaide Son Feb 11. 2022

삼촌! 어디가?

예상치 못한 동생의 홀로서기 대작전

수화기 너머 긴 정적을 뚫고 들려온 답변은 가히 충격적이게도 "안됐어."였다. 하, 낙심하는 동생이 너무도 가엾어서 그 순간, 그 장면과 음색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며 오래도록 끔찍한 잔상으로 남았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얼음장이 뱃속을 스치고 지나가듯 섬뜩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질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수십번이고 합격자 화면을 다시 조회하며 혹시 전산 오류가 아닐까(ㅜㅜ) 현실을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지켜보는 사람이 더 가슴이 찢어질 판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만오천여명이 응시한 이 시험에서 동생은 100등 안팎의 훌륭한 스코어를 기록했지만, 아무래도 많은 나이와 신발 사이즈에 가까운 끔찍한 GPA를 극복해내지 못한 모양이다. 모집정원이 30명인데 예비번호 15번을 배정 받았다. 통상 1~2명 정도가 빠져서 추가합격이 생긴다고 하니 정말 너무도 가혹하고도 확실한 불합격이다. 


합격자 발표가 예정되었던 4시가 슬금 슬금 지나자 동생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온갖 친지들의 연락이 빗발치기 시작한다. 누구보다도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다름아닌 나의 시어머니. 두 아들의 입시를 성공적으로 치뤄낸 것이 당신 인생의 크나큰 보람이자 행복한 순간이셨던지라, 십수년만에 집안에 입시를 치루는 사람이 등장하자 그때의 그 느낌과 기억때문에 너무나도 설레고 기대가 되셨던 모양이다. 우리 가족을 응원하고 있었을 많은 분들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것도 하나의 절차였다. 전화를 한바탕 쭉 돌리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내려와있었다. 내가 다시 학교가는 것도 아닌데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자식의 입시를 치룬 부모가 꼭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정작에 나의 두 아들들은 하나는 말이 느려 앵무새처럼 묻는 말을 따라하기 일쑤에, 하나는 뒤집혀서 기지를 못하는 바람에 팽이처럼 한 자리를 맴맴 돌고 있는 수준인데....)


지방 소재의 국립대에 이미 합격증을 받아놓았기 때문에 어찌 되었건 재수는 면한 상태이지만, 나의 머릿속은 엄청나게 혼란해졌다. 전적으로 동생의 통학거리를 고려하여 주거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럼 우리는? 이미 양쪽 집의 전세계약이 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되돌리기엔 너무 많은 강을 건넜지만 최악의 경우엔 모든 계약을 파기해야할 수도 있는 상황. 완벽하게 셈을 마치기도 전인데 이미 아찔한 수준의 금전적 손해가 얼른 헤아려졌다. 아, 일단 오늘은 더이상 생각하지 말고 지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동생 앞날의 안녕만을 빌어줘야할 것 같아 거한 술상을 펼쳤다. 참치에 화이트와인을 마셔대다가 취기가 오르자 그 언젠가 좋은날(아마도 원하던 학교에 최종합격 발표를 받는 날) 오픈하기로 했던 잭 다니엘 위스키 병이 열렸다. 어찌 되었던 오늘도 좋은 날임에 틀림이 없다. 어언 8년을 소득 없이 헤매이던 대학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과감하게 새 길을 선택하여 좋은 성과를 내었으니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셋이서 흥청망청 위스키병을 탈탈 털어 마시고 이튿날 하루 종일 물 한모금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노오란 위액을 토해내며 엄청난 숙취에 시달렸다.


하루를 통으로 날리고 나서야, 정신을 가다듬어 이제 뒷일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제와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무리다. 남편의 출퇴근 거리는 조금 길어졌지만, 그만큼 나의 출퇴근 거리가 가까워졌고 그토록 원하던 필로티 집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못말리는 향수병도 치유해야 한다!) 5인 가구 기준으로 예상하고 설계해왔던 모든 내용이 전면 수정되어야 하는 상황. 가구의 배치와 쓰임도 다시 생각해봐야하고 우리의 짐과 동생의 짐도 분리해내야한다. 동생이 고향에서 어떤 주거형태를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서도 후속조치가 많이 달라지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부모님 댁에서 4년을 지내며 학부 생활을 하는 것도 고려해보았다. 그러나 서른이 넘은 나이에, 그것도 열일곱살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해서 부모와 떨어져 살아온 기간이 너무 긴 성인 남자가 다시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서로에게 그닥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게 우리 모두의 의견이었다. 다만 한가지 걱정은 이 장성한 남성이 자취생활을 훌륭히 해내며 학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가 관건. 내가 17년도에 결혼해서 첫 신혼집을 구해서 나간 2년간, 동생은 서울의 어느 고시원과 비좁은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전에서의 연구원 생활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작은 빌라에서 몇 개월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열아홉살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래 쭉 나와 같이 살았다. 떨어진 2년 동안이 그가 경험한 유일한 홀로서기 기간인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한마디로 난장판, 총체적 난국에 가깝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 같고 모든 점에서 미숙한 것만 같아 걱정이 태산 같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품안에 가두고 돌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나는 이를 자처할 정도로 희생적이었지만 정작에 나의 부모는 더이상 이러한 희생을 원치 않고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싶어했다. 아빠도 동생도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기엔 이제 나이가 너무 들었다. 


하나의 공동체로 뒤엉켜 있던 우리 가정에서 동생의 자리를 도려내어, 새 집으로 이식하는 작업을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새학기에 맞추어 동생의 이사를 마쳐야 했으므로 우리집 이사와 이 작업이 겹치게 되어 나는 또한 몸과 마음이 무척 바빠졌지만 바쁘다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약 7주 안에 동생을 위한 뉴 보금자리 사업을 수행해야한다.





(公私가 多忙하여 요즘 인생 최고조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작가의 보금자리 이동 프로젝트는 다음주 금요일에 이어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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