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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여곡쩔 Mar 26. 2024

도서관 잔혹사, 연체료 31,400원의 스노우볼 -3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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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약 10년이 흘렀다. 나는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20대 중반에 입사한 첫 회사를 이직을 할 계획이 없어 17년간이나 다녔다. 공교롭게도 졸업증명서가 정말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고된 노동과 엄청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회사를 갑자기 그만두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백수, 아니 전업주부라는 말로 최후의 방패막이를 하는 신분이 되었다.


7년 전, 내가 결혼하기 전에 자취를 했던 동네의 집 근처에서는 대규모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구립 도서관 공사였다. 도서관이 근처에 생긴다고 생각하니 설렜다. 대학 시절 자발적 악연으로 가까워지지 못한 도서관과의 관계를 잘 풀어 역세권에 이은 도세권으로서의 입지를 쏠쏠히 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공 전 나는 결혼 준비 및 이사를 하면서 도서관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 집을 떠났다.


그 구립도서관과의 인연은 그 건물에 있는 키즈카페로 처음 맺게 되었다. 딸을 위해 인근 키즈카페를 찾아 처음 방문하게 된 그곳은 그날 이후로부터 내게 철저히 아이를 위한 건물이었다. 유아열람실에 가서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무료로 유아들에게 제공하는 책을 선물로 받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책을 빌려 읽은 적은 없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워킹맘으로서 회사 업무를 병행했던 지난 시간은 내 인생에 가장 바쁘고 고된 시간들이었고 자연스레 독서를 할 여력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독서를 할 여력은 있어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을 여력이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사서 읽었다. 이것이 도서관까지 가서 빌려 읽는 것보다 단순히 금전적인 비용 외에 시간 비용까지 고려하면 더 이득으로 느껴졌다.




백수, 아니 전업주부의 신분이 된 후 나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못해본 일들에 기웃대기 시작했다. 드라마 작가 수업을 들으며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에 있으면 자꾸 살림을 하게 되어 어딘가로 나가야겠다 싶었고 창작을 하려면 다양한 콘텐츠 인풋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서관에나 가볼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오로지 나를 위해 도서관을 갔고 무려 20살 대학교 1학년 1학기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드라마 대본 쓰기에 참고하기 위해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1~2세트 중 2편), 송재정 작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1~2세트 중 1편) 대본집을 빌렸고  장류진 작가의 소설 <달까지 가자>도 빌렸다. 그리고 <달까지 가자>는 읽지 못 한 채, 2주가 흘러 도서 반납일이 다가왔다.


반납일 당일 오후 4시, 나는 4시 20분에 유치원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딸을 맞이하러 아파트 단지 놀이터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와 도서관에 버스를 타고 가서 책을 함께 반납한 뒤, 유아 열람실에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다가 올 계획이었다. 아이와 버스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건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이면서, 하원 후 기나긴 오후 시간을 때울 커리큘럼으로 딱이라 생각했다.


집을 나서기 전,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인 초콜릿을 가방에 넣고, 목이 마를까 봐 아이의 작은 텀블러에 물을 담았다. 가방에 책 3권까지 넣으니 꽤 무거웠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버스 정류장에서 도서관까지 걷는 거리가 좀 있어 딸이 찡찡 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킥보드도 야무지게 챙겼다.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이하고, 함께 도서관으로 향하기 위해 시내버스에 탔다. 아이는 초콜릿을 먹으면서 가니 잔뜩 신이 났다. 버스에 나란히 앉아서 창밖으로 동네구경을 하니 아이는 깔깔 댔다. 이 순간 까지도 나는 계획성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다리 위에서 축축한 느낌이 올라왔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가방 안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에게 먹일 물을 담은 텀블러 뚜껑을 꽉 닫지 않아 물이 다 새어 버린 것. 당황한 나는 가방 안의 책들을 황급히 꺼내보았지만 모두 물에 젖어 있었다. 바지는 마치 오줌 싼 것처럼 잔뜩 젖어있었다. 며칠 전까지 극 중 인물이 물병 뚜껑을 꽉 닫지 않고 가방 안에 넣어 버려 난리가 난 에피소드를 습작 대본에 썼었는데 공교롭게도 똑같은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싸늘한 날씨에, 젖은 바지 차림에, 젖은 책 세 권을 꺼내서 왼손에 무겁게 들고, 다 젖어 무용지물이 된 가방에,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맨 뒤, 오른손으로 아이가 올라탄 킥보드를 끌고 있는 내 모습. 그저 호러와 다를 바 없었다.  


무겁고 춥고 고된 길을 지나 도서관에 도착해서 직원에게 물었다.

"오늘 책 반납일인데 오는 길에 물에 젖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원의 대답은 심플했다.

"새로 사다 주셔야 합니다."


혹시나 몰라 물었다.

"세 권 다요?"



개중 괜찮은 걸 가리키며 

"이것도요?"


직원은 단호했다.

"네"


거추장스러워진 책 세 권을 보이며 한 번 더 질척댔다.

"이 책들은 어떻게 해요?"


"가져가세요. 1주일 대여 연장 해 드릴 테니 그전에 새로 사서 가져다주시면 반납 처리 됩니다."


허망한 대화를 마치고 그날 어찌 저찌 시간을 보내고 젖은 책 3권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은 너무도 피곤했다. 아이도 피곤했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에 깜빡 잠이 들었다.


아파트 후문에 도착해 아이를 서둘러 깨워 일으키고, 젖은 책 세 권과, 아이가 빌린 책 한 권을 추가로 들고, 가방 2개와, 킥보드를 꺼내 택시를 내리려고 하는 순간, 기사 아저씨가 "콜 잡으려고 하야 되니까 빨리 내리라."며 성질을 낸다. 야박한 세상이다.


그날 밤, 배상용 책을 구입하려고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나의 아저씨> 대본집은 2권은 안 팔고 1,2세트로만 판다. 당근도 모두 거래완료다. 하는 수 없이 <나의 아저씨 1,2편>을 모두 구매했고 나머지 두 책을 포함해 총 72,540 원을 지불했다.


12년 만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왜 하필 이런 일이 이때 생겼을까, 도서관과 가까워질 수는 없는 걸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책의 신'이나 '시간의 신'이 있다면 나에게 벌을 내린 것 같다고. 아마도 많은 책을 읽고 마음에 양식을 쌓았어야 마땅한 20대 초반 시절을 이상한 똥고집으로 허투루 보낸 죄에 대한 처벌이렸다. 결국 스무 살 때 만든 스노우볼의 최종 실체를 사십 대에 정면으로 맞이하고야 말았다.


엄마가 대신 내줘 내가 직접 갚지 않은 나의 인생 첫 부채 31,400원이 12년간의 괘씸 연체료를 더해 72,450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물기가 마르면서 모서리가 우글우글 해져버린 중고 책 <나의 아저씨> 2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1편, <달까지 가자> 와 새 책 <나의 아저씨> 1편이 그렇게 나의 자산이 되었다.

Fin.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기억과 뒤늦은 깨달음을 정리합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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