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네 번째 마음 쓰는 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고요.
나는 나를 알지 못한다. 스물일곱 해를 오롯이 나로 살았는데도 나는 나를 모른다. 그래도 몇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조각들이 있다. 나는 개인적이다. 가끔은 이기적이다. 조금은 청승맞다. 정적이다. 우울을 그림자처럼 달고 산다. 이젠 그것도 낭만이라고 이름 지었다. 낯선 이들 틈바구니에서는 멀미가 난다. 가끔 익숙한 틈바구니에서도 멀미를 한다. 나는 사람멀미를 한다.
그래서 나는 고요를 사랑한다. 그 속에서 비로소 안심한다. 그래서 내 행복도 거기 두고 산다.
생은 때때로 타인으로 인해 풍성해진다. 알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내 행복은 거기에 있다. 나는 개인적이고 또 이기적이기도 해서, 행복은 혼자 몰래 숨어서 맛본다.
삶에 얹어 터질 때면 나는 달아난다. 내가 숨어들 곳을 고르는 조건은 간단하나 분명하다. 1인실. 그리고 자유 피정. 그렇다. 나는 수도원으로 달아난다. 피정이란 피세 정념이라는 뜻으로, 세속을 피하여 마음을 고요히 한다, 혹은 생각에 잠긴다는 종교적 의미인데. 나는 생각엔 잠기지 않고 그냥 주는 밥 먹고 산책하고 책 읽고 낮잠 자고 예의상 미사에 들어가 몰래 졸고 기도는 적당히 하는 척하고. 대체로 생각도 속세에 두고 다녀온다. (내 종교에서 하느님은 사랑 이랬다. 내가 좀 이래도 아마 봐주실 거다.)
그곳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내가 잘 가는 인천에 한 수도원에는 베개 서너 개를 엮은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푹신한 방석이 있다. 아마 무릎을 접어 앉아 기도하면서 다리 상하지 말라고 두신 배려인 듯하나, 내게 쓰임은 좀 다르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열고, 한편에 얌전히 놓인 그 묵직한 방석을 끌어다 벽에 가까이 둔다. 거기에 엉덩이 붙이고 앉은 채로 베개를 끌어내려 등에 받쳐 둔다. 배낭을 뒤적여서 책 무더기를 꺼내서 그 옆에 흩어둔다. 그리고 그 요람같이 아늑한 곳에 몸을 꼭 맞춰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 내 짐 가방은 단출하다. 세면도구, 입고 잘 옷, 입고 지낼 옷. 그리고 입고 간 옷. 대신 읽고 싶은 책을 욕심만큼 챙긴다. 그때는 전자책도 필요 없다. 꼭 책장 넘기는 소리 사락사락 채워져야 행복의 완성이다.
열어둔 창으로 드나드는 바람에 얇은 커튼이 살랑거리고, 그 사이로 햇살이 방 안 가득 끼얹어졌다가 마르고 다시 끼얹어지고 마르길 반복한다. 창문 너머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치지도 않고 재잘댄다. 그게 퍽 간지럽고 듣기 좋다. 그 작은 숨들을 귓전에 두고 책을 마저 읽는다. 그러다 보면 방에 쏟아지던 빛들이 어느새 발그레해지고, 그 무렵 어디선가 높고 푸른 종소리가 쏟아져 내린다.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 나는 잠시 책을 덮고 고민한다. 갈까? 아니 말까? 자리에서 일어나 선다. 갈까? 말까? 복도에 낮게 깔린 적막을 휘젓고 낯선 발소리가 지나다닌다. 다들 하루 세 번 식사시간에만 조용히 만났다가, 온종일 각자의 방에서 무덤처럼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 나 같은 사람들. 아니, 그래서, 갈까? 말까? 문 앞에 선다. 갈까? 문고리를 잡는다. 말까?
나는 도로 방석으로 몸을 던진다. 에이, 말자. 대신 숨소리도 죽이고 없는 척한다. 기도 시간에 가지 않아도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괜히 그런다. 주방에서 미리 챙겨다 둔 간식도 꺼내 먹는다. 학창 시절 땡땡이라도 친 것처럼 쫄깃한 긴장에 킥킥 웃음이 다 난다. 웃음소리도 죽인다.
나는 그렇게 한 번씩, 휴대폰을 끄고 세상에 나를 끄고 혼자 숨어든다. 어느 영악한 토끼의 간처럼, 행복이 내 속에 없을 리 없다만. 나는 행복을 그곳에 꺼내어 놓고 다닌다. 그럼 위기가 찾아와도, 등을 좀 얻어 탔더니 가질 걸 내놓으라 해도. 나는 두고 온 곳으로 달아 날 수 있다.
내 행복은 여기 없고, 거기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