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비를 쫄딱 맞아 삼일 내내 신발과 양말이 젖어있었어도 좋았다.
새벽 4시 50분, 421번 버스를 탔다. 논현역에서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버스는 이태원에서 추석 연휴 첫날부터 신나게 달린 취객들을 가. 득. 싣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갈월동 정류장에서 내려서 서울역까지 가는 길은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항상 스산하고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차 출발 시각은 6시 20분이었지만 칸과 칸 사이 입석 자리에 앉으려면 문이 열리는 곳에 미리 서서 눈치싸움을 해야 한다는 블로그의 꿀팁을 입수하고는, 입석 자리가 두 개 있다는 특실 칸 4번에 5시 50분부터 서서 기차를 기다렸다. 서울역에서 타는 기준으로 문에서 멀리 있는 쪽 좌석이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덜 열린다고 해서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날 일 마무리하고 짐 싸느라 세 시간밖에 못 자서 그런지 입석 자리가 바닥에 앉는 것보다 불편했지만, 귀마개를 꼽고 문에 기대자마자 잠들었다. 승객들이 내릴 때 잠깐씩 깬 거 말고는 밀양까지 숙면을 취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매식도 안 하고 최대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싶어서, 밀양역에 내려서 이번 백패킹 들머리인 구만 산장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네이버 지도에서 찾아봤다. 일단 밀양역에서 시내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를 갈아타면 되는 것 같았는데, 18분마다 있다던 얼음골 3과 별내 2번은 20분 내내 양방향 다 운행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차라리 시외버스터미널로 갔으면 시간이라도 제대로 알고 비를 피해 기다렸을텐데...
대신! 밀양 시내에 내려서 추석 당일 전날 시장에 들러 제사음식과 요리 재료들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동태전이라도 하나 사서 저녁으로 산 정상에서 먹으며 혼자 추석 분위기를 내볼까 하는 궁상맞은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매 끼니 계산해서 식량을 챙겼고, 백패킹은 최대한 가볍게 다니는 것이 좋기 때문에 2.5초 고민하고 패스.
밀양시내에서 결국 시외버스는 못 타고 이디야에서 화장실을 쓰고(감사합니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구만 산장에 내렸다. 혼자 등산을 간다니깐 택시기사님께서는 여느 어른들이 말씀하시듯, "여자 혼자? 담력 좋네."라고 응원 아닌 응원을 하며 내려주셨다.
루트를 시계 화면으로 보며 따라갈 수 있는 gpx는 두 개를 담아왔는데 하나는 구만 산장에서 출발하지만 태극종주의 원래 루트인 배내고개로 내려가지 못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석 태극종주길이었다. 구만 산장에서 출발할 때 첫 번째 gpx를 참고하고 운문산 이후부터는 두 번째 gpx를 따라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처음이라 얼른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는지, 구만산으로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gpx는 참고하지 않고 구만산 방향 표지판만 따라가다가 결국은 가파른 등산로로 올라가서 처음부터 고생을 했다. 뒤늦게 구만 산장 gpx를 켰지만 이미 루트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무릎 아래 풀들을 다 적셔버려 신발과 바지, 머리 모두 젖고 시작하는 종주산행이 되었다.
구만산 정상을 지나 굽이굽이 능선을 따라 첫날 비박지인 운문산에 도착했다. 올라오면서 물을 다 마셔버리기도 했고, 저녁과 아침을 지을 물이 필요해서 운문산 도착 바로 전 상운암 쪽으로 우회해서 샘물을 찾는데 비도 오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상운암 쪽으로 가다가 왼쪽에 샘물이 있다고 cayl 의재 사장님이 그랬는데, 내가 물을 뜨고 있는 이 샘물이 그 샘물인지 뭔지 고민할 틈도 없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물을 받아서 2리터를 간신히 채웠다.
물을 집중해서 채우고 나니 그제야 이가 다닥다닥 부딪히도록 추워졌고 저체온증이 오는 것 같았다. 역시 혼자 있을 때 생존본능이 더 강해진다고 운문산을 뛰어가다시피 올라가서 몸을 다시 덥히고 텐트를 부지런히 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옷을 말렸다. 무난하게 헬기장에 텐트를 칠까 하다가 운문산 야경이 너무 멋질 것 같아서 정상석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텐트를 쳤다.
정상까지 올라오니 다시 따뜻해져서 텐트 칠 장소까지 고민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안 추웠었나 보다. 정신이 없어서 사진도 없긴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배도 덜 고팠는지, 신라면에 알파미까지 추가해서 한 그릇을 뚝딱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섯 숟가락을 아쉽게 남겼다. 이때 남긴 라면 말이 다섯 숟가락은 다음 날 누룽지와 같이 불려서 심심할뻔한 누룽지에 라면 맛을 살짝 더해주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음식물을 남기면 쓰레기가 돼서 짊어지고 내려와야 하니, 백패킹에서는 먹을 만큼만 챙기고 먹을 만큼만 요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번 종주에서 잠자리로 정한 운문산과 천황산 정상 모두 한국에서는 처음 본 엄청난 산세를 보여줬다. 적어도 10겹의 능선이 겹쳐진 모습이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 정도 경치라면 몇 번이고 더 와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도 만나지 못한 첫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고 나는 한 번도 깨지 않고 12시간을 자버렸다.
첫째 날은 사람을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는데 둘째 날 아침부터 다른 백패커를 운문산 정상에서 만났다. 그리고 다행히도 둘째 날은 햇빛이 쨍하게 떴다. 밤새 바람이 그렇게 불어댔는데도 반팔과 바지는 하나도 마르지 않았고, 돌에 널어두면 그나마 더 빨리 마를 것 같아서 축축한 옷가지들을 부리나케 정상석 옆 돌 위에 널어놓고 작은 짱돌 두 개로 날아가지 않게 눌러두었다.
텐트를 정리하고 오트밀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커피도 한잔 내려마시며 후에는 닥칠 바쁨을 예상하지 못하고 여유를 부렸다.
9시가 넘어서 느지막이 출발했으면서도 점심도 한 시간 동안 경치를 만끽하며 가지산 정상 전 뷰가 좋은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커피도 한잔 더 내려마셨다. 가지산에 도착할 즈음에는 다시 정상이 구름으로 가득 차서 아쉽게도 낙동강까지는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 답게 가지산의 ‘지'는 내 이름의 ‘지'와 같은 한자를 써서인지 괜히 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둘째 날 코스는 언덕을 여러 번 넘는 느낌으로 쭉 가고 심지어 임도도 약간 있었는데, 하루 종일 경치를 즐기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것이 잘한 건지 못한 건지 그 바람에 둘째 날의 중간 지점이었던 천황산에서 엄청난 일몰을 보게 됐고, 결국 목표했던 재약산으로는 도저히 발을 못 떼고 천황산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천황산에서 해가 지기 바로 직전 구름에 해가 가렸을 때 열 겹이 넘게 뒤로 펼쳐진 능선은 정말 장관이었다. 마치 작년 마운틴 레이니어 국립공원에서 본 산들을 연상시켰고 곧이어 불타오르는 노을이 이어졌다.
해가 넘어가자마자 동쪽에서 구름이 미친 듯이 올라왔고 안개가 낀 마냥 마을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점심을 누룽지로 먹은 탓에 업힐에서 너무 배가 고팠지만 일출을 일분도 놓치고 싶지 않아 잠시 배고픔마저 잊었지만 이내 다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부지런히 헤드램프를 끼고 짜파게티를 말아먹고 핫초코까지 클리어. 핫초코는 항상 다 녹지 않고 가루가 조금 남아 다음날 아침에 커피와 섞으면 자동으로 모카가 되는 효과도 준다.
백패킹을 하면서 음식 냄새는 항상 야생동물을 불러오니 조심해야 한다고 들어왔지만, 이날 밤은 왠지 핫초코 덩어리가 담긴 컵을 텐트 밖에 두고자 버렸다. 그리고, 다람쥐가 컵 뚜껑을 뜯어먹는 어처구니없지만 5%는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해야 될 일이 있고 밀아야 될 일이 있나 보다.
고양이를 예상했지 다람쥐일 줄은 몰랐는데...
천황산 정상에는 다행히 다른 백패커가 두 팀 정도 더 있었고, 그중 한 팀은 절벽 같은 바위 바로 앞에, 다른 한 팀은 천황재에 피칭을 했다. 둘째 날밤도 역시 바람이 세차게 불어 귀마개를 끼고 새벽에는 추석맞이 보름달과 별을 볼 수 있을까 하며 구름 속에서 일찍 여덟 시쯤 잠들었다.
한시쯤 일어나니 구름도 다 걷히고 바람도 안부는 고요한 밤으로 날씨가 얌전해져 있었고 달과 별자리가 너무 잘 보여서 해드램프가 없이도 정상 주변을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고 야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태극 종주의 원래 루트대로 완주를 하려면 셋째 날 적어도 다섯 시에는 일어나서 출발을 했었어야 했는데, 푹 자고 일어나니 역시 또 일곱 시가 지나있었다. 새벽 다섯 시에 알림을 들었지만 에어매트리스가 유난히 조용하고 푹신하게 느껴졌던 밤이었다.
어젯밤 구름 속에서 잔 탓인지 텐트는 마치 비를 맞은 듯 안팎 모두 축축이 젖어있었고, 손수건으로 물을 닦아내고 털어내어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였다.
다른 박지에서 자고 올라온 백패커들도 몇 분 지나가셔서 부지런히 텐트를 접고 오트밀을 또 후루룩 먹고 재약산으로 출발했다. 재약산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는 조금 더 오래 걸려서 어젯밤 여기까지 왔으면 일몰과 노을은 아예 못 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약산에서 내려와 사자평을 지나는 길 중 반은 너무 잘 닦고 꾸며놓아 마치 산책길을 연상시켰고, 나머지 반은 길인지 억새인지 모를 만큼 억새로 빽빽한 길이었다.
셋째 날은 등록에 탈출로가 특히나 많아서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중간에 언제라도 포기하고 울산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걸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완주를 하고 싶었다.
매식을 하지 않겠다는 소소한 다짐도 죽전마을까지의 급격한 다운힐 후 털린 마음을 다잡기 위한 브라보콘으로 무너졌다. 구구콘을 먹고 싶었는데 슈퍼에는 브라보콘밖에 없었다.
둘째 날 계획했던 만큼 가지 않고 천황산에서 하루를 보낸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오리지널 영남알프스 태극종주 루트는 결국 시간상 완주하지 못하고 억새가 가장 멋지다는 신불재라도 보기로 결심했다.
4시 5분 기차였는데 1시에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에서 신불재까지 초스피드로 1시간 안에 올라갔고 열심히 영상과 사진을 찍은 후, 혹여나 기차를 놓칠까 한틈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부지런히 뛰어내려왔다.
다른 주말이었으면 ktx나 srt앱에서 무한 새로고침을 해서 더 늦게 출발하는 기차표를 구하고 여유롭게 태극 종주를 마무리했겠지만 추석 연휴이다 보니 역 발매 입석까지 모두 매진이었고, 이미 구해둔 자리를 놓치면 오늘은 영영 서울로 못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시 10분에 건암사~가천저수지 쪽으로 하산해서 콜택시를 부르고 3시 35분에 무사히 울산역에 도착했다. 바쁘게 걷느라고 점심도 아이스크림과 피키 바로 때운 참이라, 역 안에서 참치김밥과 새우버거를 사서 올라가는 기차에서도 입석 자리가 남아있길 간절히 기도하며 특실 칸 앞에서 오매불망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운이 너무 좋게도 부산에서부터 출발한 기차인데도 특실 칸 입석 두 자리가 남아있었고, 역시나 입구에서 먼쪽 의자에 앉아 다리를 올리고 서울로 무사 귀환했다.
1박 백패킹과 2박 이상 백패킹의 난이도, 그리고 여럿이 함께하는 백패킹과 솔로 백패킹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2박 이상이면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여럿이 하면 상대를 배려하며 걸어야 하지만 그만큼 덜 심심하기도 하다.
시간에 쫓겨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종주 스케줄은 다음부터 하지 말아야겠다는 배움도 얻었다. 억새 철 바로 직전에 왔고, 명절 연휴에 와서 등산객이 평소보다 훨씬 적은 편인 것은 정말 좋았다. 다음 달 이맘때쯤 가족들이랑 억새가 활짝 만개할 때 다시 와서 그때는 관광객 놀이를 해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