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선명해지는 시간
누구나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하루를 마치고, 그 날의 때가 묻은 몸을 씻어낸 후,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이때 맥주 한 캔이 곁들여지면 더할 나위가 없다.
매일 다이어리를 쓰며 그날 하루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기엔 아쉽게도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날이 아니면, 그다음 날이라도, 그것도 힘들면 그 주의 주말이라도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꼭 갖는다.
서른 개 남짓 나눠진 칸에 일정을 채워 넣고, 문화생활을 한 날엔 티켓과 함께 내가 느낀 것들을 쭉 적어 내려간다. 또 다른 페이지엔 지난날에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을 꾹꾹 눌러 적는다. 어느덧 4년째, 총 3권의 다이어리가 나의 빽빽한 손글씨로 채워졌고, 4번째 다이어리를 채워 나가는 중이다.
나는 회의를 하든, 공부를 하든 뭐든지 손으로 끄적여야 하는 사람이다. 머릿속에서 둥둥 떠 다니던 생각들이 글씨로 가시화되어야 온전히 내 것이 된 느낌이 든다. 다이어리를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루를 손글씨로 풀어냈을 때, 그 하루가 온전히 나의 것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만 고여 있던 그 날의 생각과 감정을 꺼내 글로 풀어내고, 직접 두 눈으로 마주했을 때, 아, 나는 오늘 ‘이런’ 하루를 보냈구나, 한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에 나만의 의미가 붙는 것이다.
다이어리는 완전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나만의 공간. 그 안에서 솔직하게 내 감정을 표출한다. 속 시원히 무언가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나에겐 다이어리가 그럴 수 있는 공간이다. 그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람 역시 나다. 뉘앙스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스스로에게 감정을 털어놓고, 스스로를 토닥여주는 것이다. 마치 자아가 두 개로 분리된 것처럼.
분리된 자아 중, 토닥여주는 역할의 자아는 항상 관대하지만은 않다. 가끔은 내일은 더 열심히 살라며 질책하기도 한다. 때로는 스스로를 토닥여주고, 때로는 엄격하게 대하기도 하며 하루하루 다르게 흘러가는 이 세계에서 나만의 중심을 잡는다.
내게 다이어리를 쓰는 것은 단순히 기록하는 것, 그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다이어리를 씀으로써 어떤 하루에 나만의 의미를 붙이고,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사람들의 틈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나는 이 시간을 내가 더 선명해지는 시간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내가 하루 중 다이어리를 쓰는 시간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