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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수 Oct 20. 2023

꽤 많은 디자인이 서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되어있습니다

기준을 깨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포용적 디자인 


기준값과 포용성의 상관관계 


지금 핸드폰의 지도 앱을 실행시켜서 현재 위치에서부터 가고 싶은 식당까지 걸어서 가는 길을 검색해 보자. 나는 23분이 나왔다. 이것은 평균적인 성인 기준 보폭에 따라 계산된 도보 이용 시간이다. 지도 앱 서비스 제공자에게 걷는 사람의 기준은 곧 두 다리로 걷는 성인이라는 얘기다.


신체와 접촉이 있는 제품은 사람의 평균 키, 평균 몸무게 등의 보편적인 신체 특성에 맞춰 개발된다. 일반적인 냉장고는 서서 팔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을 위해, 드럼 세탁기는 허리를 숙이고 세탁물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을 위해, 키보드는 한 손이라도 자판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내에서 휠체어를 타는 사람과 좌식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분명 제품의 사용에서 소외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손 닿는 거리에 막대기를 항상 둔 까닭


만약 여러분이 집에 있다면 잠깐 방바닥에 앉아서 현관까지 앉은 상태로 몸을 움직이며 가보자. 정수기 버튼을 어떻게 누를 것이며, 요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또 어떻게 꺼낼 것인가? 대략 난감한 상황일 것이다. 우리가 관찰 조사를 한 분 중에 이렇게 20여 년을 생활한 전상실 님이 있다. 이분에게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는 방식은 비장애인과 사뭇 다르다. 겨우 손을 쭉 뻗어 냉장고 중앙에 있는 손잡이를 열고 내부를 보여준다. 참고로 냉장고는 양문형 구조로 좌측이 냉동실이고 우측이 냉장실이다. 


그나마 이런 형태의 냉장고라 다행이지 최근 나오는 상 냉장실 하 냉동실 구조는 냉장실 이용이 더 힘겨워진다. 이분에게 상단은 보관창고나 다름없고, 하단이 주로 쓰는 구역이다. 김치나 계란 등 본인이 직접 꺼내서 매번 먹는 반찬과 식품들은 아래쪽에 위치한다. 위쪽은 모두 활동지원사가 보조할 때 필요한 것들로 채워져 있거나, 유통기간이 오랜 것들이 차지한다.


냉장고 위칸 사용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랫칸에 자주 먹는 물건들을 보관한다. ©미션잇


막대기는 언제나 유용하다. 소위 통돌이 세탁기에서 세탁물을 꺼내기 위해서는 서서 세탁물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전상실 님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인해 척추를 올곧게 세워서 장시간 서있기가 어렵다. 그래서 의자까지 올라간 뒤 막대기를 활용해 세탁물을 꺼낸다. 그렇다면 드럼 세탁기를 사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10년 전 통돌이 세탁기를 살 당시에는 서서 물건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드럼 세탁기 역시 좌식으로 생활하거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대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휠체어 이용자는 냉장고에서 손이 닿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어요. 맨 아래칸은 좀 위험하죠. 허리를 굽히고 열어야 되니까 잘못하다가 휠체어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거고요. 드럼 세탁기도 마찬가지로 손을 깊게 뻗어야 하는데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세가 잘 나오지 않아요." 작년 인터뷰 했던 한 사용자의 의견이다.


막대기가 유용한 경우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우선 실내 전등을 끌 때이다. 전등 스위치는 보통 성인이 일어섰을 때 손으로 끄기 좋은 위치에 있다. 전상실 님은 막대를 사용하여 누른다. 정수기는 어떤가? 보통 주방 싱크대 옆에 위치하다 보니 앉아 있는 상태에서 손으로 버튼을 누를 수 없다. 역시 막대기를 사용해서 정수 버튼을 누른다. 모든 정수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분의 정수기는 온수와 냉수 버튼이 위 쪽에 달려있다. 결국 정수기를 산 뒤로 온수와 냉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마시지 못했다. 그리 시원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물만 마셨다. 



이 플라스틱 막대가 누군가에게는 별 물건이 아닐 수 있지만, 좌식 생활을 하는 분에게는 방 안의 버튼을 누르고, 빨래를 꺼내는 유용한 삶의 도구다.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1 



기준 값을 깨는 것에서부터 포용적인 혁신이 나옵니다 


앞서 서 있는 사람의 기준에 의해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 사용자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단언컨대 이러한 보편적인 기준과 관념을 깨는 노력에서 포용적인 혁신이 가능하다. 아래 몇 가지 사례를 참조해 보자.


뇌성마비 장애인 청년이 손을 사용하지 않고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나이키 플라이이즈 Flyease


르브론 제임스와 출시된 신발을 신고 있는 메튜 왈저 ©Nike


1995년 조산으로 두 달이나 일찍 태어난 메튜 왈저는 Matthew Walzer 한 살 때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혼자 걷기, 균형감 유지하기 등 여러 가지 장벽들을 헤쳐나가고 있던 왈저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신발 끈 묶기였다. 오른손을 자유롭게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싶었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발 끈을 자유자재로 묶고 푸는 것에 더 답답함을 느꼈다.

“16살이 되면 혼자서 옷을 완전히 입을 수 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신발 끈을 묶어줘야 했습니다. 완전히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10대로서 저는 이것이 매우 답답했습니다."


2012년 여름 왈저는 나이키에 신체적 능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났고 그 결과 2012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협업이 진행됐다. 왈저는 제품 개발 과정 중 소재, 핏, 디자인, 지지력 등 여러 가지 방향에 대한 인사이트를 전달했다. 결과적으로 나이키 최초의 플라이이즈 라인업인 Lebron Zoom Soldier 8 FlyEase 가 탄생했다. 이후 플라이이즈는 쉽게 신발을 신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되어 현재와 같은 라인업을 출시하고 있다. 신발은 손을 사용해 끈을 묶어야 한다는 관념을 버린 결과다. 

최근 출시되었던 고 플라이이즈 이지 온. 리뷰 중에는 의족을 착용하시는 어머님이 신발 신기에 너무나 편해서 좋았다는 의견도 있다. ©Nike




백인 우월 주위를 깨는 색 배치로 포용성 강조, 
글로시에 Glossier 


2014년 설립 후 최단기간 기업가치 1조 원을 넘는 유니콘으로 성장한 글로벌 뷰티 기업 글로시에 Glossier가 있다. 인상 깊은 점은 홈페이지의 모든 메이크업 제품의 기본 값은 어두운 색이다. 어두운 색부터 시작하여 밝은 색으로 진행된다. 더 보기 (+) 버튼을 누르면 그제야 밝은 색이 나온다. 원래 대부분의 뷰티 브랜드들은 어땠을까? 당연히 밝은 색이 우선이었다. 백인 중심의 사회였으니까. 어두운 색이 기본값인 것은 포용적인 기업 가치를 대변한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고정관념을 뒤집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글로시에 홈페이지의 파운데이션과 컨실러 제품의 기본 값은 어두운 색부터 시작한다. ©Glossier
우측의 + 버튼을 누르면 밝은 색이 등장한다. 기본값이 완전하게 어두운 색으로 맞춰져 있다. ©Glossier




모든 사람이 정교하게 

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기준 넘어서기,
가이드 뷰티 Guide Beauty


손 사이에 끼울 수 있으면서 도톰한 조형으로 그립감을 향상한 가이드 뷰티의 아이 브러시 ©Guide Beauty
펜슬 라이너 대신 실리콘 팁을 활용해 아이라인을 그리는 동시에 그립감을 향상한 가이드 완드 ©Guide Beauty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교육자인 테리 브라이언트 Terri Bryant는 2015년 어느 날 손의 경직과 떨림과 같은 이상 징후를 느꼈다. 40대 중반 결국 그는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메이크업이 일상이자 자신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만 했다. 연구 끝에 자신을 포함하여 손에 떨림이 있는 사람들도 잡기 쉬운 메이크업 도구인 가이드 뷰티 Gudie Beauty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CCO(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 할리우드 배우 셀마 블레어 Selma Blair를 영입했다. 블레어는 금발이 너무해, 헬보이 등의 출연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배우다. 그는 2018년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진단받았다. 참고로 다발성 경화증은 척수와 뇌에 발생하는 자가 면역 질환으로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이동에 제약이 생기며, 저림 증상이 발현될 수도 있다. 가이드 뷰티의 온라인 후기에는 뇌졸중으로 손떨림이 있는 사람, 관절염으로 일반적인 연필을 쥐기 어려웠던 사람 등 기존 제품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용자들이 자신감을 얻었다는 내용이 가득하다.




발상의 시작을 기존에
배제되었던 사용자로부터 :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보자 



발상의 시작을 기존에 배제되었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 시작하는 것이 포용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출발점이다. 우선적으로 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제약을 해결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뇌성마비를 가진 청년이 신발을 편리하게 신을 수 있도록 제공한다. 손떨림이 생긴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메이크업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백인 우월주의가 은연중에 베여있던 웹페이지에도, 검은 피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관념을 깬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벽을 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혜택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된다. 신발을 더 편리하게 신고 싶은 사람이나, 좋은 그립감을 가지고 메이크업을 빠르게 하고 싶어 하는 상당 수의 사람들에게도 유용하다. 또한 기존의 관념을 깨는 행동으로 피부색상과 관련된 제품에도 형평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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