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병수 Oct 22. 2023

편안함을 위해 평범함을 디자인하다

시니어 세대를 고려하는 디자인 원칙

익숙함 그리고 
고령 세대의 정신 모형을 고려한 디자인


'디자인한다'라고 하면 보통 새롭거나 눈에 띄는 특별한 차별점을 만드는 것이다. 유니크 Unique 하게 디자인해 봐'라고 말하지 '평범하게 해'라고 말하는 디자인 디렉터는 아마 없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리디자인 Redesign이라는 개념도 있지만, 어쨌거나 과거를 더 세련되게 바꾸거나 불편한 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관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익숙함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좋을 때가 있다. 우리가 오랜 기간 여행을 떠나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편안한 침대에 누울 때의 감정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오랜 기간 사용했던 방식, 익숙한 스타일이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단지 물건이나 공간뿐 아니라 오랜 기간 만나온 사람들도 편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장소에서 나이 들기 Aging in Place에서 말하는 '장소'는 물리적인 것을 넘어,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 이웃들과의 상호작용이 내포된 넓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고령 세대를 고려한 디지털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고령 사용자들이 익숙하게 쌓아온 정신 모형 mental model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정신 모형 mental model은 사용자가 어떤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사용하는 사고의 모형이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경험과 쌓은 지식들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오랜 기간 형성된 습관일수록 잘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고령 사용자를 고려한 디자인을 진행할 때 이들의 내면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디지털 화면 인터페이스에서 큰 글씨와, 단순화된 화면, 높은 대비의 텍스트 등을 구성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최적의 사용자 경험을 끌어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공학자 제프 존슨 Jeff Johnson은 고연령 사용자가 디지털 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시력, 청각, 운동능력 등 신체적인 기능 저하에 따른 것으로만 여기는 것을 가장 큰 오해라고 꼽았다. 이번에는 고령 사용자가 어떤 정신 모형을 가지고 있는지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왜 버튼이 보이지 않을까?
<버튼에 대한 정신 모형>

80년대 출시한 금성(현 LG) 비디오 플레이어. 필자도 위 사진과 똑같은 제품을 90년대 집에서 사용했다. 외부로 노출된 버튼이 정말 많았다.
카세트 오디오 역시 외부에 버튼이 모두 노출되어 있었다. 너무 버튼이 많아 정작 누르는 버튼은 몇 안되었다.

집 앞까지 식재료 배송이 되는 서비스를 즐겨 쓰시는 칠순의 은퇴 교수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교수님은 집 앞까지 음식을 배송해 주는 서비스가 장을 보러 직접 밖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매우 만족감을 표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은 자신이 주문한 식재료를 확인하고 싶어 졌는데,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는지 몰라 고객센터에 직접 전화해서 겨우 알아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웹이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는 ‘마이 페이지’ 나 ‘사람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하여 자신의 주문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고령 사용자는 이러한 기능이 숨겨져 있다는 것에 대해 당황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아이콘을 보고 기능을 유추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의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자라왔던 시대의 기계와 아날로그 기기에는 탐색 기능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화기,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기기들은 버튼이 모두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고, 따라서 직접적으로 버튼을 누르거나 노브를 돌리는 등 단순한 동작으로 원하는 채널과 주파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전혀 다른 체계의 인터페이스가 제공된다. 이제 사용자들은 메뉴와 아이콘을 몇 번씩 클릭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원하는 기능을 실행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령 사용자에게 아이콘과 메뉴 트리구조를 이해하는 새로운 학습 곡선 learning curve이 필요한 셈이다.



왜 한 번에 처리가 안되지?
<기능 실행에 대한 정신 모형>


가끔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마트에 갔을 때 키오스크 앞에 서계신 어르신분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칠순에 가까운 분들은 모바일로 계좌이체를 하지 않고 아직도 직접 은행에 가시는 경우도 많다. 앱이 훨씬 편하다고 말씀을 드리지만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능을 실행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비디오기기를 생각해 보면 어떤 ‘단계’가 존재하는 구조가 아니라 버튼의 기능을 외우면 한 번의 클릭으로 바로 실행되는 원스텝 구조였다. 시장에서 장 볼 때는 어떤가? 그냥 물건을 짚고 돈을 내어 계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온라인 쇼핑이나 키오스크 주문은 혼동스럽다. 한 페이지 안에서 모든 태스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단계의 페이지 이동이 있다. 메뉴 버튼을 클릭하여 장바구니에 담고, 다시 주문을 확인하고 결재 버튼을 누르는 등 여러 가지 과업이 단계적으로 주어진다. 셋 내지는 네 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소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한 클릭할 때마다 전환되는 페이지 화면에서 버튼의 위치와 기능을 빠르게 파악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주문 및 결제 화면의 인터페이스에 익숙한 세대들은 키오스크 화면이나 유사한 웹사이트에 쉽게 적응하지만, 어르신들에게 새로운 인터페이스는 학습에 대한 정신적 노동력을 요구한다. 결국 대형마트 매장에서 줄이 몇 배로 길더라도 무인 계산기보다는 캐셔분들이 계산하는 곳에 줄을 서게 되는 어르신들이 대다수다.

스크린 기반 인터페이스에 익숙지 않은 사용자들에게는 새로운 장소에서 매번 다른 화면에 적응하는 것에 정신적인 피로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잘 안되면 껐다가 켜라.”
<오류 수정에 대한 정신 모형>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다. 기계가 잘 작동이 안 되면 껐다가 켜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586 컴퓨터 전원을 그냥 꺼보기도 하고, 코드를 아예 뽑았다가 해보기도 했다. 옛날에는 거짓말같이 이런 것들이 잘 통했다. 오류를 직관적으로 고쳐나갈 수 있었다. 직접 해결할 수 없으면 그냥 A/S에 맡기는 방식으로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바일 화면에서 주문 정보를 입력하고 있을 때, 핸드폰 전원을 꺼버리면 지금까지 입력했던 정보는 모두 사라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주변에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도 쉽지 않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고령 사용자들은 오류와 실수에 대한 부담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고령 사용자들을 고려하여, 입력한 정보의 수정이 언제든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또한, 수정이 안 되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안내 메시지를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에서는 메뉴 주문을 누르고 결제를 할 때는 지역이나 수령장소의 수정이 안된다. 해당 지역에서만 배달 가능한 주소로 세팅해 놓은 것이지만 어르신들은 집에서 배달을 시켰다가, 모임 장소에서 배달을 시킬 때 ‘음식 수령 주소를 어떻게 변경해야 하나?’ 난감해하는 경우가 있다. 잘 안되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설정하거나 수정 버튼을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답답함을 느낀다. 수정 버튼이나 설정 메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를 간결하고 직관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옛날에 기기가 작동이 잘 안 되면 코드를 그냥 뽑았다 다시 끼우거나, 손으로 팍팍 쳐보거나, 입으로 불어서 먼지를 털어보거나 나름대로의 물리적인 민간요법(?)을 사용했다.


“짜장면 한 그릇 주문이요.”
<고령 사용자들이 보이스 어시스턴트를 사랑하는 이유>


과거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말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혹은 어머니에게 이것저것을 시켰다.‘구두 명령’을 통한 ‘실행’이 당연한 구조였다. 굳이 먼 미래로 가지 않더라도 10년 전쯤에 짜장면을 하나 배달하려면 전화를 걸어서 주문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배달시킬 때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터치 몇 번에 주문을 한다. 하지만 고령 사용자는 이런 모바일 주문에도 익숙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고령 사용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보이스 어시스턴트 기능이다. 여러 단계를 거쳐 버튼 누르는 것을 모두 건너뛰고 목소리로 명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 보내기나 지인에게 전화 걸기 등 간단한 기능뿐 아니라 요리할 때 알람 기능으로도 자주 사용하게 된다. 보이스 어시스턴트로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또 정확도가 높아질수록 좋은 것은 당연하다.



현재 시점에서 보이스 어시스턴트는 단순 기능만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생각지 못할 수 있으나 개별 앱에서도 음성을 통해 실행할 수 있다면 어르신들은 훨씬 편리할 것이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고령 사용자들이 버튼을 꾹꾹 누르는 이유>


70세 이상 고령 어르신들은 화면을 터치했을 때 충분한 반응이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화면을 꾹꾹 누르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기존에 이 세대가 사용했던 모든 제품들이 물리적인 버튼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이다. 이런 버튼들은 눌렀을 때 느껴지는 감촉과 함께 명확한 터치 피드백 touch feedback이 존재하여 약간의 소리와 진동 등이 동반된다. 터치 경험의 총체적인 느낌이 전달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 내의 대부분의 버튼은 시각적인 피드백만 존재한다. 고령 사용자가 애플리케이션 버튼에서 낯섦을 느끼는 이유다. 또한 과거에는 버튼을 한 번만 클릭하면 됐기 때문에 더블클릭, 버튼 길게 누르기, 드래그와 같은 제스처는 이들에게 생소하다. 다만 책을 넘기는 스와이프 swipe 동작은 상대적으로 고령 사용자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는데, 이는 책을 넘기는 행동의 멘털 모델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나 개발자는 고령 사용자들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UI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입력 제스처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정하여 한 번의  클릭으로 실행 가능하도록 하되, 클릭 동작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드래그 drag 등은 가급적 피한다. 손가락을 정교하게 사용해야 하는 핀치 pinch 동작이 때로는 고령사용자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 - 버튼 사용도 고려해야 한다. 항목이 올바르게 선택되었다는 피드백은 즉시, 명확하게, 최대한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하도록 한다.


버튼을 누르는 동작은 오랜 기간 유지해 온 입력 방식이다. 스크린 기반에서 새롭게 탄생한 동작인 드래그, 더블 클릭, 핀치 등은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