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6일
♪ Die Meister (독일어: 정복자들)
♪ Die Besten (독일어: 최고들)
♪ Les grandes équipes (프랑스어: 위대한 팀들)
♪ The champions! (영어: 챔피언들!)
챔피언스리그 주제곡이 울리고, 안대와 귀마개로 차단했던 의식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아직은 이른, 어둡고 조용하고 깊은 아침.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대다.
"알람을 왜 이 곡으로 했어?"
나는 초등학교 때 남동생과 축구를 하고 놀았다. 2009년부터 스페인 축구리그인 라리가와 유럽축구연맹의 챔피언스리그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오케스트라와 합창으로 구성된 챔스 테마곡을 들을 때마다 우주에서 제일 중요한 광경을 마주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 곡은 헨델의 대관식 찬가 '신부 사독'을 편곡한 곡으로 자주 듣는데도 매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친구 규연이에게 저 질문을 들었을 땐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하루를 결승전처럼 시작하고 싶어서!"라고 답했었다. 규연이는 최근에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Law & Order>의 테마송으로 알람 소리를 바꿨다고 했다. 오늘도 본인 인생의 새 에피소드에 출연하는 기분으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우린 서로에게 낯간지러운 얘기를 참 잘하는 친구들이라고 했다.
이번 달은 매주 목요일 새벽 5시 30분에 여성학 핵심 이론 강의를 듣기로 했다. 지적으로 늘 좋은 자극을 주는 친구 재경이가 놓은 그물에 걸려 "5명 이상 단체 수강 시, 20% 할인!" 혜택을 받고 등록한 유료 수업이다. 시리얼과 바나나 하나와 토마토 두 알을 준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국 시간 기준으로 저녁 7시 30분이 되자 80여 명의 수강생이 온라인 화상 플랫폼에 모여 몇몇은 얼굴을 내놓고 대부분은 카메라를 끄고, 서양에서 가사노동의 가치에 관한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관한 강연을 들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강연자 선생님의 목소리를 라디오 삼아 후--딱 이른 아침을 먹고, 내가 제일 안 좋아하는 가사노동인 설거지를 했다. 오늘 하루 삶의 생산성을 높인 것 같아 약간 우쭐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재경이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바깥이 선선해서 오랜만에 아침 산책을 하며 통화하기로 했다. 수업이 어땠는지 얘기를 나눈 뒤 근황 토크가 이어졌다. 한국에 있는 재경이는 지난 주말에 지역 비혼 여성 모임에 가입했다고 했다. 동네에 자주 만날 수 있는 여자 친구가 딱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재경이의 회사 근처와 집 근처에 정말 딱 한 명씩 친구가 생길 것 같다고 기뻐했다. 나도 7월 말에 이사 가면, 차로 5분 거리에 내 또래의 같은 학과 친구가 산다는 것을 어제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새 친구들과 온・오프라인으로 교류하며 우리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고, 삶이 어디까지 바뀔 수 있는지 실험해 볼 수 있도록 새로운 환경에 기꺼이 뛰어들어 보자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캠퍼스 안쪽 인도로 들어설 때, 목에 파란 손수건을 두른 백인 남자 한 명이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기숙사 근처를 걸을 때에는 히스패닉계 학교 직원 두 명과 눈인사를 나눴다. 산책을 마치고 캠퍼스에서 벗어날 즈음 까만 운동복 바지와 브라탑을 입은 백인 학생 한 명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를 지나쳐 달려갔다. 폴로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백인 남자 세 명이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산책 40분 동안 만난 사람들 중 마스크를 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목요일은 여느 요일보다 바쁘다. 새 학교의 국제 학생 오리엔테이션 미팅도 있었다. 지난 주에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에서 갑자기 발표했던 유학생 비자 제한 규정 이슈가 언급됐다. 핵심은 미국에서 온라인 수업만 수강하는 국제 학생들은 올 가을학기에 미국에 체류할 수 없고, 체류할 경우 학생 비자를 취소하겠다는 것이었다. 5만 한국인 유학생뿐 아니라 모든 국제학생들과 학교들에 비상 상황이었다. 지역 경제 재개에 합류하도록 대학들을 압박하는 동시에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있는 미국인들의 결집과 투표를 노린 트럼프 정부의 아이디어로 보였다. 주요 학교 연합의 항의로 일주일도 안 되어 당국에서 새 규정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에는 '소동'으로 끝났지만, 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국 내 정치와 표심을 위해 언제 어떻게 뒤집어 버릴 줄 모르는 이민 규정 앞에서 나를 포함한 유학생들은 긴장의 끈을 붙들고 최신 정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제학생 오피스에서 내 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접속했을 때, 접속자 목록에서 아칸을 발견했다. 아칸은 이전 학교의 첫 국제학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친구로 유일무이한 같은 학과 동기 국제학생 친구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라다 인도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석사 유학을 온 친구인데,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오뚜기 카레에 김치를 올려 줬더니, 일본에서 엄마가 챙겨줬던 그 맛이라며 나를 따라 아시안 마켓에 가서 김치를 사다 먹었던 재미난 친구다. 같이 도서관에서 밤새 공부하고 투닥거리며 토론하던 소중한 동료이기도 하다.
아칸은 곧 인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인도에 계신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기 때문인데, 여행 제한 때문에 비행편이 취소 되어 아직 LA에 머물고 있었다. 오직 인도항공의 비행편만 인도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인도항공은 온라인 예약도 중단 돼 전화 예약만 받으면서 비행기 표 가격은 두 세배 가량 올랐다고 한다. 또 인도에 도착하면 자비로 호텔에서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800이 넘어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칸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만료되었다. 할 일이 없고 갇혀 있으니 지루함을 넘어 우울감이 온다고 했다. 사실 나도 아빠의 정년퇴임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행 항공권을 지난 1월에 끊어놨었는데, 비행편이 취소되어서 한국에 못 들어갔다고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아칸은 이 와중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로 꽉 찬 캘리포니아 해변과 공원을 보는 것과, 이 시국에 이득만 챙기려는 인도 항공사나 기업들을 보는 것이 슬프다고 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잘 먹고, 의식적으로 우리 삶을 바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배우고 싶은 걸 찾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나라도 더 하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미국인 친구 제임스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왔다. 석사 논문 연구 계획서가 승인되지 않았다고, 프로포절을 읽어봐 줄 수 있겠냐고 한다. 이 친구는 4월에 코로나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고 14일 이상 집에서 격리하며 페이스북에 본인의 투병 일기를 올렸었다.
단 하루의 기록 안에도 불확실성의 흔적이 가득하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내 마음 같지 않다. 미국에서 이민자•외국인과 코로나바이러스는 정치적 용어가 되었다. 유학생들의 삶도 미국 내 정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비대면과 단절의 시대가 올 거라던 예상과 달리 누군가는 오히려 더 자주 밖에 나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어울리고, 누군가는 온라인으로 시간과 장소를 뛰어 넘어 관계의 깊이와 교류의 넓이를 확장한다. 누군가는 우울하고, 무기력하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보람차게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의 미국, 텍사스 한 가운데에서 내 삶을 빌어 기록한 2020년 7월 16일 목요일의 모습이다.
(나도 오늘 일찍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야지. ♪ The champions! ♪)
<끝>
※ 이 글은 온라인 매거진 2W 제2호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