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일 May 30. 2022

#1. 레오타드Leotard

취미 발레 단상 # 01. 선線

 지금 이 시기는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중간 점검이 필요한 때다. 어쩌면 지금의 목표 혹은 지금의 방향키가, 비로소 내 삶의 스케치를 완성하는 작업의 마무리이며, 이후의 삶을 통한 채색을 위한 숨 고르기의 한 때일 수 있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선택은 없다는 것을-.     

전체 그림은 늘 순간의 작은 선택들, 사사로운 충실들, 소박한 집중들의 합으로 이루어짐을, 이제는 지나가버린 짧지 않은 삶에서 눈물 콧물 쏟으며 비싸게 배웠다.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하든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조금 더 나은 방법 혹은 나은 생각, 조금이라도 좀 더 나아가는 방향은 없을까, 마치 바둑의 수를 고민하듯, 간발의 차로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그런 길은 어떻게 만나게 될까, 어떻게 더듬어가면 될까?        


  그 같은 고민의 깊이와 과정은 80% 이상 스스로의 내적 상태에 의해서도 크게 좌지우지된다는 걸 인지한 이후부터, 머리가 큰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생각이 굳은 건 다른 문제임을 고민해야 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은 싫으니까. 삶의 막다른 곳에 몰린 것 같은 느낌으로 밤잠을 설친다면, 봉우리에 오른 것 같은 느낌도 받기 전 또다시 어딘가의 계곡을 향한 내리막길에 이른 것 같아, 이 길이 아닌가벼, 싶어 옴짝달싹 못하는 것 같다면, 그렇게 시간만 까먹는 것 같다면-. 맨날 깔짝깔짝 거리던 삶의 호미질을 비장하게 멈추고, 삽으로 바꿔 들어, 바닥까지 긁어내는 심정으로 삶을 한 번 솎아내야 한다. 이대로 나까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증명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보통 이럴 때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떠오른다. 낯선 시스템, 낯선 문화, 낯선 언어와 사회 속에서 이방인으로 소외감과 야릇한 해방감, 적응을 위한 돌아보기, 하다 못해 짐을 싸고 푸는 과정 등에서 알게 모르게 젖어든 어떤 타성들이 깨어지는 쾌감은 여행 만한 것이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고 했던가.  어차피 골라 잡은 삽, 제대로 된 삽질을 해야겠다.

 그 나물에 자꾸 그 밥을 차리려는 삶의 관성, 다른 걸 불편하게 여기는 내적 터부들을 파내는 것이다.








 성인 여성 평균 키가 159-161cm인 사회에서 172cm는, 말하자면, 다 같이 모여 있는 운동장에 혼자서만 머리가 불쑥 튀어나오는 장신이지만 그렇다고 재산(?)이 될 만큼의 장신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일 이 장신은 내게 이따금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었다. 키가 작은 콤플렉스 못지않게, 키가 큰 콤플렉스도 지독하다. '키 커서 좋겠다'가 당연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내밀함은 콤플렉스를 키웠다. 또래 집단에서 튀던 키는, 어느덧 어른들 사이에서는 미인 대회니, 모델이니, 오로지 '외모 품평'의 단골 소재가 됐다. 이후로도 외모를 끄나풀로 다가오는 낯선 이들의 의도치 않은 무례는 불쾌함을 넘어 이따금 분노의 앙금이 됐고, 당시의 내성적 성격과 예민한 낯가림과 맞물려 스트레스 가중 요소로 남으며 성격을 위축시켰다. 나아가, 철없는 시절들의 성장 과정과도 같은 시샘과 따돌림 문화는 '모난 돌이 정 맞는' 이치를 상기시켰고,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뭉치면서, 나는 나 자신의 타고남에 감사하고 장점을 계발하기보다는, 매사 튀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생존 전략을 붙잡았다. 남의 시선이 늘 두려웠다. 평균에 속하지 않는 체형의 불편함 - 어딜 가나 낮은 눈높이, 허리를 굽혀야 편한 공공 기물 등 - 은 열외였다 (물론 어느덧 굽은 등, 움츠러든 어깨를 획득하기까지는 집단적 평균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통계 수치 풍토도 한몫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허물들과 유착되면서 '나'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것들에 깊은 열등감을 입혔다. 물론 어느 정도 나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가면서는 가능한 범위에서 다양한 일상적 시도들을 통해 약간의 보정치는 찾았다만, 역시나 감질나는 호미질로는 그 밭에 그 나물일 터.


 발레는 오래된 그 개인적 터부를 허물기 위한 치료책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원초적인 '몸에 대한 터부'를 뿌리째 파 들어가려 팔을 걷어붙인 셈이다. 내게 발레는 '밖으로 뻗어내는' 작업이었다. 최대한 길게, 멀리 뻗기 위해, 몸 안의 구석구석을 발견하고 다듬고 다지는 작업이었다. 안으로 굽은 몸과 마음을 밖으로 열어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의 실현이었다.


 그 첫 시작은 레오타드 입고 움직이기다.     

 레오타드를 입는다는 것도 어마어마한데, 그걸 입고 사람들 앞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꼬락서니(??)를 전신 거울을 통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오오, 충격과 공포로다. 분명 발레 영상들,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발레에서의 노출 - 솔직히 노출이란 단어조차 떠올려본 적 없는 - 의상들은 아주 익숙했음에도, 역시 남의 노출과 나의 노출은 하늘과 땅 차이렸다. 게다가 표준 체형이긴 하나, 운동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저 길기만 한 팔다리로 버둥거리는 내 몸뚱이를 정색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려니, 어흐, 그 옛날 담력 훈련 때도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세운 적이 없었는듸...!


색상 매치가 에러였던 첫 레오타드와 스커트 그림 / 카디 저널


 그나마 머리를 굴려 반팔 소매 레오타드를 골랐지만, 인생에서 이렇게 격렬하게 등이 파진 옷을 입으며 소매 길이 따진 건, 참 귀여운 발상이었다. 이왕 굳은 결기로 시작한 발레, 칙칙한 검은색은 피하자 싶어 골라 들은 애매한 회색의, 결과적으론 정말 칙칙한 색의 레오타드에, 보랏빛 도는 발레 스커트를 매치하니, 어설픈 초짜는 복장에서도 어설픔이 줄줄 흘렀다. 그 어설픈 상태로 비기너 Beginner 반에 합류해 매트에서 구르고, 바에서 흐느적거리고, 센터에서 어버버 거리며 70분이 갔다. 어떤 요령도, 원리에 대한 숙지도 없이 따라 하기 바빴던 점프는 뼈까지 쑤시는 발목-정강이뼈 통증을 낳았고 (이건 잘못된 통증이다), 이틀 후에는 허벅지 뒤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 안 아픈 곳이 없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오만가지 상념이 지나갔다. 레오타드 색이라든가 소매 길이를 따질 때가 아니구나, 그동안 내가 달고 다닌 건 팔다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이 나이에 역시 무린가, 저주받을 유연성 어쩌고 저쩌고를 밤마다 앓으며 숙고 끝에 센터 수업 없는 반으로 바꿨고, 레오타드 착장은 이제 고민거리의 찜 목록에도 들지 못했다. 그 한 시간 내 몸 감당하기도 어려운 판국에 비주얼 따위.    

 오히려, 아직 처음이니까, 익숙하지 않으니까, 라면서 괜히 혼자 양보(?)했던 레오타드의 선택 기준이 어느 순간 가소롭기까지 했다. 파워 스트레칭을 시작하니, 반소매 레오타드의 어깨 눌림에 쇄골 언저리가 붉게 쓸리고, 이제껏 유산소 때도 땀을 거의 흘려본 적 없는 체질에겐 회색빛 레오타드의 땀자국이 거슬렸다. 준비되지 않았던 팔뚝살(!)에게는 미안했지만, 결국 1개월도 마치기 전 검정 캐미솔 레오타드 로우컷를 '필요에 의해' 구매하며, 본의 아니게 두 벌의 레오타드를 장만하게 됐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라인, 팔뚝에서 옆구리로 이어지는 선線을 어느 정도 커버해줬던 반소매 레오타드에 비하면, 그 모든 라인을 자비 없이 드러내는 캐미솔 레오타드는 참으로 눈물 나게 쌀쌀맞았지만, 커버 용 워머는 일찌감치 머리에서 지웠다. 얼마가 걸릴지, 과연 그 얼마 이후 달라지긴 할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이 늘어진 선들이 조금씩이라도 변해가는 과정, 이전보다는 좀 더 팽팽해지는 과정을 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지금의 모습은 이렇지만, 여기서부터 변해가길 바란다. 스스로의 몸을 위해, 스스로의 변화를 향해 욕심을 내는 것이, 이 나이(?)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믿기가, 어째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지 말이다.    

 평균 수명은 물론 건강 수명도 70에 육박하는 요즘, 어쩌면 이제 겨우 주어진 삶의 반을 지났고, 그중에서도 철딱서니 없이 지냈던 성장기를 빼면 실제로 '호모 사피엔스의 시간'을 산 길이는 더 짧을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이제는 나이 들었고, 바꿀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그저 남은 생애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그러는 게 어른(?)의 길이라고 치부해버렸는지 말이다.     

 나이 일흔에, 치매 증상을 견디며 발레를 배우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드라마 방송된 게 벌써 몇 년 전인 마당에, 아직 새파란... 까진 아니고, 자세히 보면 아직 푸르뎅뎅함이 남은 나이에, 레오타드를 입고, 핑크빛 타이즈를 신고, 안 펴지는 무릎으로 낑낑대며 매트에서 굴러다니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유난히 용감한 일도, 감흥을 일으킬 일도 아니다.... 그런 걸 이렇게 유난스럽게 쓰고 있는가 싶어 지지만, 써놓고 보니 그렇다더라...?


 레오타드는 신축성 좋은 재질이지만, 염분이 포함된 땀에 젖은 채 방치하면 그 탄력성이 떨어지며 변형이 올 수 있다고 한다. 세탁기 사용은 가능하지만 건조기 사용은 금물이며,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취미 성인 발레의 경우 저렴한 1만원대부터 7-9만원대의 디자이너 레오타드가 주 고려 대상이고, 해외 수입의 경우 10-30만원대까지 브랜드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면스판 재질과 나일론 재질 등등 선택과 디자인은 개인의 취향과 필요에 따르며, 상의 사이즈를 따라가되, 몸통 길이에 해당되는 거스Girth 길이로 세부 사이즈를 고려한다.


 매번의 발레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를 하면서 레오타드, 타이즈 등을 중성 세제 풀어 손빨래한다. 저녁 수업이니 이 모든 걸 마치면 10시가 훌쩍 넘는다.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처럼 레오타드를 빨며 중성 세제를 끝도 없이 헹구어 내고 있을 때, 문득 내가 이 모든 과정을 진심으로 즐겁게 여긴다는 걸 알았다. 이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들, 아주 사소한 경험들도 신선하고 흥미롭다.

 

 그래서 또 사고 싶은 레오타드가 있냐면, 발린이 2개월 차에 접어들면, 그리고 현재의 체지방을 조금 줄여 체력과 몸을 더 만들면, 그때는 밝은 색상의 레오타드에 도전해보련다. 몸 그 자체에 대한 터부가 어느 정도 느슨해지면, 그다음은 심리적 터부가 남는다. 보기만 해도 어딘가 간질간질해지는 발레 스커트, 그리고 여리여리한 색상의 무수한 레오타드들, 웜업 팬츠를 비롯한 여타 댄스 웨어들 등, 덤벼볼 것들이 많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 성인 발레를 등록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