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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es Hur Apr 23. 2024

함께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고민뿐입니까. 커피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술도 사드릴게요

누군가 링크드인으로 연락을 했다. 프로필을 보니 한국인이고, 대학원생이고, 나와 같은 엘에이에 산다. '어? 내 대학교 후배네.'  예전 대화내용을 보니 내 직장 인턴 지원 관련해서 짧게 대화한 적이 있다. 이번에 연락한 이유는 달랐다. 작년에 본인이 창업했다며, 나와 커피챗을 하고 싶다 한다.  보통 이럴 때 드는 생각은...

난 창업한 적도 없는데... 왜 나와? 내가 도움이 될까?


어쨌든 내가 필요하다면 학교 후배님에게 커피 한잔과 1시간 정도는 충분히 내어줄 수 있다. 주말에 사람이 덜 붐빌 때를 골라서 만나기로 했다.


실제로 얼굴을 보니 누군지 기억이 났다.  커피 한잔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창업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뇌의 절반은 사업 모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다른 절반은 진취적으로 뭐든 해보는 후배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미래가 창창해 보이는 이런 후배와의 만남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이야기가 여기저기로 튀다가 결국 그가 정말 진짜 하고 것, 풀고 싶은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다. 'precision nutrition'이었다. 내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헬스케어 인공지능 분야에서 이것저것 들은 건 있어서 조금은 안다. 다행히 내가 예전부터 관심 있었던 시니어 리빙, 시니어 케어, 미국의 1차 진료와 만성질환 관리 등과 겹치는 지점이 많았다.  특히 미국에서 중요한 분야이고 요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창업해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어떤 방향이 본인의 엣지를 잘 살리면서 큰 임팩트를 노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차분히 대화해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얽혀있는 그의 생각을 실타래 풀듯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 보았다.  당연히 본인이 나보다 100배는 더 많이 생각하고 조사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막혔을 테고, 그 지점에서 이 시점까지 왔으리라.  그 막힌 부분에서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지, 비슷한 다른 산업에서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다양한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한참 대화하고 나서, 언젠가부터 그는 생각이 막혔던 지점을 뚫고 나갈 수 있었다.  뭔가 찝찝하고, 본인도 납득이 잘 안 되고, 고민되고, 사실 잘 모르겠는 부분을 뚫고 나갈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도움이 돼주어서 고마워하는 눈빛도 보았다.  다행이었다.  물론 이제부터는 본인이 가정을 새로 만들고, 조사하고, 테스트해서, 가정을 다시 업데이트하는 그런 프로세스가 필요할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거다. 단 한 발짝 더 앞에 서서.


한편으로, '난 스타트업 창업을 해본 적도 없고, 이 분야 전문가도 아닌데.... 괜한 소리 해서 잘 하고 있는데 마음만 흔들어놓은 건 아닐까? 내가 한 말 중에 혹시 틀린 부분이 있나?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막 던진 적 없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후배와의 대화다 보니 어김없이 (뒤늦은) 자기 검열 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어쩔 수 없다.  이미 내뱉었으니 주워 담을 수도 없지 않은가.

카페에서 일어나기 직전, 내가 모교를 얼마나 사랑하고 모교 학생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잠깐 이야기했다. (사실 별로 하는 게 없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후배는 약간 눈물이 글썽였는데, 내 마음도 왠지 모르게 찡해졌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후배의 눈물이 고였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학생일 때 선배들 조언받고 고마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의욕만 넘치고 앞이 뿌옇고 막힌 것만 같았을 때, 선배가 '초록매실' 사주면서 내 고민 들어주고, 시간 내서 함께 고민해 주고, 응원해 줬던 기억들.  와 벌써 조금 있으면 20년 전이 된다.  시간 진짜 빠르다.  선배들이 내 다음 스텝을 결정해 줄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힘이 났고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앞으로 꾸준히 더 잘 보이기 위해, 커피, 밥, 술은 언제든 사줄 수 있으니 편하게 연락해 달라고 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지인들과의 식사 모임에도 초대하기로 했다.  '앞날이 창창하고 기대되는 이 후배에게 잘 보이기'가 그 한시간 동안의 내 KPI였는데, 달성을 했는지 못했는지는 결국 연락을 또 하느냐에 달렸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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