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 논리

배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의 노력

by 벨에포크
배타적 : 1) 남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는. 2)타의 관여를 허락하지 않는 것. 3) 독점적


나는 배타적이지 않는 삶을 위해 노력한다. 모든 삶의 태도에서 배타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배타적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어떤 책을 읽을 때도 무조건 아니라는 태도를 지양하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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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나는 이와 반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고지식하고 융통성이란 하나 없는 나의 과거의 사고 회로를 잠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자아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나에게는 하나의 논리가 필요했었다. 삶을 살아가는 어떤 하나의 진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려 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라는 논리 하나로 삶을 바라봤었다. 바로 흑백논리이다.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이다. 그레이는 없다. 플러스면 플러스고 마이너스면 마이너스다. 중도는 없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고 싫어하면 싫어하는 것이다. 중간은 없다. 이렇게 갈라놓고 모든 것을 바라봤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흑이라면 흑이다, 내가 백이라면 백인 거다.라는 독재자적 마인드가 있었다.


고등어 논리


고등학교 때 급식에서 생선이 나왔다. 친구들과 밥을 맛있게 먹고 교실로 들어가는데 한 친구가 “오늘 삼치 맛이 별로였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아니 그건 삼치가 아니라 고등어잖아” 친구는 말했다. “무슨 말이야. 그거 삼치 아니야?” 나는 대답했다. “그건 고등어지!” 그렇게 친구와 나는 오늘 나온 생선이 삼치인지 고등어인지 논쟁을 벌였다. 답을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식단표를 보면 정답이 나와있다. 하지만 나와 친구는 식단표를 보러 가지 않았다. 우리에게 정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 자신이 믿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렇게 나는 고등어, 내 친구는 삼치 이렇게 결론 내리고 우리는 서로 타협하지도 않고 정답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자신의 믿음만을 확고히 한 채 그날의 논쟁을 마무리했다. 이 생선은 고등어다. 갈치가 아니다. 삼치가 아니다. 참치가 아니다. 이 생선은 절대 고등어다. 왜냐하면 고등어처럼 생겼고 고등어 맛이 나고 고등어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내가 고등어라 했으니 이것은 고등어다. 나의 무적 논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게 무슨 논리인가 싶지만 난 고등어 논리에서 살았다. 난 이것을 나의 고등어 사고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고등어 사고는 대학 때에도 지속되었다.


점점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를 깊이 나누게 되면서 나의 고등어 논리가 얼마나 건방졌었는지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태도, 그것이 오만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주장하고 있는 다른 친구의 모습을 보게 된 후였다. 생선은 잘 먹었으면 됐지, 그게 삼치건 고등어이건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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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feat. 서장훈)


내가 믿는 것이 옳은 것이니, 옳은 것이고, 옳은 것이다.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아마 많은 것을 놓쳤을 것이다. 이것은 기니까 기다. 이것은 아니니까 아니다. 세상에 이렇게 양분화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놓쳤고 생각이 갇혀있었다. 모든 것에 흑백의 프레임을 씌워버렸다. 뭐 그렇다고 “내 주장과 다르니 너랑 안 놀 거야!”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아니다. “너랑 노는 것과는 별개로 그 생선은 분명 고등어였을 거야”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달까?

더 많은 책을 읽고, 여러 사회적 관계를 접하면서 나만이 옳다는 배타적인 태도가 좋지 않은 태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나의 생각과 반대될지라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다 보니 타인의 생각을 좀 더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라는 흑백논리가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즉 이제는 흑 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백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그 중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결정 내리지 못하는 거지? 왜 판단하지 않는 거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주관이 없을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고 주관을 가지는 과정 자체에 머무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에야 아, 중간이라는 것이 있고, 중도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시소를 탈 때처럼 어느 한쪽으로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찍게 될 수 도 있지만 정말 양쪽의 무게를 맞춰서 평행을 유지할 수도 있고 잠시 저울질을 하듯 왔다 갔다 하는 중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결정을 명확히 못 내리는 단계가 있을 수도 있구나. 그제야 나는 진심으로 중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 모든 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가져야지! 이렇게 깨닫고 살아가는데 또 하나의 문제에 봉착했다.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하나의 주장을 가지는 태도가 좋을까? 남을 배척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으려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말인 걸까?


나는 또 양자택일의 문제에 봉착했다.


주장을 할 것인가? 중립적인 태도를 가질 것인가?


이 두 가지 문제에서 말이다. 예전에는 흑과 백 중에 하나를 택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양극과 중간지점 중 하나를 택하려고 하고 있다. 그냥 대상만 변했지 여전히 양자택일 문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했더니 선택의 순간들이 매번 찾아올 때마다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수용하려 하니 모든 것에 장단점을 다 보게 되고 이제 거기서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할 때마다 너무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흔히 말해 결정장애가 온 것이다.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주장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건가? 주장을 해야 할까? 중립적이어야 할까? 이 문제에서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아서 몇 년간 나는 계속 결정장애를 가지면서 살았다. 결정을 하는데 꽤나 오래 걸렸다. 결국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나의 삶의 선택의 통계치를 분석해가면서 결정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실 답은 간단하다.


주장하고 싶을 때 주장하면 되고 중립적이고 싶을 때 중립적이면 된다. 흑이고 싶을 때 흑이면 되고 그레이이고 싶을 때 그레이이면 되고, 백이고 싶을 때 백이면 된다. 이렇게 몇 년간 끙끙대며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몇 년간 해왔던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나에게 하는 선명성 대결이다. 누가 더 선명한지 대결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의 가치관이나 이념을 취하고자 했을 때 그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이념과 어떤 것이 더 선명한 이념이고 더 선명한 가치관인지 자꾸만 대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저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는데 이념과 신념에 묶인 것이다. 내가 진정한 나로 서있는 게 아니라 자꾸만 나를 '하나의 가치관이다.' '하나의 이념이다' 이렇게 지식과 개념의 체계로 나를 가두려고 하니까 자꾸만 내 안에서 혼란이 오는 것이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최진석 철학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이념, 가치관, 신념을 벗고 나면 오직 자기 자신만 남는다. 기존에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것들을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부교재 내지는 보충자료로만 행세하게 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을 혹시 나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식과 가치를 나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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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막힌 혈이 확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의원을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무언가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흰색의 가치관을 두고 완전히 표백제를 바른 흰색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내 안에 자꾸만 모순이 생기고 내가 나를 갈라놓게 되고 자꾸만 기준을 두고 나를 판단하려고 하게 된다. 내가 나로 그냥 우뚝 서야 한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다. 완벽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진다.


최진석 작가는 “못나고 일그러지고 추레하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 그러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체하고 있는 기준에 비춰보니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제 존재하는 세계에는 개념, 이념이라는 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이념을 가지고 부드러운 동사적 세계를 제어하려 한다” “이념은 항상 순교자를 원한다. 철저한 수행자만 원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에 독서토론 모임에서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개 X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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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들을 때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점점 엄청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나로 설 수 있게 된다. 내가 무슨 대단하고 완벽한 체를 하려고 하니 자꾸만 내가 나를 죄인으로 보게 되고 나를 부정하려 한다. 내가 나조차도 나를 알 수 없도록 꾸미려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자꾸 어떤 순간과 상황에서 혼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선명성의 잣대로 판단하고자 하며 살아왔을 때 나는 분명 모든 사람들을 나처럼 선명성의 잣대로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이냐, 진정한 선이냐, 위선이냐, 악이냐, 하얀 악이냐, 추악한 악이냐, 이렇게 여러 가지 잣대로 사람을 나누고 판단하면서 선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내 안에서 나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을 그룹 지어 나눠 놓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겠지만.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나를, 또는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선명성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겠다 라고 단언하지 못한다. 물론 의식적으로 노력하겠지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잣대로 사람을 보게 되면 모든 게 다 위선적으로 보인다는 것, 그거 하나는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오차 없이 희석되지 않은 그런 순수한 물질인 사람은 없으니까. 그것은 신이거나 성인이거나.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나는 또 하나의 물음이 생겼다.

판단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나를, 또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나는 판단하는 회로를 수정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사람을 판단할 때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yes or no’의 회로가 아니라 ‘이 사람은 이런 성향이 있구나’ ‘나는 이런 방향성으로 가야지’ 이렇게 좀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계속 의식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색깔로 구성되어있다고 인지하는 것은 언어가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라고 명명해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처럼 노란색과 주황색의 사이에 있는 어떤 점의 색깔을 명명할 이름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없는 것이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세워놨거나 내가 세운 그 프레임에 모든 것을 맞추어 생각하면 나는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프레임을 들여놨을 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 프레임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편협한 사고로 갇히게 되고 관용적 태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배타적이게 된다.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진실은 버려진다” - 조지 레이코프


진실이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프레임을 재구성해야 한다. 내가 가진 사고의 프레임을 재구성하지 않는 한 진실을 알아가는 길조차 모르게 된다. 선명성, 이념, 신념, 프레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그때 아마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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