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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Feb 24. 2022

직장에서 '마이웨이' 컨셉을 가진다는 것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져버리는 

 공무원이 되고 나서 나는 좀 더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전 직장에서 나를 지키기가 어려웠다면, 다음 직장에서는 오직 '나'만을 위해 살겠다고. 그저 마이웨이로 살겠다고 말이다. 내가 나에게 집중하는 인생을 살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생각도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고 나의 삶을 살자. 직장에서는 나에게 주어진 일만 하고 다른 관계를 형성하지는 말자. 그래서 나는 처음 입사하고 나서 내 일만 잘하고자 했다. 우리 팀 사람들하고 업무적으로 소통하고,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물어봐서 익히고, 사무실에서 소통해야 하는 정도만 이야기를 하고 다른 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내 또래의 직원들이 많이 있었지만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고, 누군가 다가와도 어느 정도 벽을 세웠다. 야근을 해서 저녁식사를 해야 할 때도 같이 야근하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지 않고 혼자서 김밥을 먹었다. 의도적으로 사람을 피하고는 했다. 왜냐하면 초장부터 컨셉을 잘 잡아야 했기 때문에 '마이웨이'컨셉을 잡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좀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해서는 안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을 하는 직장'과 '나의 온전한 삶'을 분리해서 살아가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삶에서 맺어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를 '직장'에서는 가지지 않으리라. 

'마이웨이' 이게 나의 직장생활 모토였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직장에서 모든 사람과 어느 정도 벽을 세우다 보니 타지에서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오랜 고등학교 친구와 공무원 스터디 모임을 했던 친구들 빼고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사귀고 싶은 친구는 직장에는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직장에서 친구를 사귀면 안 되었다. '마이웨이'는 친구가 없어야 했다. 나는 서울로 모임을 나가 사람들을 만났고, 영어 회화 학원에서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초반 6개월 정도는 꽤 잘되었다. 직장에서의 마이웨이와 직장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 이 두 가지의 밸런스가 잘 맞았다. 직장에서 우리 팀 사람들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다 보니, 교육을 들으러 갈 때나 다른 부수적인 업무에서는 조금 불편함이 있기는 했지만 '마이웨이'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훈련이라 여겼다. 


그러나 직장에서 첫 발령 난 팀이다 보니 나는 우리 팀장님을 좋아했고,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와 나이 차이가 많았기 때문에 사적으로 만나거나 연락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다행이었다. '마이웨이'컨셉은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혹여나 다른 팀원 누군가 말을 건네 올 때면 적당히 대답하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다 보니 나도 진짜 '마이웨이'가 돼가는 것 같았다. '자발적 아싸'라는 것이 이렇게 편한 것이었는지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동안의 감정 소모가 덜 했을 텐데. 얕은 관계에서는 소모되는 감정도 얕았다. 


'마이웨이'가 익숙해지는 만큼 직장생활도 점차 적응이 되자, 나는 긴장의 끈을 놓고 그만 방심한 채 웃음을 보였다. 나는 웃었다. 잘 웃었고, 또 자주 웃었다. '웃음'은 사람 간의 경계를 허물기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방심한 내 허파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게 내 '마이웨이' 벽은 구멍 뚫린 허파처럼 바람이 숭숭 들어가고 말았다. 


1년이 지나고 팀장님과 팀원들이 바뀌었다. 그 전에도 팀원들은 매번 자주 바뀌었지만, 이번에는 팀의 반 이상의 사람들이 바뀌어버렸다. 새로 바뀐 팀장님보다는 팀원이 문제였다. A는 나보다 3살 정도 많은 언니였는데 얼굴은 조막만 하게 작고 약간 새침데기처럼 보이는 예쁜 외모를 가진 채로 칸막이를 두고 내 앞자리에 자리했다. 처음으로 내 팀에 내 또래가 들어왔다. 또래가 우리 팀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내게 위기 요소였다. '마이웨이'를 하려면 말을 줄여야 하는데 또래가 있게 되면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어 자주 대화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마주치는 내 옆자리도 인사이동으로 직원이 바뀌었다. B는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게 믿어지지 않는 아가씨처럼 보이는 엄청난 동안인 언니였다. 나는 B와 다른 부서에 있을 때 업무차 통화를 했었는데 목소리가 낮고 사무적이어서 시니컬한 딱딱한 분위기를 풍길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니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사무실에 있던 나와 같은 이름의 C 언니는 B랑 꽤 친해 보였고 우리 자리로 자주 놀러 오게 되었다. B언니와 C언니는 자주 과자를 먹곤 했고, 한국인의 정서상 과자는 나눠먹어야 했기에 나와 A언니도 자주 그 과자를 얻어먹게 되면서, 자연스레 4명이서 간식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고 직장인의 당연한 루틴처럼 커피를 사러 카페를 갔고, 덕분에 서로의 어색함이 풀어지면서 농담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4명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농담과 드립을 하고, 같이 눈을 마주치며 웃으면, 또는 옆에 있는 사람을 때리며 웃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남들이 보기에 친해져 보이는 것 이상으로 정말로 친해져 버리게 된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약 1년간 열심히 쌓아 올린 나만의 '마이웨이' 컨셉은 자연스레 후루룩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는 사무실에서만 친해진 게 아니었다. 퇴근을 하면 언니들이랑 저녁을 먹거나 술자리를 하기도 하고, 나와 이름이 같은 C 언니의 주도하에 주말에 방탈출 게임을 하러 가기도 했다. 퇴근 후에 만날 수는 있지만 주말에 따로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친해졌다는 방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차를 맞춰서 가평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오기도 하고, 여행경비를 같이 모아서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렵게 쌓은 나의 모든 벽을 허물고 다른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미 '마이웨이'컨셉이 끝나버렸으니 허리를 꼿꼿이 펴고 예전처럼 벽을 세우며 거리감을 둘 필요가 없었다. 나는 원래의 팀을 벗어나 코로나를 전담으로 관리하는 감염병관리팀으로 발령이 나면서 끝없는 야근과 주말근무를 하게 되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던 언니들이었지만 B언니도 곧이어 감염팀으로 발령이 났다. 감염팀은 그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대부분 아무것도 모르는, 또는 인사이동에 아무런 의견을 주장할 수 없는 신규공무원이나 입사한 지 3년 아래인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들 또래 나이였고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염팀은 코로나라는 적이랑 싸우는 준 전시상황이었기에 '전우애'라 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끈끈한 연대가 생겨났다. 가장 힘든 팀이었지만 모든 팀원들이 서로 일을 도와가며 다른 팀보다 가장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직장에서 '마이웨이'는 무슨 직장동료들과 여행을 가기도 하고, 팀원들에게 '전우애'를 느끼는 관계를 형성하고 말았다. 

결국 나의 '마이웨이'컨셉은 철저히 망해버렸다. 


직장에서의 마이웨이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내가 되고 싶은 컨셉이었지만 그것도 부단히 노력을 해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가와서 건네는 친절한 말이나 행동에도 전혀 요동치지 않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업무를 조금이라도 도와줘서는 안 되며, 내 업무에 대한 도움도 철저히 거절해야 한다. 그렇게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야유회나 회식은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두둑한 배짱도 있어야 한다. 쉽게 다른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를 해서도 안되고, 누군가 말을 걸어올 것 같을 때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에 가서 커피를 타던지 화장실로 대피할 수 있는 순발력도 갖춰야한다. 사적인 것을 물어올 때면 "이건 제 사생활이라서요."라며 방패를 세워 튕겨버리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누군가 웃기는 말을 할 때도 절대 크게 웃어서는 안 되고, 웃음을 좀 참았다가 자기 전에 생각날 때 '피식'하고 웃어야 한다. 또한 누가 간식을 나눠주더라도 알레르기가 있다며, 다이어트를 한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절대 그 음식이나 과자를 나눠먹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마이웨이 컨셉으로 직장을 다니고자 한다면 나는 "넌 꼭 성공해야 돼!"라고 응원해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다시 '마이웨이'로 돌아갈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이 좋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마이웨이' 컨셉으로 직장생활을 하고자 했었던 것은 누군가 나를 '쉽게' 여기고 대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전 직장에서도 동기들이나 윗년차들과 친하게 지냈었고, 친해진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직장동료들과 친해져 버리게 되면서 '모든 사람들과 친해지려 했던 내 태도'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쉽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여겨지게 했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던 윗년차 간호사 선생님들과 시간이 지나다보니 오히려 친해지게 되면서 일을 배울 때 혼나더라도 '이 사람도 사실은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격 자체가 못돼 먹은 사람을 '이해하고 친해지려다'보니 그 과정에서 마음이 많이 다쳐버렸었다. 그래서 '친해지려는' 태도를 버리려 했었다. 그렇게 새로운 직장에서는 '마이웨이'를 해야지 라는 굳은 다짐을 하고 입사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과 멀어지게 되는 인연을 막을 수 없듯이, 사람과 친해지게 되는 것도 내가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언니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점심시간을 항상 기다렸다.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굉장히 털털하고 모든 에피소드를 웃기게 이야기하는 A 언니가 직장상사 성대모사를 할 때면 우리는 모두 웃었다. B 언니는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말이나 행동은 가장 어린아이 같았고, 특유의 반달눈으로 웃을 때면 나도 같이 웃게 되었다. C 언니는 내 마이웨이 시절에도 나에게 잘 다가왔었는데, 나중에 말해준 것이지만 그때의 내가 정말 벽이 느껴졌다고 했다. (난 정말 컨셉을 잘 유지했었구나) 언니는 항상 과자를 사 와서 우리들을 모이게 하고, 소품샵 같은 데서 우리들 각각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사서 주기도 했다. 우리 중에 가장 마음이 여리고 착했다. 우리 4명은 성격이 제각각 달랐지만 여행을 가면 그 덕분인지 서로 잘 맞았다. 놀 때면 게임으로 내기를 자주 했고, 게임을 못하는 내가 자주 걸렸다. 물론 게임을 잘한다고 매번 자신하는 B언니도 자주 걸렸다. 각각 부서가 달라져서 완전히 흩어지더라도 주기적으로 우리 집에서 모여 직장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웃는 사이가 되었다.


'직장'이라는 틀 안에서 표면적인 관계만 유지하려 했었던 나는 오히려 내 안에 깊은 관계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받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기에 아마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회피'라는 방어기제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이웨이' 컨셉을 계속 유지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도 어딘가에서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나처럼 여기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을 가지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고는, 그걸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응원한다. 물론 진짜 마이웨이의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흔들림 없이 마이웨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대단한 사람들, 부럽다.) 


 직장에서 사람들과 적당한 관계만을 형성하는 것이 나를 지킬 수 있는 단단한 그물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나의 방어적인 태도가 어쩌면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리기 위한 아주 가느다란 거미줄이 아녔을까. 누군가 마음먹고 손으로 휘저어버리면 사라져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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