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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Feb 28. 2022

아빠와 딸이 연애상담을 한다고?

나는 못해 



전날 밤, 저녁으로 샐러드를 먹은 탓에 자기 전 11시에 배가 너무 고파서 컵라면 하나를 먹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라면으로 인해 나트륨과 수분은 더욱 친밀히 결합되어 내 눈두덩이가 한층 더 부어있었다. 다이어터에게 양심이란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양심에 따라 최대한 공복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로 했다. 느지막이 일어난 토요일, 아침은 건너뛰고 남자 친구와 이른 점심을 먹으러 밖을 나섰다. 


동네 맛집인 돈가스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맛집이다. 매번 직장인의 짧디 짧은 점심시간에 웨이팅을 하지 않고 먹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곳이었다. 다행히 리뉴얼을 통해 좌석이 많아져서 막 오픈 시간에 도착했어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남자 친구는 새우 로스카츠를, 나는 오로시 히레카츠를 주문했다. 우리처럼 오픈 시간을 맞춰 맛집을 찾은 사람들의 주문이 한꺼번에 들어가다 보니 음식은 30분가량 정도 시간이 걸렸다. 리뉴얼된 식당은 네모난 작은 2인석 테이블이 서로 1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질서 정연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이 공간은 무슨 규칙이라도 되는 듯이 안쪽 소파 자리에는 여자들이 앉고 바깥쪽 의자에는 남자들이 앉았다. 그리고 안쪽에 앉은 여자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윤기 있는 머리를 잘 늘어뜨리고 마스크 안에 곱게 화장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반면 남자들은 편한 복장에 캡 모자나 비니를 쓰고 앉아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시간에 온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남자 친구와 나는 1미터 남짓한 거리에 같은 배열로 앉아있는 사람들의 착장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토요일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준비한 각자의 시간들이 성별에 따라 어느 정도 나뉘는 것 같았고, 자연스레 여기 오기까지의 행동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렇게 남자 친구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 음식이 나왔다


by 일본식 돈가스집 <만 돈>

직원은 이전에 방문했는지 여부를 물었다. 나는 처음 방문한 남자 친구를 위해 "아니요. 처음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직원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찍어먹을 수 있는 소금, 고추냉이, 겨자가 있고요. 간 무를 간장에 섞어서 찍어 드시면 됩니다. 옆에 같이 담긴 얼음은 소스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요. 이 소스는 새우를 찍어 드시면 되고, 고기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말씀해주시면 더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돈가스를 찍어먹을 수 있는 소스를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해주었다. 식당이 바뀌어도 여전히 직원은 친절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녀가 덜 부담스럽게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아마 식당이 커지면서 거리의 여유가 좀 생겼으리라. 남자 친구가 좋아하는 다른 돈가스집과 비교해가며 직원이 설명해 준 소스를 하나씩 찍어먹을 때였다.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둔 옆자리의 이야기가 들렸다. 왼쪽 옆자리는 역시나 커플의 불문율을 따른 것인지 바깥쪽 자리에 남성이, 안쪽 자리에 여성이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느라 옆자리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돈가스의 촉촉함에 빠져들다 보니  말을 할 수 없었다. 서로 가진 입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는 양옆으로 두 개. 오른쪽 테이블은 말이 없었기에 왼쪽 테이블 이야기가 들려왔다. 


옆자리에는 연인이 아닌 아빠와 딸이 앉아있었다. 아빠는 50대 정도로 보였고, 딸은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딸과의 데이트에 신나 보이는 아빠는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높아진 듯 보였다. 그래서 딸의 이야기보다 아빠의 이야기가 더 잘 들렸다. 유리 칸막이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지만, 딸의 연애상담이나 딸 친구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 이야기가 들리자 한참 먹고 있던 돈가스를 잠시 내려놓고 남자 친구와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빛을 반사하는 눈동자가 서로 만났고, 같이 지낸 시간만큼 눈빛의 굴절각을 통해 우리는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눈빛은 '놀라움'이었다.


어떻게 딸과 아빠가 연애상담을 할 수 있지? 


남자 친구와 나는 상상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와 연애상담을 한다. 그것도 토요일 점심 돈가스집에서 단둘이. 저녁도 아닌 점심에 말이다. 대체로 가족과 외식을 할 때면 토요일 저녁시간에 엄마와 아빠, 오빠와 함께하던 나였다. 20대 초반에는 친구들이랑 노는 게 가장 재밌을 때이기 때문에, 가족과 외식을 한다 해도 점심이 아닌 저녁을 항상 택하고는 했다. 그런데 점심시간. 그것도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 점심에. 엄마도 아닌 아빠와 단둘이 돈가스집에 온다는 것. 그것부터가 우리는 신기했다. "정말 사이가 좋은가보다..." 소곤소곤 소리를 죽이며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어서 아빠와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유튜브에서 예전에 방송되었던 <아빠 어디 가>에 한참 빠져있다. 본방송을 할 때도 열렬한 팬이었지만, 지금 봐도 여전히 재밌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아빠들의 대화방식'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성주네 가족이었다. 첫째 민국이가 있고 둘째 민율이가 있다. 둘 다 아빠와 관계가 좋은 아들이지만 야외취침이나 캠핑을 다녀보지 않은 이 가족은, 여행 초기에 매번 어려움을 겪는다. 랜덤으로 하룻밤 자는 집을 뽑는 뽑기에도 민국이가 뽑은 집이 다른 친구들의 집에 비해 열악한 경우가 많아 민국이가 자주 울게 된다. 또 야외취침을 잘 모르는 김성주 아빠가 얼음캠핑에서 원터치 텐트를 준비해와서, 민국이가 다른 아빠들의 크고 튼튼한 텐트를 부러워하게 되어 우는 경우도 있다. <아빠 어디 가>를 통해 주위 환경에 곤란함을 자주 겪은 가족은 민국이네 가족일 것이다. 9살인 민국이는 출연한 아이들의 맏형이었지만 처음부터 울보의 이미지가 되어버린다. 이런 경우는 아마 아빠인 김성주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어떤 환경에도 능숙하게 잘 적응하는 야생형 아빠가 아닌 김성주는, 처음에는 본인도 이런 상황을 굉장히 당황해하고 어쩔 줄 모른다. 그래도 그날 밤에 민국이의 속상한 마음을 알아봐 주며 아이와 대화를 한다. 아이를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속상해하는 아이의 마음을 먼저 발견하고 어루만져준다. 자신이 잘못된 텐트를 가져왔을 때도 김성주는 민국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대화를 한다. "아빠가 미안해~" "민국이가 그래서 속상했구나. 아빠는 몰랐네. 아빠가 미안해" 민율이랑 있을 때는 조금 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눈을 맞춰가며 대화를 한다. 비단 자신의 아들인 민국이와 민율이만 이렇게 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도 그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를 한다. 아이의 감정에 공감해주고 속상할 때는 상황을 설명해주며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예전에는 다른 아빠들보다 김성주가 멋진 아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동일이나 이종혁처럼 야생에서도 어떻게든 잘 견디고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 좀 미숙하고, 잘 모르고, 아빠들한테 놀림도 잘 받는 스타일이라 '멋지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런데 지금 <아빠 어디 가>를 다시 보다 보니 김성주는 정말 '멋진' 아빠였다. 가장 아이들이 좋아하고 잘 따르는 아빠가 김성주 아빠였다. 앞뒤의 상황을 보지 않고 무조건 아이부터 혼내고 보는 아빠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때 아이의 감정이 어땠는지 먼저 들으려 하는 사람이 김성주였다. 이런 아빠와 아이와의 관계가 형성되면, 아이들은 아빠에게 정서적으로 자신의 어려움과 힘든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게 되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가족이라고 여기게 된다. 정서적으로 아빠에게 기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자라나는 동안 지속적으로 형성된다면 내가 돈가스집에서 봤던 아빠와 딸의 관계처럼 되지 않을까. 성인이 되어서도 부끄럽고 말하기 곤란할 수 있는 '연애상담' 같은 것도 아빠에게 말할 수 있는 관계 말이다. 밥을 먹으면서 옆자리 아빠와 딸의 대화에서, 주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내가 느낀 것은 아빠가 딸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착하는 형식의 관심이 아니라 적절히 공감해주고, 또 먼저 인생을 많이 살아본 어른으로써 '이런 사람은 이럴 수 있어'라며 꼰대 짓이 아닌 경험에 의한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학창 시절 동안 딸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해왔던 부녀 사이로 보였다. 한순간의 노력으로 쉽게 형성된 관계가 아니었다. 딸은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하면 혼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어 보였고, '나를 먼저 이해해주겠지'라는 신뢰가 깔린 눈빛이었다. 대화 사이에 하나의 어색함이란 없었다. 어색함을 느낀 것은 남자 친구와 나였다. 우리 둘 다 아빠와 저런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다 보니, 옆자리의 1미터는 내가 알고 있는 수치상의 1미터가 아니었다. 유리 칸막이로 나눠진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내 연애상담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엄마도 아니고 아빠에게. 내 연애에 대해서 속속히 상황을 이야기하며 내 감정을 토로한다는 게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아빠는 친구가 아니니까. 

아빠는 아빠니까


어렸을 때를 기억해보면, 아빠는 나름대로 나랑 잘 놀아줬다. 나랑 같이 공기놀이를 해주기도 하고, 같이 오목도 두고, 팔씨름 같은 것도 했다. 내가 한참 "이건 뭐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을 때 열심히 단어를 설명해주려고 여러 가지 예시를 들면서 설명해주기도 했다. 나는 아빠를 좋아했다. 내가 아빠 성격을 좀 더 닮기도 했지만,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는 한치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빠는 항상 나를 좋아했다. 검지 손가락으로 내 낮은 코를 튕기고서 '콩순이'라며 귀여워해 주던 아빠의 눈빛이 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친할머니 댁에 가면 좀 더 하얗고 예쁘게 생긴 오빠를 다들 좀 더 좋아했던 것을 난 어렸음에도 분위기로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런 나를 아빠는 항상 더 안아줬었다. 오빠만 챙기는 엄마에게 서운해서 입이 삐죽 나왔을 때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아빠였다. 


그래도 아빠한테 연애상담을 할 수는 없었다. 아빠의 사랑을 받은 것과는 별개다. 이것은 '대화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의 대화에는 서로의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해졌다. "나 반에서 1등 했어. 너무 기쁘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다른 애를 좋아한데. 슬퍼." 이런 말들. 나는 이런 감정을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빠도 자신의 감정을 말로 차분히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아빠 또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감정을 나누는 대화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속상하고 슬프면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서운함이 밀려들어 자주 삐졌다. 엄마에게 서운하면 '이래서 서운했어'라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김성주와 민국이처럼 '속상한 상황을 말하고 내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받는' 과정이 없었다. 그래서 속상할 때면 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베개 밑에서 울거나, 삐져버리거나 하는 것으로 표현을 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행동이었지만, 보통의 가정처럼 그걸 이해받기보다는 '방문을 걸어 잠그는' 행위에 혼이 났고, 밖으로 나와서 밥 먹으라는 화난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방 밖으로 나왔다. 


이런 대화방식은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아이들이 한 학년씩 올라가고 사춘기를 겪고 대학생이 되면 진정한 대화라는 건 줄어들 게 된다. 사춘기가 늦게 와 17살에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6-7년간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우리 집처럼 성인이 되어 먼 거리로 출가를 하게 되면 더욱더 피상적인 안부만을 묻는 대화가 주를 이루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처럼 옆자리 테이블을 보고 아빠와 연애 상담을 한다고? 라며 놀라게 될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부터 '대화'를 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는 부럽다.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넘어 신기하기도 하다.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라야 아빠한테 연애상담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맑은 삶은 과연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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