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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Mar 25. 2022

정리정돈 DNA

제자리 란 어디인가

엄마에게는 정리정돈 DNA가 없다. 그래서 나도 정리정돈 DNA가 없다. 엄마의 윗단계인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외갓집을 떠올려보면, 외할머니도 정리정돈 DNA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대를 전해 내려오는 우리 집 DNA에는 정리정돈의 염기서열이 새겨져 있기 않다. 이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능력의 부재는 여러 사람이 같은 공간을 오랫동안 공유하며 살아갈 때, 잔소리라는 형태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집이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빠는 우리 모두에게 잔소리를 했다. 혀를 끌끌 차거나 큰소리로 혼내는 경우도 많았다. 아빠는 항상 퇴근을 하면 "집이 이게 뭐니!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가져다 놔. 이것들의 원인은 물건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지 않아서야!"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에는 무언가를 올려놓을 수 있는 평평한 물체만 있다 하면, 주술에 걸린 것처럼 들고 있던 것들을 모두 거기에 내려다 놓았다. 거실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우유 컵, 곧 먹을 과자, 읽던 책, 뚜껑 열린 펜, 잡다한 종이들을 거기에 놓기 바빴다.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리들은 계속 그곳에 물건들을 쌓았다. 갈색의 테이블이 갈색인지 모르게, 쌓고, 쌓고 또 쌓았다. 우리 집에서 테이블이란 어디에 둘지 모르는 자주 쓰는 물건들을 쌓아놓았다가, 잠시 손님이 오면 그 물건들을 해체했다가, 또다시 새로운 것으로 쌓아가는 용도였다. 


아빠가 "제자리에 갖다 놔"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 물건의 제자리는 어디인지 항상 고민했다. 제자리에 놓으려면, 제자리라는 것을 먼저 정의해야 했다. 물론 컵은 싱크대에, 우유는 냉장고에,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이런 것은 쉽다. 그러나 손톱깎이 같이 집에 항상 구비되어 있는 물품은 어느 한 작은 서랍장이라는 본래의 집이 있지만, 우리 집에 초대되어 갑자기 생겨난 물건들은 제자리라는 게 없었다. 학교에서 누군가 나에게 주었거나, 새로 생긴 것들은 그들이 있을 자리가, 제자리라는 것이 없다. 처음 놓인 곳을 제자리라고 한다면 그것들의 제자리는 거실 테이블인데 이것들을 어디로 가져다 놓으란 것인가. 학교 미술시간에 지점토로 만들어온 예술품의 제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받아쓰기 100점 맞은 시험지의 제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선크림으로 정체를 바꿔 말해야 하는 비비크림은 어디에 둔 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아빠가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을 보며 "정리정돈을 해!"라고 하면, 널브러진 것들 중에 내 소유에서 나온 것들을 골라내어 내방으로 가져가, 쌓을 수 있는 평평한 물체인 책상에 모조리 올려놓았다. 그리고 책상을 써야 할 때면 다시 그것들은 책상에 딸린 제일 위층 서랍장으로, 자리가 없으면 그 밑의 서랍장으로 옮겨 놓을 뿐이었다. 내 물건들은 대부분 그렇게 아빠의 호통, 내 물건 골라내기, 내 방으로 가져오기, 빈 공간에 두기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명확한 '제자리'라는 것은 없고 마지막 '종착지'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항상 나는 제자리에 두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엄마가 우리 집의 시초였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외할머니일지도) 우리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엄마는 거실 테이블에 있는 물건들을 몽땅 안방으로 가져다가 숨겨놓았다. 안방에 있는 서랍장, 침대, 피아노 위로, 올려 쌓을 수 있는 평평한 곳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보는 시야에서 물건들을 없애버리는 것. 그것이 정리정돈이었다. 물건들은 여기서 저기로, 저기에서 더 깊숙한 곳으로 옮겨 다니기 바빴다.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유목생활을 하는 처지였다. 그들이 우리 집에 온 순간 '유목 물'로 그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러나 실로 놀라운 것은 "엄마! 그 풀 어딨지?"라고 물으면 엄마는 "풀? 너 방 서랍장 두 번째에 있잖아"라고 엄마가 답한 다는 것이다. 엄마는 유목생활을 하는 모든 물건들의 위치를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했는지,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것들의 위치를 신기하게도 다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는 레이더망이 있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되려 아빠였다. 아빠는 "제자리에 놓아!"라고 명령만 했지 한 번도 제자리를 정해주지도, 스스로 물건들을 각각의 자리에 놓지 않았다. 아빠에게 물건이 어딨냐고 물어보면 "제자리에 놔둬야 알지"라는 답이 올뿐, 그 물건을 찾아주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에는 제자리라는 게 없었다. 물건들의 제자리가 없으니, 제자리에 두고 싶어도 둘 수가 없고, 제자리를 찾아가 봤자, 제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리정돈을 못하는 것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제자리 없음'은 우리에게 몇 가지 능력을 생기게 했다. 첫 번째, 우리는 단시간에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제자리 없이 흘러가는 물건들을 찾으려면 매번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가위가 없으면 최근에 가위를 사용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가지고 이동했던 동선을 다시 한번 따라 해 보고, 그렇게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불현듯! 가위가 있는 곳을 찾게 된다. 불현듯! 그것은 어떤 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불현듯 가위를 찾게 되는 것. 머리에 불꽃이 튀면서 그 물건의 장소가 기억나는 것. "아 맞다! 여기 있었지!" 라며 짜릿함이 몰려오는 것. 이 과정은 문제가 생겼을 때 포기하지 않고 모든 신경과 기억을 집중해서 몰입하면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그런 가르침을 주었다. 거실에 텔레비전 소음이 들려도, 아빠가 다시 잔소리를 해와도, 그 모든  방해물들을 이겨내고 나의 온 에너지를 모아 과거로 돌아가는 집중력. 빠른 시간 안에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몰입력, 그 능력들이 우리에게 생겨났다. 


둘째로, 물건들과 밀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 알다시피 모든 잃어버린 물건들을 다 찾을 수는 없다. 항상 어떤 특정한 물건은, 분명 여기다 두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라는 추임새가 튀어나오게 하는. 그런 이상한 일 말이다. 분명 난 여기에 두었는데. 분명.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입으로 되뇌며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물건이 있다. 그때는 내 잘못을 인정하고 찾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나오지 않는 물건을 계속해서 찾으려 한다면 그 물건은 오히려 더 숨어버린다. '내가 분명히 여기에 두었다'라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분명히.라는 이 부사를 버려야 한다. 물건들이 다 듣고 있기 때문이다. 숨바꼭질을 하듯이 숨어버린 물건들에게 내가 고집스럽게 한 기억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때는 '언젠간 나오겠지'라고 태평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상대에게 나의 조급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어떤 물건에게는 발이 있고, 듣는 귀가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이상하네..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라며 넌지시 모른 척 던져야 한다. 마치 토이스토리처럼 말이다. 더 이상 물건을 찾지 않겠다고 포기하는 태도를 보여줘서 그들이 지쳐서 스스로 기어 나올 수 있도록 밀당을 해줘야 한다. 그리고 며칠 후 제풀에 지쳐 기어 나온 물건을 보면 "어? 여기 있었다고?"라며 모른 척 쓱 가져가면 된다. 


이밖에도 정리정돈을 잘하지 못해 생기는 좋은 점이란,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보면서 갑자기 책이 읽고 싶어 지는 우연의 학습효과를 나타내기도 하고,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이 모아진 서랍장으로 인해 '가위가 문구품이 아니라 의료품에 속할 수 있다'는 폭넓은 사고를 가질 수도 있고, 오빠랑 싸워 냉전시기일 때도 아빠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힘을 모아 집을 치우는 협동심을 발휘할 수도 있다. 또한 정리를 잘하는 집에 가면 진심을 다해 감탄을 하면서 "어머, 어떻게 집이 이렇게 깨끗할 수 있어요?" 라며 집주인을 추켜올려줄 수 있는 센스를 발휘할 수도 있고, "나도 이렇게 정리정돈을 깔끔히 하고 살아야겠다"라는 각성을 통한 겸손함, 존경심, 원동력 등을 기를 수 있다.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정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오랫동안 체득된 습관이기 때문에 고치기가 쉽지 않다. 그 사람의 집에 가보면 보이는 곳은 잘 정돈되어 보여도, 서재방이나 안방등으로 들어가면 많은 물건들이 한데 모여 적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의 집은 5년 전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했고, 새로 이사한 집도 그러할 것이다.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한몫을 차지한다. 5년 전에 입고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이 옷장 안에 가득하고, 화장실에는 한번 쓸 용량만 남은 바디용품들과, 아토피에 좋다는 비누, 여드름에 좋다는 비누, 건조함에 좋다는 비누 등 여러 가지 비누들이 서로 눌어붙어 있다. 서재에는 읽지 않은 책, 읽었던 책, 어렸을 때 풀던 문제집들이 가득 쌓여있다. 버리지 못하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은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어떠한 압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가끔 부모님 집에 내려오면 아직 그나마 터지지 않고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우리 집에서, 물건들이 여기서 저기로 적재되어 떠돌면서 여전히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내가 몇 주 이 공간에 머무르면 나의 물건들까지 더해져 더욱 정신이 없어진다. 엄마의 화장품에 내 화장품이 더해지고, 엄마의 책상에 내 노트북이 더해지고, 서랍장 위에 내 옷들이 포개어지면서 더욱더 높은 산을 만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콜라보. 엄마와 나의 컬래버레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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