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는 태도
대학교 3학년 때 한의학과를 다니던 어떤 애가 그랬다. "대학교에 처음 와서 첫 전공 강의를 듣는 순간, 이 전공이 나랑 맞는지 아닌지를 알게 된대요." 그 아이는 다른 전공을 택했다가 다시 반수를 해서 한의학과를 간 아이였다. 나도 처음 전공과목을 들었을 때 "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나는 빨리 무언가 실천해야 했구나. 난 늦었네.
신입생 때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자꾸만 한숨으로 기화되어 나왔다. 여자애들이 이 좁은 강의실에 꽉 차게 되면 이런 공기가 흐르는구나. 하. 나도 수강신청이라는 거 한번 해보고 싶은데 우리는 고등학생처럼 시간표가 짜여 나오는구나. 하. 교양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없구나. 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 세상엔 정말 많구나. 구나. 구나를 반복하며 경탄에 질겁이 조금 섞인 '하'숨을 내뱉던 시기에 반수를 생각나지 않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건 이상하게도 생물학이었다.
대학교 일 학년 때 우리들은 약간의 교양과목과 전공 간호 과목, 그리고 기초의학을 배웠다. 기초의학 중에 처음으로 듣던 과목이 일반생물이었다.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했던 나에게 생물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보다 더 생소한 것이었다. 과학이 싫어서 문과를 선택했던 내가, 과학을 배워야 하는 전공을 택해서 이 교실에서 생물을 배우고 있다니. 지금 생각해도 잘못된 선택이었지. 몇 년이 흘러도 그 선택을 생각하면 항상 잘못된 선택이라는 결론이 났다. 유치원 때부터 10여 년간 하고 싶은 직업을 여러 개 바꿔오면서 결국 선택한 전공이라는 것이, 적성과 전혀 맞지도 않고 오히려 적성과 정말 반대되는, 되고 싶은 직업의 리스트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해 발뒤꿈치도 생각지 않았던 간호사라니, 잘못되긴 한참 잘못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가 재미없었다. 기숙사에서 자고 일어날 때도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내 인생이 이렇게 다른 길을 향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일찌감치 무생물이 되어 생선가게에 널브러진 동태처럼 흐리멍덩한 동공을 가진 채로 캠퍼스를 거닐고 있을 때였다. 내 동공의 매끈한 각막이 빛을 반사시키면서 한순간 반짝거림이 일어났다. 이 순간에 내 눈이 반짝거릴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하였다. 아니 생물시간이라니까? 내가 싫어했던 생물학이라고! 그러나 생물학 강의를 자연스럽게 듣다가 고개를 들어 교수와 눈이 마주쳤고 그렇게 반짝 눈이 떠진 것이다. 반짝반짝. 교수님의 벗어진 머리가 반짝 빛나서는 아니었다. 이건 새로운 지식의 반짝임이었다.
흰머리가 몇 가닥 남아있는 교수님은 노년의 교수였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함과 동시에 자연스러운 템포로 우리에게 생물학을 가르쳤다. 대다수의 이과생들은 부럽게도 지루해 보였고, 나처럼 소수의 문과생들은 용어부터 어려워했다. 분명 누군가에겐 별 볼 일 없는 생물학 강의시간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만큼은 이상하게도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교수님은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치지도 않았고, 열정 있게 우리를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본인만의 속도로 매년 간호학과 강의실에 들러 본인에게 해당된 몫을 해왔다는 듯 강의를 했다. 그런 점이 좋았다.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본인의 강의에 게으름을 보이거나 나태하지도 않았다. 웃지도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그는 성실하게 우리들에게 무정했고, 나는 그게 좋았다. 아무 감정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생물만 바라보게 해서 좋았다. 내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 해서 좋았다. 그렇게 난 생물학이 좋아졌다. 우리 몸안을 설명하는 두꺼운 일반생물학 책이 좋았다.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따라 쓰고 또 따라 그렸다. 생물이 좋아지는 바람에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반짝 잊어버렸다. 이것이 반짝 없어질 것인지, 저것이 반짝 피어날 것인지 모른 채.
간호학은 여전히 나에게 매력이 없었다. 그러나 학기가 계속될수록 나는 해부학에 빠지고, 일반화학에 뒤엉키고 병리학에 웃고 생화학에 울다 미생물학에 흥미를 느꼈다. 신기하게도 난 그런 과목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좋아하게 된 내가 마음에 들었다. 나르시시스트처럼 말이다. 이과적 지식들이 채워지는 나를 상상했다. 뼛속까지 문과라고 생각했던 내 몸에 이과적 근육이 하나씩 붙고 있었다. 한국지리를 제일 사랑했고 근현대사에 절절했던, 물리와 화학을 보자마자 잽싸게 '반사'를 외치던 내 몸에 해부학, 생물학, 화학들이 들어와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나는 뭐랄까 비로소 완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과만 있던 내 머리에 이과가 들어왔으니 완전해지는 것 아닌가. 그렇게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어 튼튼해지는 뽀빠이처럼 말이다. 어느 한 곳으로 기울어져 떨어지지 않는, 치우쳐있지 않는 그런 사람. 쿵 떨어질 염려 없이 시소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반반이 되고 있었다. 하프 앤 하프. 반/반. 후라이드 치킨을 먹다가 양념치킨이 먹고 싶을 때면 언제든 그 빨간 양념이 묻은 닭다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짜장면을 먹다 얼큰한 짬뽕을 먹을 수도 있는 짜장 반 짬뽕 반. 사회부 신문을 읽다가 사이언스 저널을 볼 수도 있는 문과반 이과반. 그렇게 지식을 가리지 않고 향유할 수 있는 반반.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반반. 마음에 들었다. 숲 속에서는 하체는 말이고 상체는 사람인 켄타로우스가 된 것 같았고, 바다에서는 인어가 된 것 같았다. 지식의 균형. 나는 이 균형감을 가지게 된 것이 기뻤다. 한쪽에 매몰되지 않고, 편향되지 않는 시선을 가지고 성장한다는 기분이 좋았다. 적성에 맞지 않은 전공을 선택해 4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한 것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균형감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해버리면 게임의 퀘스트를 통과하는 것처럼 내 처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뭐랄까 레벨업을 하려면 이겨내야지 이런 마음.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느낌. 그만큼 균형이란 나에게 인생에서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시련은 쉽게 헤쳐나갈 수 없었다. 그러니 시련이었다. 나의 자서전은 시련을 극복하는 영웅 설화가 되지 못했다. 지식의 균형을 습득하게 했던 내 전공은, 내 삶의 균형은 무너뜨렸다. 병원이란 곳은 그 누구도 균형 있는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불규칙한 삶 속에 살았고, 환자들은 너무나도 규칙적인 삶에 무기력하게 자신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나는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없던 병원을 그만두고 돌연 프라하로 떠났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환경에서 벗어나 이국땅에서 나만을 바라보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고 싶어서 여기까지 떠나온 걸까.
질문은 여러 개가 길게 늘어져있었지만 답은 짧았다. 다시 새로 시작해볼까? 유학길을 떠나 배우고 싶은 것을 지금이라도 배워볼까? 그러나 그걸 배워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내가 내린 질문들에 대한 모든 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균형이었다. 일, 배움, 쉼이 균형을 이루는 삶의 패턴뿐만 아니라,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는 태도. 이게 내가 가지고 싶었던 삶이었다. 어느 한쪽에 빠져서 다른 면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그런 삶을 살지 않는 것.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이게 내가 가지고 싶은 삶의 자세였다. 대단한 결정을 내리고자 떠나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크게 없었다. 그저 내가 본 것만이 내 세상이 되어 울타리를 두르고 자물쇠를 채우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나는 항상 바랬을 뿐이다. 하나에 매몰되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뻣뻣하게 경직되어 자기 마음대로 굽혀진 척추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살아가는 대로 살아 자기 아집에 가득 차서 뻔뻔함으로 무장한 할망구가 되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아니, 나는 그것을 혐오했다.
균형감이란 지식부터, 직업, 전반적인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균형이 있는 삶은 좋은 거니까. 폭넓게 유연한 사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소요했으니까. 그래서 갖게 된 것이니까. 나는 밸런스에 점점 몰두해갔다. 깨어있을 때와 잠자는 시간의 바이오리듬을 지키는 균형.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의 비율을 맞추는 영양가 있는 식단의 균형. 사람들을 만나면서 활동하는 외향적인 힘과 혼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향적인 힘의 균형. 문학을 읽는 시간과 비문학을 읽는 데 소요되는 시간의 균형. 과학을 이해하는 것과 예술을 이해하는 것의 균형.
그리고 이런 균형들은 실로 유익했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는 나의 태도가 그랬다. 어떤 것에 편견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었다. 수용성이 길러진 것이다. 수용성은 다방면에서 좋았지만 직장생활에서 더 빛을 발했다. 대부분 듣기 싫어하는 직장 상사의 사적인 이야기도 나는 진지하게 잘 들었고, 또 되물었고, 다시 들었고 그에 합당한 진심 어린 리액션을 했다. 꼰대의 이야기야. 듣지 마.라는 흔한 MZ세대의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조언을 나는 정말 잘 들었다. 그리고 잘 분별했다.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체득하려 했고,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썼다. 그래서 딱히 싫어하는 직장동료나 상사가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듣고 따라와 주니 그들도 선배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한 것 같아 만족스러워 보였고, 새로운 직장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또한 균형 있는 태도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애써야'만 얻을 수 있다. 이해하려 애써야 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심 어린 공감은 어렵지만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서 노력하면 어느 정도 그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얻으려고 안달 나 있었고, 당연히 항상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열려있었다. 누군가 내 의견에 반하는 발언을 하거나, 동조하는 발언, 또는 제3의 발언을 듣는 걷이 좋았다. 그래서 이런 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토론 모임들을 찾아다녔다. 일상 주제를 두고 토론하는 모임, 문학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 뇌과학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 현대미술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 등 나는 그 당시 꽤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도 1시간씩 전철을 타고 이런 모임들에 참석했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의 의견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 나는 그것에 열성적이었고 그들에게 배운 것들도 많았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특히나 단둘이 만날 때 좋았다. 우선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어색해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불편해 보이면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질문도 잘했고, 그에 맞는 리액션도 할 수 있었다. 사람 만나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았었던 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에너지 폭이 커져갔다. 어차피 사람들이란 모두 다 제각기 자신의 몫에 달하는 고통을 이겨내고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는 나의 태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나는 균형감에 조금씩 집착을 하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에 균형을 두어야 했고 균형을 벗어나는 범주에 대한 기준은 또 야박했다. 그래서 이것을 해치는 것들이 생겨나면 신경이 곤두섰다. 오늘 사람을 만나는 데 쓸 힘이 다 소진되었는데 갑자기 친구가 찾아오면 불편했다. 내 바이오리듬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의 연락, 일, 모든 것에 예민해졌다. 퇴근이 6시인데 갑자기 예상에 없던 야근 상황이 생기면 모든 게 망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균형에 대한 집착은 감정도 컨트롤하려 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도 안 되고 너무 우울해서도 안 되고, 너무 즐거워해서도 안 되고 너무 방방 떠서도 안 된다. 너무 방방 갑자기 엔도르핀이 돌면 내가 들떠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면서 불안해졌다. '왜 이렇게 들떠있는 거야 잠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자. 너무 하이텐션이면 안돼. 그러면 텐션이 떨어질 때 평소보다 더 급격히 무너질 거야. 마음을 다잡도록 해.' 기분이 너무 가라앉으면 '우울한 생각이 자꾸 들어? 그럼 안되지. 자 연필이라도 들고 그리고 싶은 그림이라도 그리면서 아무 생각하지 말자. 기쁜 일이 없어? 그럼 억지로라도 좋은 호르몬을 만들자. 러닝화 신고 달리기라도 하자.'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고, 항상 나의 기조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점점 평정심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면서 감정이 조금씩 무뎌졌다. 좋은 것도 예전만큼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고 나쁜 것도 나쁜 것인지 잘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균형감이 아니라 균형을 빙자한 통제였다. 균형을 가지려는 마음이 지나쳐 내 삶을 반반으로 맞추고 삶을 통제하려 했다. 인간은 미래를 통제하려 하지만, 통제할 수 있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 이것은 처음 내가 원하던 균형 있는 삶의 태도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균형밖에 모르는 괴팍한 할망구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은 너무 많거나 지나치면 독이다. 나는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균형, 밸런스에 너무 지나치게 몰두해버린 것이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유연함을 가지려 했는데 나를 통제하는 독재력만 높아졌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태도는 이해할 수 있으면서 나는 AI처럼 틀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다그쳤다. 그러니 감정도 AI가 되지 않고는 그 틀을 지켜낼 방도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려 했던 원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가설들을 지극히 회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생각에도 크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뭐든지 의심하기만 한다면, 어떤 새로운 생각도 보듬지 못할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비상식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귀가 가볍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마음을 열면, 그래서 회의적인 감각을 터럭만큼도 갖추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가치 있는 생각과 가치 없는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생각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도 타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겠기에 말입니다.
< 칼 세이건 "회의주의자가 짊어진 부담" - 패서디나 강연(1987)>
칼 세이건은 회의주의자가 되어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라 말한다. 새로운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태도와, 그것이 틀릴 수 있다는 태도를 갖는 균형 잡힌 시각 말이다. 그렇게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균형감이란 집착할수록 무너질 뿐이다. 집착하지 않고 무조건 열린 사고를 경계하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의심만 하고 살지는 않는 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개의 사고를 경계를 하는 태도를 가져야 했지, 나를 통제하려 해서는 안되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힘을 빼고 유연성을 기르는 것이다. 통제력이 아닌 유연성.
요가를 좀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