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습관적으로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고,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배경 화면이 보인다. 환하게 빛나는 화면에는 내 옆모습과 내 인생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동생의 얼굴이 나란히 들어있다. 이 사진은 내 동생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찍은 생일 기념사진으로, 동생은 자신과 어울리는 노란색 고깔모자를 썼다.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뽀뽀를 시도하는 나와는 달리 동생은 정면을 바라보며 혀를 조금 내밀고 있다. 조금 지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그냥 평소의 표정 같기도 하다.
동생과 나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 살지 않았다. 내가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부터는 계속 떨어져 살았으니, 우리가 함께 산 기간은 고작 4년 정도였을 거다. 같이 살지 않은 기간에는 고향에 자주 내려갔고, 한 번 내려가면 오랫동안 집에 머물면서 동생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직장에서 힘든 일이 생겨 울고 싶은 날에도, 이딴 일 다 때려 칠까 싶은 날에도 ‘월급 받아서 내 동생 하나라도 좋은 거 사줘야지’라는 마음으로 지난한 날들을 버텼다.
내 동생은 흰 털에 갈색 점박이 무늬가 있고, 얼굴에는 검정콩이 세 개 있다. 까맣고 큰 눈 두 개와 그 눈만큼 큰 까만 코. 한 팔에 쏙 안기는, 2킬로 그램이 채 되지 않던 너(그 무게도 충분히 ‘비만’으로 여겨질 만큼의 덩치라 평생 다이어트 사료를 먹었던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지). 동생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한 살일 때도 마지막으로 우리를 떠났던 열 네 살일 때도 그저 우리에게는 영원한 아기였다. 우리 집 막내, 우리 귀염둥이, ‘두나’. 나이가 들어도 우리 눈에는 한없이 어렸기에 두나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더 믿어지지 않았다.
벌써 삼 년도 더 된 일인데도 나는 두나가 떠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이후로 수많은 날을 울었고, 울다가 지치면 웃었고, 다시 또 울었다. 그리고 여전히 힘들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내게 금지되었다. 다시 또 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느끼고 싶은 것들이 있다.
뜨끈뜨끈한 배. 들숨 날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의 능선. 둥그런 이마를 쓰다듬을 때의 촉각과 리듬. 발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 발톱과 마룻바닥이 부딪혀 나는 또각거리는 발소리. 원할 때만 움직이던 꼬리. 갸우뚱거리던 얼굴과 바짝 눕히던 귀. 내 눈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스르륵 떨어지는 눈꺼풀. 그 눈꺼풀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속눈썹.
/
나는 다시 개를 키우고 싶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눈에 들어오는 개들이 있다. 그 개들의 일부에서 나는 기어코 두나의 모습을 찾아낸다. 사 년째 봉사활동을 다니는 보호소에서 어느 날 유독 눈에 들어오는 개가 한 명 생겼다. 두나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인데도 닮아 보였다. 힘이 없어 보이는 눈 때문일까, 아니면 조금은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 때문일까. 몇 번을 더 만나면서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심장사상충으로 힘든 그를 돌보는 내 모습, 천천히 마음을 여는 그의 모습, 그와 반려인과 내가 함께 거실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 힘든 게 싫어 스스로 금지했던 일을 그렇게 아주 조금씩 소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인간동물 말고 비인간동물 한 명과도 함께 살고 싶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사는 내게 금지된 가장 큰 일. 하지만 우리 빌라에는 암묵적으로 반려동물을 들일 수 없다. 세입자에게는 금지된 이 일이 지금 나는 몹시 하고 싶다. 그것도 아주 많이.
덧)
며칠 전, 집주인에게 넌지시 반려동물 이야기를 꺼냈지만 실패. “우리 건물에서 반려동물 키우는 건 안 돼요.” 집주인 ‘덕분’일까, 집주인 ‘때문’일까? 금지된 것을 소망할 수 없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일까? 아니면 이 일을 계기로 그것을 더욱더 소망하게 될까? 궁금할 틈도 없이 내 엄지손가락은 부동산 앱을 눌렀고, 매의 눈으로 동네 빌라 시세를 확인한다. 반려동물 가능 체크박스에 클릭을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