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자취는 다르다. 자취는 말 그대로 손수 밥을 지어 먹을 줄 아는 생활을 말하지만, 독립은 그것보다 한 단계 위의 상태다. 예속되거나 의존하지 않는 상태. 나의 독립은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시작되었지만 은은하고 넓었다.
내 인생 첫 독립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때다. 즐겁고 자유로운 시간이었지만 꿈꾸던 자취에는 그만큼의 노력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다시는 자취하지 않고 가족과 붙어살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일 년 뒤 나는 서울로 이사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였다. 서울로 거처를 옮겼지만 처음 서울에서 지냈던 2년간 나는 ‘독립’하지 않았다. 대학원생으로 지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부모님께 용돈을 받았고, 사촌 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촌 언니를 서울의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에 숨이 막힐 때가 있더라도 숨을 쉴 수는 있었다. 도와주는 이, 함께해주는 이가 있으면 숨 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매한 세미 독립의 기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학기를 휴학하며 나는 다시 본가로 돌아갔다. 어차피 졸업 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이었기에, 다시 복학할 때는 일 년 동안만 지낼 공간을 구하기로 했다. 보통 부동산 계약은 2년을 원하기 때문에, 학교 근처에서 일 년만 살 집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발품을 팔다 발견한 건 학교 코앞에 있는 쉐어 하우스였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서울은 그간 느꼈던 서울과는 조금 달랐다. 서울에서의 ‘독립적’인 자취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가족과 완벽하게 떨어져 지내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했다. 그 쉐어 하우스에는 총 여섯 명이 살았는데, 하는 일도, 나이도, 고향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기도 해서, 우리는 종종 거실이나 베란다에 모여 맛있는 것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친해졌고, 그곳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 덕분에 제법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잘 마무리되는 줄 알았던 나의 마지막 학기는 셰어 하우스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탈을 쓰고 부동산 재미를 보는 그 기업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계약을 종료한다고 통보했다. 혼자였다면 겁을 먹었을지 몰라도 우리는 여섯 명이었다. 우리는 법적으로 잘못된 것을 찾고,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 결국 아주 소량의 이사비용을 받고 그 집에서 나왔다. 급하게 구한 다음 집은 온전할 리 없었고, 보증금 소송이라는 큰 인생 수업을 하게 해주었다. 그 집 덕분에 나는 내용증명을 쓸 줄 알게 되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도 싸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집을 거치고 지금 사는 집을 만났다. 이제는 세대주가 아닌 세대원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서울에 살기 시작했을 때의 나보다 조금은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된 것 같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