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세계 명작 다시쓰기
시골 영주의 저택을 둘러싼 호숫가의 화려한 수컷 오리들은 한 아가씨 오리의 시선을 빼앗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도 그럴 것이 아가씨 오리의 깃털은 수수했지만 그 어떤 암컷 오리보다도 윤기가 좌르르 흘렀고, 곧게 편 자세에선 품위가 흘렀다. 헤엄칠 때 밖으로 돌리는 발 끝에서는 교양이 넘쳤다. 무엇보다 아가씨오리의 볼륨감 있고 풍성한 가슴털은 어떤 수컷 오리라도 눈길을 주지 않고 못 배겼다.
어느덧 아가씨 오리는 어미오리가 됐다. 매력적이었던 가슴털 중 가장 몽글하고 포근한 것들만 아낌없이 부리로 간추려 내어 우엉 잎으로 만든 둥지에 깔아놓고 소담한 알 10개를 낳았다. 혹시 살쾡이나 왜가리가 알을 발견할까봐 낮도 밤도 없이 알을 품고 지켰다. 호숫가의 모든 물고기는 다 잡아 줄 것 같이 굴던 남편 오리는 어미 오리가 알을 품은 첫 사흘간은 매일 벌레며 작은 물고기며 하는 먹이를 잡아다 주더니 그 후 이틀에 한번, 닷새에 한번, 결국 코빼기도 안보인지 오래다. 허기를 참지 못해 호수가 죽은 듯 한적한 시간을 골라 후다닥 호숫가 물속에 머리를 넣어보지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소금쟁이 두어 마리와 물로 목을 축이고 말았던, 피로를 참지 못해 꾸벅꾸벅 졸다가도 화들짝 놀라 알이 10개가 맞는지 세어보다 졸고 다시 세어보다 졸곤 했던, 여름의 시간들이 지나갔다.
알을 품은 지 스물다섯 날 째 되는 무더운 정오였다. 스물다섯 달 같이 지루하고, 날이 서 있었으며, 피로만큼이나 설레이던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어미오리는 조심히 알에서 내려와 하나하나 더 이상 소중 할 수 없을 열 개의 알 표면의 미세한 진동을, 토독 하는 세상에의 첫 노크를, 갈라진 껍질을 밀어내는 벅찬 안간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린것들이 깨어나 울어대며 고개를 내미는 순간의 첫 눈맞춤은 어미오리의 몫이었다. 내 속에서 시작되고 내 품으로 지켜내어 무사히 세상에 발을 디딘 열 마리의- 아니, 아홉, 아홉이다. 한 마리는? 어미오리의 심장이 덜컥 내려 앉으며 서둘러 둥지를 살핀다. 정신없이 빽빽거리는 아홉의 개나리색 솜뭉치들을 겨우 걷어내고 보니 조금 큰 알 하나가 아직 남아있었다. 남의 일에 관심 많은 늙은 오리들이 너도나도 참견하며 칠면조 알이라느니, 물닭 알이라느니 하며 혀를 찼다.
어미오리는 못 들은 채 다시 그 알을 품었다. 서로를 밟고 뒹구는 아홉 마리의 아기오리를 챙기랴 알을 품으랴 혼이 나갈 지경이었지만 그렇게 사흘째 드디어 큰 알을 깨고 기다리던 아기오리가 나왔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몸집이 유독 크고 희끄무레한 잿빛에 쭉 찢어진 눈을 한 오리였다. 게다가 그 오리는 한쪽 물갈퀴에 얼룩같은 갈색점까지 있어 지저분해 보였다. “어머, 조금 크지만 그만큼 갈퀴도 큼직해 수영을 잘하겠어. 저 갈퀴에 있는 점도 개성있는걸. 저 찢어진 눈은 물고기 사냥에 타고 났네. 수줍은 듯 빛나는 저 눈동자가 아주 멋져. 회색 솜털은 진흙에 뒹굴어도 티가 안나서 내 일손을 덜겠군. 다른 집 오리들과 섞여도 금새 찾아낼 수 있을거야. 누가 뭐래도 내 아기오리야.”
어미오리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다. 아기오리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헤엄치는 법, 먹이를 잡는 법, 예의를 갖추는 법, 고양이를 피하는 법 등을 가르치느라 쉴 틈이 없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기오리들의 모습 자체가 그저 기쁜 보상이었다. 단, 한 가지 근심이 있었는데 회색 아기오리였다. 어째서인지 이 호숫가에선 한 두 오리의 눈 밖에만 나도 금새 모든 오리가 그를 미워했다. 마치 얄밉고도 재빠른 유행과도 같았다. 한 두 마리의 오리가 회색 아기오리의 목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어느덧 호숫가 대부분의 오리들이 회색 아기오리를 물었다. 오리들은 회색 아기오리의 솜털 색이 개나리색이 아니어서, 너무 커서, 갈퀴가 지저분해 보여서, 찢어진 눈이 낯설어서 회색 아기오리를 미워했다. 건달 오리들은 회색 아기오리의 깃털을 누가 많이 뽑는지 내기했다. 이제 갓 태어난 회색 아기오리의 등과 목덜미의 생채기와 멍이 늘어갈수록 어미오리의 목은 더 쉬어갔다. 이 아이 좀 가만히 두라고, 이 아이가 대체 무얼 했느냐고 여기저기에 꽥꽥 핏대를 세웠다. 그 뿐이었다. 대신 털이 뽑힐 수도, 대신 물릴 수도, 하다못해 막아줄 수도 없다는 것이 어미오리의 심장을 멍들게 했다. 어미오리는 매일 밤 아픔에 훌쩍이는 아기 회색오리의 상처를 쓰다듬어주며 붉어진 눈으로 속삭였다. “아가야, 넌 대단한 아이가 될거야.”
어느 날 부터인가 오리들은 어미오리를 무리에 껴주지 않기 시작했다. “잘난체하며 고집 부리더니.” 나이든 오리들은 어미오리가 호수에 머리를 담그고 물을 마시려하면 날개를 세차게 퍼덕거리며 쫒아냈다. 아직 알을 낳지 않은 젊은 암컷 오리들은 “저 아줌마 근처에 가면 우리도 저런 못생긴 오리를 낳을지도 몰라.” “어머 싫어! 난 귀엽고 건강한 아기들을 낳고 싶다구.” 하고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어미오리를 세게 밀치고 지나갔다. 오리들의 텃세에 어미 오리를 비롯해 형제 아기오리들은 그저 배를 채울 만큼의 먹이도 구하기 어려워졌고 안전한 잠자리도 빼앗겼다. 그러자 같은 둥지에서 난 형제들도 회색 아기오리에게 등을 돌렸다. 고개를 수그리고 눈물을 애써 삼키는 어미오리의 목덜미에 슬픈 눈망울을 한 회색 아기오리가 머리를 부벼왔다. 허기와 절망, 책임감과 무력감에 떨던 어미오리는 홧김에 회색 아기오리를 푸드득 밀치며 울부짖었다. “널 낳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멀리 가버렸다면!”
호숫가에 아침 해가 떠오르면 간밤의 원망도 눈물도 잠시 증발해 오늘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밤새 아기오리들에게 들킬까 도둑 눈물을 흘리며 선잠을 잔 어미오리는 버뜩 정신이 들었다. 내 소중하고 가엾은 은빛 보물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어서 다정하게 부리로 깃털을 골라주며 미안하다고, 넌 나의 사랑스런 아기오리라고 말해줘야지, 라며 두리번거렸다. 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움직이던 회색 아기오리가 보이지 않았다. 미친 오리처럼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안마시고 꽥꽥 거리며 돌아다녔지만 회색 아기오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지못해 어미를 도와 함께 찾던 형제 아기오리들이 지쳐 갈대 잎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해가 진 거뭇거뭇한 호숫가를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며 지날 때도, 달마저 숨은 꼭두 새벽녘까지도 어미오리의 회색 아기오리를 찾는 꽥꽥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진심이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갈라질대로 갈라져 피 맛이 나는 목소리로 어미오리는 흐느꼈다.
며칠 후 어미오리는 회색 아기오리를 찾아 나섰다. 허튼 짓이라며 모두 뜯어말렸지만 어린 아홉 마리 새끼를 나이든 오리들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다. 혹여나 회색 아기오리의 흔적이 있을까 눈에 핏발을 세우고 진흙바닥과 풀 어귀를 살폈다. 며칠을 달려 마침내 들오리들이 사는 커다란 늪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지치고 상심한 채 밤새도록 누워 있었다. 아침이 되자 날아온 들오리들에게 최대한 공손히 인사를 했다. “혹시 털이 짙은 은빛이고 선량한 눈빛을 한 아기오리 못보셨나요? 워낙 귀여워서 기억하실 거에요.” “그런 오리 본적 없는걸요. 끔찍하게도 못생긴 오리라면, 얼마 전 기러기 무리에서 얼쩡 대던 걸 본 것 같네요. 아마 철새가 돼서 날아갔을 거에요.”
어미오리는 며칠을 기다려 늪지에 새로 자리를 튼 기러기떼를 만났다. “혹시 갈퀴에 깜찍한 점이 있고 예의바른 한 아기오리 못보셨나요? 워낙 사랑스러워서 기억하실 거에요.” “그런 오리 본적 없는걸요. 요즘 새라는 새는 다 쏴 죽이는 사냥꾼들이 기승이라 총소리에 들판으로 쫓겨 갔는지도 모르죠. 물론 총에 아직 안 맞았다면요.”
어미오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늪지를 나와 들판과 초원을 지났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발걸음을 옮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폭풍을 피하려 가까스로 들어온 작고 허름한 가축우리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암탉 한 마리를 만났다. “혹시 눈이 쭉 찢어져서 영리해 보이는 빛나는 눈동자의 아기오리 못보셨나요? 아기오리 답지않게 똘똘해서 기억하실 거에요.” “멍청해서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오리라면 기억 하지. 바보같이 물을 머리 위에 뒤집어 쓰고 싶어 안달이었거든.”
가을이 되어 나뭇잎들은 색을 바꾸고 밤공기가 차졌다. 겨울이 되자 지난 가을의 차가운 밤공기는 따스한 남동풍으로 기억될 지경이었다. 온갖 물가란 물가는 다 찾아 뒤지고 다녔던 어미오리가 더 이상 헤엄칠 물가도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추워 물이 꽁꽁 얼어 붙었기 때문이다.
어미오리가 이 혹독한 겨울 동안 견뎌야 했던 고난과 비참함은 너무 슬퍼서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한 날이 먹고 잔 날보다 배로 많았다. 겨우내 굶주린 야수들의 공격 속에서 여태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진 것이 기적이었다. 종달새가 지저귀고 드디어 아름다운 봄이 왔다. 하지만 어미오리는 그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큰 호수를 둘러싼 어느 정원 덤불 앞에 쓰러져 쉭 쉭 거리는 숨만을 겨우 내쉬었다. 어미오리의 지치고 쇠약해진 몸으로 따뜻한 봄볕이 내려왔다.
점점 흐려지는 어미오리의 눈가에 물 위를 떠다니는 백조 무리가 비쳤다. 그들의 당당하고도 우아한 자태는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뛰게 잘생긴 백조 한 마리가 화려한 날개를 펼치며 어미오리에게서 멀지 않은 뭍가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저 젊은 백조의 발치에도 꼭 그 아이가 가진 호숫가 모양의 점과 꼭 닮은 점이 있구나. 내 가엾은 아기오리도 어딘가 살아있다면 많이 컸겠지. 아주 늠름 할거야. 저 힘 있는 날개를 좀 봐. 멋지게 큰 내 아기를 만나면 넌 대단한 오리가 될 거라고 어미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며 날개 깃털을 쓰다듬어 줬을 텐데. 그리고 어미의 초점 없이 희뿌연 눈이 힘겹게 그 백조의 눈가로 향했을 때, 짙은 슬픔과 세상에의 호기심을 동시에 담고 수줍게 반짝거리던 그 눈- 아- 하는 사이 그 백조는 힘껏 우아하게 날아올라 무리에 합류했다. 어떤 백조보다도 아름답고 빛나는 그 백조를 바라보며 반쯤 감긴 어미 오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어쩌면 마지막이었을 미소가 어미오리의 입가에 서렸다. (끝)
image : "The Ugly Duckling" by Laurel L.Russwurm (marked with CCO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