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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Oct 24. 2024

우비(雨備)를 입은 삶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23

01 . 

2주 전, 친한 지인들의 추천으로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습니다. 영화를 추천해 주신 분들 중 한 분은 '인생 영화에 등극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또 다른 한 분은 '매일매일 루틴을 지키며 사는 주인공이 도영님 같기도 했어요'라는 말도 해주셨죠. 그러니 안 볼 수가 있을까요. 비록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는 타이밍은 놓쳤지만 세상이 잠든 조용한 시간에 맥주 한잔 꺼내들고 재생 버튼을 누르기에는 망설임 없었죠.


02 . 

영화는 정말 단조롭습니다. 도쿄에 사는 주인공 히라야마는 공중 화장실 청소부로 매일매일의 일상을 살아 나갑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루틴들을 지키며,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을 하는 인물이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어진 일의 한계치를 훨씬 넘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개발한 도구와 용품들까지 싣고 다니며 청소라는 그 평범한 일에도 장인 정신을 발휘하는 인물로 그려지죠.


03 . 

물론 영화에는 일하는 장면 외에도 마음에 드는 단편 소설을 한 권씩 사서 읽는 장면, 필름 카메라로 자신이 원하는 순간을 담는 장면, 자주 가는 단골 가게에 들러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면들도 이어집니다. 직업으로서의 일이 정리된 그 시점부터 또 자신이 사랑하는 일과를 사느라 다시 부지런해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게 진짜 '퍼펙트한 하루하루인가 보다'라는 생각도 할 수 있죠.


04 . 

그래서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난 뒤로도 저는 마치 ASMR처럼 그 영화를 틀어놓고 소소한 집안일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대사가 많은 영화도 아닌 데다 기분 좋은 생활 소음들까지 이어지니 오히려 제 일상의 공간들도 좋은 기운으로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소비해 본 영화는 또 처음인데 '이렇게도 영화를 활용할 수 있구나' 싶으니 괜히 인생 요령을 하나 익힌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05 . 

사실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가진 인물인지 그 배경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의 일상에 작은 틈을 내고 들어오는 주변인들을 통해서 뭔가 그의 이야기가 공개될 것 같다가도 결국 어떠한 단서도 보여주지 않거든요. 그러니 영화를 보는 사람은 '저 사람은 왜...', '아니 근데 저건 또 뭐지...' 하며 갸웃하다가도 다시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서 그의 평범한 하루에 몰입하게 됩니다. 영화를 끌어가는 힘은 스토리라고들 하는데 그 스토리가 관객의 멱살을 잡고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게 아니라 마치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산책하듯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흥미롭고 신기했습니다.


06 .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하긴 했지만 저는 실제 우리 주변에도 이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 같은 인물들이 종종 발견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정도로 극단적인 과묵함과 답답하리만큼의 자기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자극에 크게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은 분명히 있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저는 요즘 그런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굳이 '회복탄력성' 같은 단어를 언급하지 않아도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그 풍파들을 아주 유연하게 다루며 사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죠.


07 . 

똑똑하고, 정확하고, 강단 있고, 뾰족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이 아주 작은 자극에도 쉽게 무너지고, 자기 자존감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장면들을 목격하고 나면 생각이 많이 바뀌기도 합니다. 아침 출근길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스토리를 올렸다가, 퇴근길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슬픔을 떠안은 사람처럼 스토리를 공유할 때면 '무엇 때문에 저리 힘들었을까' 싶다가도 '근데 저 사람은 매일을 저렇게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기 때문이죠.


08 . 

당연히 저 역시도 그런 삶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 같지만,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니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작은 기준 하나쯤은 새롭게 정립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바로 '우비를 입은 듯한 삶'이었죠.

히라야마는 자신의 일상을 온전하게 지킬 줄 알지만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마치 우비를 입은 것처럼 굳이 비를 피하려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진 않더라도 자신의 소중한 것은 젖지 않도록 할 줄 아는 사람이란 얘기죠. 그래서 우산을 쓰거나,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우비를 입은 덤덤한 산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그의 삶을 표현해 주는 묘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09 . 

그런데 의외로 세상에는 우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흔한 우산 하나 없이 스스로 비를 맞고 돌아다니며 '왜 나를 이렇게 외롭게 뒀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고, 잠깐 비를 피하고자 처마 밑에 들어온 사람들마저 '여기 내 집 앞이니 나가주시오'하며 매몰차게 떠미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비유가 적절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저는 반쯤은 세상 밖에 나를 내놓고, 또 반쯤은 나의 세상 안에 나를 온전히 머물도록 하는 우비 입은 삶이 참 좋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10 . 

만든 사람의 의도야 그 사람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지사지만, 저는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빔 벤더스 감독의 의도가 이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골칫거리들, 누구의 탓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관계,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는 온도차에도 우리는 나의 하루하루를 잘 보듬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게 감독이 의도한 '퍼펙트 데이즈'라면 저도 그 시각을 따라서 제 하루하루를 잘 챙기며 살아보려고요. 완벽한 하루를 산다는 건 어려워도, 하루를 나름 완벽하게 살아보려고 마음먹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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