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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13. 2023

161025-05

카페에서 말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데시벨


다음 날 어제 못한 것까지 합쳐 13장을 번역해야 했기에 평소보다 일찍 카페에 갔다. 가면서 ‘혹시 오늘도 그들이 오면 어쩌지.’ 걱정이 되어 다른 곳으로 갈까 생각했지만 이미 카페에 들어서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뒤에 그들이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여 평소와 같은 음악에 평소와 같은 딱 적당한 소음에도 불구하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노트북에 띄워 놓은 화면 대신 그 너머에 노트북을 통해 비치는 자신의 뒷자리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러다 문득 어제 봤던 그 여자의 들썩이는 어깨가 생각났다. 그와 동시에 어제 그 여자는 분명 웃으면서 동시에 울고 있었을 것임을 알았다.


웃으면서 동시에 울면서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 11년 전에 봤던 모습이었다.


H가 23살, 대학교 4학년 때이다. 지상파 3사 중 한 방송국의 필기시험을 치고 두 번째 방송국의 시험을 이틀 앞둔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할머니.”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니?”

“네, 그럭저럭 이요. 아빠는 좀 어떠세요? 죄송해요. 요즘 시험 준비하느라.”

“어릴 때는 안 그런 것 같더니 커갈수록 에미를 닮아가는 거니. 어쩜 그리 무심하냐.”

“죄송해요. 할머니. 다음 주에 꼭 갈게요.”

“다음 주 말고 내일 좀 와야겠다. 괘씸해서 아예 연락도 안 할까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연락했다. 내일 10시에 발인이니 oo 장례식장으로 와라?”

“네? 발인이라고요? 아빠가요?”

“에미한테는 연락도 하지 마라. 그랬다간 앞으로 너하고도 영영 연 끊을 거니까.”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일 오전 10시에 아빠 발인? 그럼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건가? 내일 발인이면 이미 어제? 그 길로 oo 장례식장으로 갔다.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아빠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인지 생각해 봤다. 생각이 나지 않아 다이어리를 보니 작년 이맘때였다.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빠는 H가 6살 때, 엄마가 32살 때, 회사 워크숍으로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머리를 돌에 부딪쳐 그날 이후 식물인간이 되었다. 처음 몇 년은 엄마가 거의 병실에 있으면서 아빠를 간호했었다. H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댁을 오가며 지냈다. 그렇게 8년이 흘러 H가 중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엄마가 조용히 H를 불렀다.


“엄마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이제 너도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니까 너에게 선택권을 줄게. 엄마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살 자신은 없어. 그래서 3월부터는 다시 일도 할 거고, 집도 이사할 거고, 그리고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살 거야. 엄마와 함께 새로운 집으로 가는 것과 계속 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것 중에 네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렴. 이런 일이 안 생겼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8년 전에 아빠는 사고를 당했고, 엄마는 지난 8년 동안 최선을 다했어. 할머니 입장에서야 8년을 했는데 15년, 20년이라고 왜 못하냐 그러시겠지만 엄마는 자신이 없어. 아빠에게도 미안하고 또 무엇보다 너에게 제일 미안하지만, 언제까지나 누워만 있는 아빠와 그리고 앞으로 너의 삶을 살 너를 위해 내 모든 걸 희생할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지만 엄마는 이런 사람이야.”


엄마의 그 말을 듣는 동안 이해가 안 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H 역시 엄마가 언제까지나 아빠 옆에서 병원 안에서만 지낼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간호만 하는 엄마는 어딘지 속이 빈 강정처럼 겉껍데기만 씌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H는 항상 마음속으로 기도했었다. 아빠가 깨어나기를, 그리고 엄마가 예전처럼 살아가기를.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그래도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이뤄졌다는 생각에 살짝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있을 때는 아니었다. 본인의 거취를 선택해야 했다. 할머니 댁에서 지내면 아빠는 계속 볼 수 있겠지만 왠지 엄마와 인연이 점점 멀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살면 자신이 병원으로 오면 되니 아빠도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으로 한동안 할머니는 H가 병원에 와도 눈길을 주지 않았었고, 외할머니는 예전보다 더 H를 아껴줬었다.


하지만 역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사람인가 보다. 중고등학교 때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아빠를 보러 갔었다. 가기 전에 미리 할머니와 통화해서 간병인 말고 할머니가 있는 시간에 맞추어 호두과자를 사가면 처음에는 눈길을 주지 않던 할머니도 어느새 H의 손을 꼭 잡아주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본격적으로 스터디를 시작하면서는 일주일에 한 번이 보름에 한 번이 되고 한 달에 한 번이 되어갔다. 그러다 3학년 2학기 때 내년도에 있을 시험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한 번도 오지 못했었다. 아빠의 상태는 17년 동안 한결같았다. 더 악화되지 않았기에 병원에서는 항상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곤 했었다. 하지만 H가 오지 않아서였을까. 지난겨울부터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아빠의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 연락을 주지 않은 할머니를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바쁘다고 아빠를 잊었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컸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발인을 하고 할머니 댁에서 하루 자고 바로 시험을 치르러 갔었다. 당연히 시험문제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두 번째 시험을 망치고 그날 엄마에게 아빠의 소식을 전했다. 아빠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엄마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면서 웃었다.


“사고당한 지 17년이구나. 내가 떠나온 지는 9년이고. 참 오래도 버텼다 네 아빠. 남들은 나를 누워있는 남편 버리고 딴 남자랑 사는 매정한 년이라고 하겠지만 지난 17년 동안 하루하루가 끔찍했어. 병원에 있을 때는 매일 똑같은 하루,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남편, 아들의 사고가 등산화를 챙겨주지 않은 나 때문이라고 탓하는 시어머니, 아직 젊은 딸이 병원에만 있는 걸 보기 힘들어하는 엄마, 그리고 하루하루 커가는 너를 마주하는 게 정말 고역이었어. 그래서 8년 만에 온갖 험한 말을 뒤로한 채 그곳을 빠져나왔지. 다행히 네가 엄마와 함께 와줘서 버틸 수 있었지만 나와서는 몸을 죽 펴고 자본 날이 없을 정도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어. 병원에서 매일 마주했던 얼굴들이 꿈에 나왔거든. 나오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오히려 내 발로 나왔으니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나온 곳에서라도 편히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날들이었다. 이런 말 들으면 아마 할머니는 내 머리채를 잡으려고 하겠지만 이제야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아.”


9년 전 병원에서 엄마가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라는 말을 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오히려 그런 엄마를 한 번도 위로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엄마와 함께 살기로 한 것만으로도 엄마가 자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라 생각하고 학교가 끝나고 학원을 갔다 늦게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와 새아빠에게 간단하게 인사하는 게 다였다. 주말에도 거의 도서관에서 지냈다. 이왕 엄마랑 살기로 했으면 엄마에게 조금 더 살갑게 굴걸. 하지만 할머니 말처럼 엄마 닮아 무심해서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어 집을 나왔었다. 딸은 멀리 있고 지금 남편에게 전남편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엄마는 엄마대로 힘든 나날들이었을 것 같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면서 웃었던 여자의 모습 때문에 전날에 이어 그날도 번역에 집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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