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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Jan 15. 2018

05. A의 티타임





12월 9일의 이야기를

1월 15일 리시케시의 노천카페에서 정리하다








스물다섯의 나는, 일단 2017년을 여행 중에 맞았고,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와서는 막학기를 다녔고, 그러면서 또 다음의 여행을 준비해 또 다른 여행에 와 있어. 25년을 보내고 나니 점점 몸에 경험들이 들어차는 기분이야. 채워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 지금 이 시기가 아깝다고 해야 하나. 아마 스물셋 즈음부터 그런 조급한 마음이 생긴 것 같아. 당장 무언가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고, 좋은 결과를 내야 할 것 같은 기분. 프라하 교환학생 때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겨놓은 것도 다 이 조급한 의무감 때문이었어. 아직까지도 그걸 못 떨쳐내겠더라. 그래서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벌려놓는 일이 많아져. 그러다가도 또 무력감이 닥치면 모든 게 귀찮아져서 다 놓고 늘어져버리기도 한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이 이유모를 조바심에게 쫓기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 아직도 그런 마음이 문득 찾아오거든. 평온하다가도, 아 지금 뭐 하고 있지 나.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요즘의 나는... 덤덤하거나 익숙해진 기분이 자주 드는 것 같아. 이제 더 이상 크게 새로울 게 없다는 건가. 새로운 곳에 가도 예전만큼 감탄하지 않고 똑같이 즐거운 일을 해도 예전만큼 활짝 웃을 수가 없더라. 그래도, 그래서 내가 더 꼿꼿해진 거 같기도 해. 담담해지고 나니까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 지를 점점 알아가고 있어. 또 되고 싶은 모습이 조금씩 생겨가기도 하고. 지금 되고 싶은 인간상은 욕심 없고 꾸밈없는 사람이야. 또 많은 것을 포용할 줄 알았으면 좋겠어.


취향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느끼는데, 인간은 어쩌면 점점 작아지는 거 같아. 유아기 땐 아주 커다랬던 인간이 보석 세공처럼 가장 그 사람다운 모양으로 깎이는 것만 같아. 그러다 어느 상황을 만나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 될 수도 있고. 깎이면서 부피는 작아지고 서로 다른 모양의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취향이 생기고 성장한다는 건 어떤 면에선 많은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고, 거부하는, 커지기보단 작아지는 행위 같거든. 잘 깎인 조각상이 되려면 또 그만큼 노력을 해야겠지?







18살 때 영화 제작 동아리를 하고 단편영화 제작교실도 다니고 하면서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패기 있게 얘기하고 다닐 때가 있었어. 어느 순간 그 꿈이 희미해지고 그 이후로는 사실 크게 꿈이랄 것이 없었던 거 같아. 근데 요즘은 막연하게나마 글을 쓰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껴. 어떤 것을 만들어 낼 때 엔도르핀이 생긴다고 해야 하나. 머리에 생각도 많아서 그걸 해소하고 싶기도 하고.


또 여태까지 많은 곳을 여행했고 지금도 여행 중이지만 계속해서 자유롭게 떠돌고 싶다는 생각을 해. 얽매이는 것 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들을 느끼고 싶어. 새로운 곳에 머물면서 그곳이 익숙해지는 과정도 좋아. 다시 여행을 한 후부터는 무엇보다 많이 생각하고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







여행을 지겹도록 하고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어 지면, 나는 도시보단 근교에 살고 싶어. 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풍경을 보며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거야. 천천히 석양을 보며 산책하고, 한 낮 그늘 해먹에서 책을 읽다 잠이 드는 생활을 하고. 조금은 무심한 고양이를 키우고, 작은 텃밭을 가꾸고, 언제든 마실을 나갈 조그만 자전거와 자전거 도로가 있는,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방문도, 갑작스러운 초대도 기꺼이 응할 수 있는 꾸밈없는 삶. 엄청 이상적이지? 사실 이 생각을 한 2, 3년 전부터 해왔는데 아직도 같은 삶을 그림처럼 꿈꾸고 있어. 언젠간 이렇게 살 것같은 기분으로. 언제 또 변덕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래, 이렇게 살고 싶어. 이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하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거든. 이번 년에 독서토론 모임을 하자고 졸라서 너희들을 자주 만났잖아. 서로의 취향인 책을 읽고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았고, 또 자주 얼굴을 보는 일도 좋았어. 어쩌면 다시 못 올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서 그랬는지 가끔은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때인지 마음 깊이 실감이 날 때가 있었어. 그렇게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에 조금씩 눈이 뜨이는 것 같아. 아마 더 보기 어려워질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노력해야지, 오래오래 가게.


가끔 조금 더 사람들에게 따뜻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고, 또 누군가에게서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 또 무엇보다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었으면 해. 내가 생각보다 굉장히 부정적이고 또 안으로 파고드는 사람이거든. 본성은 어쩔 수 없겠지만 마음은 좀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헤어질 때 하는 포옹을 참 좋아하는데, 포옹 한 번으로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힘이 생겼으면 좋겠어.


딱히 뚜렷한 미래를 그리며 살지는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사실 좀 막살고 있긴 하지. 지금에 충실하고 싶어 항상. 근데 가끔은 너무 단순해지기도 해. 밥과 잠이 전부일 때도 있어.







스물다섯이 되고서는, 이젠 내 앞의 길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단 걸 느껴. 더 이상 주어진 길도 없고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어떤 길을 가꾸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으로 성장할 것 같아. 그래서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한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명예욕 이런 게 있나 봐. 그래서 맨날 유튜브니 블로그니 제대로 시작해야겠다 구상을 짜고 그러는 것 같아. 근데 또 어딘가 얽매여있고 싶지도 않아. 관심이 좋은데 그러면서 누군가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기도 해. 그래서 자주 sns에 회의감이 드는 건가 봐. 아직 내가 정확히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차차 알아가겠지. 성급하게 결정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내가 추구하는 게 정확히 뭔지 말이야. 또 벌려놓기만 하고 흐지부지하게 만들지 말고.


난 미니멀리즘에 관심이 많아. 나 스스로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좋아하는 물건이 있으면 몇 개씩 비축하고 싶은 욕구가 들고, 또 갖고 싶은 것도 많아. 근데 배낭을 메고 여행하면서 도대체 이 무게는 다 뭘까, 내가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이 짐은 뭘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고, 그러면서 욕심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근 1년 동안은 욕구를 자제하고 쓸 데 없는 물건은 안 사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아. 버리려고도 노력하고. 그러다가 또 버린 거 후회하고 새로 살 때도 있기야 했지만. 암튼, 나는 내가 질 수 있는 짐만큼의 무게로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







이야기를 하는 지금이 딱 네팔 랑탕 트래킹을 마친 직후인데, 그래서인지 지금 걷는 행위가 좋아졌고 또 많이 생각하게 돼. 트래킹이나 조깅,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어. 트래킹이나 조깅은 주말이나 매일 아침 습관처럼 하는 운동이 되었으면 좋겠고, 또 순례길은 20대에 걸어보고 싶어. 4월 랑탕은 꽃이 만개하고 날씨가 따뜻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대. 산 좋아하는 엄마 아빠랑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번엔 고산 증세 때문에 고사이쿤다까지는 못 갔다 왔는데, 다음에 갈 땐 2주 동안 걸어서 모두 다녀오고 말거야.   


이번 여행 계획은 지금 네팔을 지나 인도에 갔다가 다합도 가고, 태국이랑 발리에도 가고, 그리고 호주로 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벌 생각이야. 가고 싶은 곳은 너무 많아. 꿈의 섬 시칠리아도 가고 싶고, 네르하 같은 도시에서 한 달이고 머물면서 글을 써보고 싶기도 해. 20대에는 원 없이 돌아다니고 싶어 일단은.


사실 내가 글을 쓰는 것에 자신감은 없지만, 언젠가 소설을 써보고 싶어. 시도 그렇고. 일단 써봐야 쓸만한 지 아닌지도 알겠지. 여행 중에 시간도 많을 테니까 한 번 써볼 생각이야. 이러다 변덕만 안 부리면 좋겠다.







지금은 그 순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했으면 좋겠어. 살면서 참거나 감수해내는 일은 사실 너무 많이 해왔거든. 너무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낸 날들도 많았고. 이젠 뒤로 미루기보다는 그때 시작하고 싶어. 또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더 자세히 탐구하는 습관을 들이는 시간이 됐으면 하고.


언어도 많이 배우고 싶어. 일단 영어도 더 늘리고, 스페인어도 놓은 지 꽤 됐지만 다시 의기투합해야지. 고등학교 땐 영어공부가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 와서 언어 공부하는 게 재밌다?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 되면 불어나 이탈리아어도 배울 거야. 불어 배우러 프랑스 한 번 다녀와야겠어.


내년 1년간 나란 사람이 내 맘에드는 조각이 되었으면 해. 크게 뭐가 있진 않았던 스물다섯이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던 순간들, 또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던 시간들이 좋았던 거 같아. 물론 그만큼 답답하고 이상한 외로움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말이야.




일단 지금 내 관심사는 여행과 글, 그리고 사람들, 나의 순간들인 거 같아. 잘 보내고 싶다 지금을.









A’s PICK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598956

황정은 <아무도 아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356105

잔나비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654387&trackId=623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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