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에겐 운명이 없어. 그건 그들 자신의 책임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아. 단 한번의 큰 충격보다 백번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여. 그런데 큰 충격은 사람을 앞으로 데리고 가지만 작은 충격들은 사람을 점점 시궁창으로 몰고 가. 하지만 그건 아프지 않아. 추락은 편안한 거니까. 내 생각에 그건 파산 직전의 상인이 파산을 감추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리고 그 때문에 평생 이자를 갚으면서 불안에 떠는 왜소한 인간으로 끝나는 거와 같애. 나는 사람이 언제나 파산을 선언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 . .
내 말은, 사람은 길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면 그걸 언제나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거야.
(삼중당 139 일부 수정)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이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이것이 큰 충격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운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니나는 말한다. 이렇게 운명을 (어떻게 보면) 창조해내는 사람은 왜소하지 않고 큰 사람이라고 암시한다.
"불안에 떠는 왜소한 인간"이 되는가 홀가분한 큰 사람이 되는가의 차이는 출구없는 현실을 자인하는가 아닌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면 차츰차츰 나락으로 떨어진다.
니나의 이런 말씀에 바탕하여 나는 한 3단계설을 주장하고 싶다. 지금 니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이에 이어지는 과감한 '행동'이라는 2단계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인정'하는 것 이전에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한다고 본다. (물론 때로 이해와 인정을 서로 구분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서 이해, 인정, 행동이라는 3단계 과정을 상정하고 싶다. 주어진 현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니나의 눈에 바람직한 사람이다.
이런 3단계 과정을 상정한다는 것은 '이해하면 인정하고 인정하면 행동한다'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각 단계 사이에 어떤 추동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사실 무엇(예를 들어, 가수 오디션에서 100번 떨어짐)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이를 인정(나는 가수를 할 실력이 없다)하도록 우리를 떠미는 힘이 있다. 무엇을 절실히 인정했을 때 이에 근거해 무슨 행동(가수가 되는 것을 포기함)을 하도록 우리를 떠미는 힘을 느낀다. 이러한 떠미는 힘이 우리 내면에 있다는 사실, 이것은 나에게 신비롭게 다가온다. (물론 이 힘이 미약해 떠밀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곧,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해에서 인정으로, 인정에서 행동으로 넘어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이해와 용기있는 행동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어울리는 듯한 구절이 괴테의 <파우스트>(2부 1막)에 나온다.
많은 사람이 망설이며 방황할 때
머뭇거리지 말고 대담하게 감행하라.
이해하고 즉각 행동에 나서는
고결한 자는 모든 것 이룰 수 있노라.
(열린책들 215 일부 수정)
여기에서 괴테는 이해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2단계 과정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해하고 즉각 행동한다(versteht und rasch ergreift)'라고 두 동사구를 대등하게 연결했지만 이해가 행동으로 떠미는 힘이 있다고 볼 때, '이해하므로 행동한다'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본다.
괴테는 이런 사람이 고결하다(der Edle)고 말한다. 니나가 이런 사람을 왜소한 사람과 대조시킨 것, 곧 큰 사람으로 본 것과 상통한다.
이해를 제1단계로 놓는 단계설에서는 이해가 변화의 출발점이다. 옛 그리스 현인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령에도 이런 전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이해 앞에는 무엇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