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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만화가 Nov 10. 2024

[단편소설] 사랑을 위한 달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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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Donna)의 원래 이름은 돈(Don)이다. 돈 마르티노. 그녀는 모델로서 받은 첫 계약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 그녀에게 남자 이름을 지어준 조부모를 고소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파벳 몇 개를 누락시켰다고 사람을 쇠창살 뒤에 집어넣을 수는 없더라고.”


도나 마르티노가 말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내 옆에 누워 있다. 그녀와의 관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짧게 끝났다.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나는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침대를 박차고 나가거나, 혹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말없이 바라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아시안들은 언제나 금방 끝났어. 뭐, 나는 그게 싫지는 않아.”


내가 그녀의 말을 곱씹는 사이에 그녀는 어느새 내 옆을 파고든다. 그녀의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난다. 분명 내가 쓴 것과 같은 샴푸인데도, 그녀에게서 나는 향은 더 자극적이다. 졸음을 달아나게 만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 역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아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녀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있다. 나를 바라봐 주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다. 도나는 오래된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서나 나왔을 법한 나른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녀의 혀 끝에서 침을 머금은 습한 공기가 휘몰아친다. 아직 그녀를 알게 된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도나 마르티노의 목소리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되었다.


도나 마르티노의 이야기는 현실과 과거를 넘나 든다. 그녀는 자신이 자랐던 시칠리아 남부의 풍경을 묘사한다. 드넓은 올리브밭. 언제나 화요일이 되면 해안선을 따라 운행되던 오래된 관광용 범선.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던 미국인들. 손그늘을 만들어 시칠리아 소녀들을 지긋이 응시하던 관광객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찍어 미국의 모델 에이전시들에 뿌렸다. 뉴욕의 한 회사에서 답장과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녀는 비행기 티켓을 정중히 거절하고, 포르투갈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뉴욕으로 갔다. 도나는 유럽과 미국을 오갈 때 언제나 배를 탄다.


“혹시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영화 본 적 있어?”


그녀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 ‘잠깐’이라고 말하고, 영화의 줄거리를 묻는다. 도나는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호화 크루즈선에 탄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비료를 팔아 돈을 쓸어 담은 동유럽 재벌. 사회주의에 심취한 선장 (스크린 내에서는 위대하지만 침대 위에서는 그렇지 못한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다). 그리고 머리가 빈 것처럼 나오는 모델 커플 한 쌍.


“모델만큼 영화에서 속 편하게 그리기 쉬운 직업도 없을 거야.”


나는 도나 마르티노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나의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덮고 있는 마호가니 나무 구조물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전혀 아시안 같은 느낌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또 한 번 그녀의 말을 곱씹는다. 내가 말을 채 소화시키기도 전에 그녀는 영화에 대한 묘사로 돌아간다.


재벌과 선장, 모델 커플이 탄 배가 해적의 공격을 받는다. 배는 침몰하고, 살아남은 한 줌의 사람들은 태평양 (혹은 대서양) 한가운데에 있는 무인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도나 마르티노의 말을 멈춘다. 잠깐만요. 지금 우리 상황이랑 너무 비슷한 것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녀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나는 영화의 엔딩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그녀는 내게 그 이유를 묻는다. 나는 ‘그러는 편이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신의 오른쪽 검지로 내 손바닥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나는 그녀의 제스처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둔 도나 마르티노의 핸드백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준다. 도나 마르티노가 웃는다. 그리고 이번에는 1초 정도 나를 바라보아 준다.


도나 마르티노는 내가 내 비밀을 하나 말 해 주면 영화의 엔딩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15분 전까지 동정이었다고 고백한다. 관계는커녕 키스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여자 손을 잡아본 것도 집 근처 카페에서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차일 때 자리를 뜨는 그녀의 손 끝에 내 손톱이 스친 것 밖에 없었답니다.


도나 마르티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비밀이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을 포함해서 왕형제, 김형태 교수, 제프 베일린과 그 빌어먹을 침팬지 새끼까지도 알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대꾸한다. 도나 마르티노는 그런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고 응수한다.


나는 침울해진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도나 마르티노의 옆에 앉는다. 도나 마르티노는 자신의 배를 내 등에 밀착시키고, 전자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내 척추의 돌기를 하나하나 건드린다.


“동정이건 동정이지 않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시칠리아의 올리브밭에서 흙놀이를 할 무렵부터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 동정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들 중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녀의 말이 위로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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