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는 순간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누군가가 내 머리를 보고 '어?'라고 말할 때마다, 몇 년 전 어느 여름날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여름이었다.
나는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승강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옆 팀의 대머리 상무님과 그 비서님이 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건넸다.
대머리 상무님은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어?" 라며 내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너 이 녀석... 심상치 않은데?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구먼!"
별다른 주어가 없었음에도, 나를 포함해 모두들 대머리 상무님이 가리키는 것이 나의 밀도 낮은 머리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상무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옆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먹던 비서님이 상무님을 힐난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상무님. 남은 친구들이라도 앞으로 잘 지켜 나가야죠."
나는 괜찮은 척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어떠시니?"
대머리 상무님이 물었다.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대답했다.
"저에게는 한 분의 아버지. 두 분의 할아버지. 그리고 8명의 삼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머리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너 이 녀석..."
대머리 상무님은 내가 짊어진 비극적인 운명에 감동했는지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숙연해진 공기 속에서 승강기가 원하던 층에 도착했고, 우리 일행과 대머리 상무님 일행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우리는 사무실로 연결되는, 한쪽 면이 통유리창으로 된 복도를 걸었다.
여름이었지만,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으렴."
대머리 상무님이 다시 내게 말했다.
"아, 저는 약을 꾸준히 먹고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믿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상무님은 고개를 저었다.
"탈모약은... 말하자면, 논에다 뿌리는 비료 같은 거란다."
그리고 어느샌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으로 창문 너머 저 멀리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쓸쓸히 읊조리는 것이었다.
"죽은 벼에 비료를 준다고,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단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대머리 상무님 옆에 서서,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와 대머리 상무님은 나이와 직급을 넘어서 샤워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근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남자로서, 서로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했었다.
옛날 옛날, 미국의 기호학자 알로페시 헤어리스는 자신의 저서 [탈모의 역사]의 서문에 이런 말을 썼다.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모든 과제들 중, 탈모만이 의식의 태동 전에 기원하였다.
종교도, 이념도, 사랑도.
모든 문제는 탈모가 가진 무한한 역사와 치를 떨게 하는 반복성, 그리고 전 인류적 보편성 앞에서 작아진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나는 세면대 위에 떨어진 나의 곧고 연약한 털들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오늘이야말로, [탈모의 역사]의 완독에 도전해 봄직 한 날이다.
그리고 내가 맞이해야 할 운명을 담대하게 미리 맞이했던 선배님들의 삶을 찬양하리라.
물론, [탈모의 역사]를 완독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로페시 헤어리스라는 사람도 없다.
당연히,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읽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탈모만은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