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icgirl Oct 02. 2016

D100. 이스터섬, 각자의 모험 그리고 여백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이스터섬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길 위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물 불 안 가리고 아끼려고만 하다가는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꼭 생긴다. 공짜로 얻어먹거나 100원 동전 하나라도 주우면 어디선가 뭔가 그만큼 주머니를 열어야 할 일이 생기는 법. 예상치 않게 무언가를 얻었다고 좋아할 필요도, 잃었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법칙이 따라올지니.


이스터섬 비행기 티켓이 저렴하게 나왔다고 미리 덜컥 사둔 것이 문제였다. 대충 ‘이쯤이면 페루 리마에 가겠지.’ 짐작하고 날짜를 정해버렸는데, 그때의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를 얼마나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이렇게나 볼 게 많고 매력이 넘쳐 한 도시, 한 도시 떠나기가 힘겨울 줄 알았더라면 비행기 티켓을 미리 사놓고 시간에 쫓기는 일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멕시코부터 마냥 느려진 걸음 탓에 비행기 날짜는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날려버리기엔 아까운 티켓. 날짜에 맞춰보려 남미로 넘어올 때 이미 콜롬비아를 건너뛰었는데, 에콰도르 남부와 페루 북부도 다음 기회로 넘기고 리마까지 한 번에 달려야 했다.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페루 리마까지 무려 30시간에 달하는 버스 이동. 10시간 정도는 장거리도 아닌 남미에서 처음 타보는 ‘진짜 장거리’ 버스라고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편안한 좌석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창 밖으로는 황량한 사막이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머릿속에는 정신없이 맛보고 떠나온 에콰도르의 휘향찬란했던 풍광들이 선명하게 남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사막의 끝에서 신기루처럼 판자촌이 나타났다. 리마가 가까워진 것이다. 점점 사람과 건물이 많아지더니 높은 빌딩들도 제법 보이는 도시 한 복판. 자연 속에 오래 머문 탓인가, 예상보다 훨씬 크고 번화한 도시와의 만남이 어색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리마에서 우리가 필요로 한 것은 오로지 빨래. 이스터섬에 가기 전에 습도 99%의 아마존에서 찌든 옷가지를 빨아 말리는 일뿐이었다.




이스터섬, Rapa Nui, Isla de Pascua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까지 몇 날 며칠 비가 쏟아졌다더니 쨍한 태양 아래로 아직 섬을 떠나지 못한 옅은 구름 조각들이 하늘에 수를 놓고 있다. 운 좋게 찾은 호스텔은 확 트인 창 너머로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의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무조건 여기로 결정!


매일 아침과 저녁, 모아이들이 모여있는 포인트에 앉아 해가 뜨고 지는 풍경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무리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다. 햇살을 마시며 섬을 느끼고 싶으면 창 밖으로 나가 앉아있으면 그만, 바닷바람을 피하고 싶으면 안으로 들어와 창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면 될 뿐이다. 마음에 쏙 드는 넉넉한 주방에서 밥을 해 먹고 차를 마시며 시원한 바다, 무지개, 쏟아지는 별들과 은하수를 원 없이 바라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처음으로 그의 머리칼을 잘라본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그 시원한 바람 속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자르고 나니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다. 가볍게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스미는 분홍빛 하늘에 눈이 부시다. 어딘지 어수룩해진 모습에 미안해하는 나를 오히려 그가 위로해준다. 불타는 하늘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그의 미소가 참 예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찾는 이유인 모아이는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그러면서도 푸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좋다. 누군가의 형상을 본뜬 듯 무표정할 것 같은 얼굴 하나하나에도 각기 다른 표정이 담겨 있다는 점이 놀랍다. 늘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처럼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 궁금증은 사라지고 곧 하늘에 고정되는 시선. 모아이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건 바로 섬을 감싸는 바다와 하늘이다.



























여행을 떠나 온 지 100일


그동안 참 바삐 움직이느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즐겁고 행복한 여행 속에서도 우린 쉼을 찾고 있었다. 여행에도 여백은 필요한 것이었다. 언제든 여백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우리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그동안 구경도 못하던 한국인 여행자들을 리마부터 조금씩 마주치고 있다. 덕분에 귀하디 귀한 김치와 한식을 맛본다. 그들에게 우리 또한 참으로 오랜만인 한국사람들인가 보다. 익숙한 언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인지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길에서 만나는 이들의 여행담은 사실 뻔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지루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여행담을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휴가를 떠나온 만큼 자신의 여행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잘하고 있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좋을 텐데. 그럼 어디에서 무얼 하든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텐데.


이스터섬으로 향하기 전 리마에서 만난 여행자가 이스터섬 가보니 제주도 같다며, 가봐야 별 것 없다는 말을 했다. 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가며 기분을 망치려고 하는 걸까. “사랑, 내가 해보니 별 것 없더라. 할 필요 없어.” 뭐 이런 말과 비슷한 거 아닌가. 애초에 비교를 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 제주도 같으면 뭐 어때서. 오히려 이 머나먼 곳에서 제주의 느낌을 만났다면 신기한 일이 아닌가.







여행은 경험하는 각자의 것. 각자 다른 상상을 품고 떠나와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한 걸음씩 이어나가는 여정이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것을 보았다 해도 기억을 만드는 것 또한 각자의 몫이다. 다른 이의 여행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도,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인생이라는  여행도 마찬가지일 테다.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웠는가. 물리적으로 멀어진 공간에서 자유롭다한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지금만큼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웃고 한 템포 쉬어가는 여유. 각자의 여행, 각자의 취향, 각자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인생이라는 여정을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나를, 우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Live your own adventure.  

우리는 오늘도 우리만의 모험을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D93. 에콰도르에도 아마존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