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칠레
가장 길고 아픈 밤, 산 페드로 데 아따까마 (San Pedro de Atacama)
사막 한가운데 간이건물 같은 볼리비아 출입국 사무소에서 여권에 도장을 찍고 칠레 승합차에 올라타면 바로 거기부터 칠레. 여전히 같은 사막 위인데 그동안 덜컹거리던 모래길은 어디 가고, 갑자기 뻥 뚫린 아스팔트 도로 위를 씽씽 달리기 시작한다. 엉덩이가 아프지 않은 것이 어색할 만큼 갑작스럽다. 한 시간 남짓 달려 칠레의 입국 사무소에 도착하니 방긋방긋 웃으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하얀 얼굴의 직원들이 꼼꼼한 세관절차와 함께 여행자들을 반긴다.
아, 이제 진짜 칠레구나. 어쩐지 정감 없는 깔끔함에 볼리비아가 그립다. 이제 후덜덜한 물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겠지. 흑.
달리는 내내 내리막 길이 이어지더니 정말 차가운 바람은 사라지고 바짝바짝 뜨거운 바람만 불어온다. 세상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산 페드로 데 아따까마 사막이다.
칠레 물가에 잔뜩 겁을 먹고 제일 저렴한 호스텔을 예약해뒀는데 막상 찾아가려니 중심가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다. 저렴하다고 해봐야 볼리비아에서 화장실 있는 더블룸에 둘이 묵고도 남을 가격으로 비좁은 도미토리에 고개도 들 수 없는 2층 침대 신세.
심상치 않은 몸의 신호를 알아채고 쉴 생각부터 해야 하는데 아직 덜 아픈지 또 무리를 하고야 만다. 오후 늦게 출발하는 달의 계곡 투어가 있다길래 바로 예약을 하고 나서야 생각해보니 새벽부터 먹은 게 없다. 피자 한 조각을 베어 물고 내일 떠나는 산티아고행 버스표를 알아보겠다며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오전의 볼리비아와는 달리 낮은 사막에선 그늘이 없으면 타들어갈 것만 같다. 시에스타라도 있는지 터미널의 창구는 문을 연 곳이 없다. 버스표는 사지도 못하고 투어시간에 늦어버려 마구 달린다. 숨을 몰아쉬며 겨우 투어차량을 잡아 탔는데 견딜 수 없이 속이 울렁이기 시작한다.
오우, 노우! 안돼!
있는 대로 참아보지만 오늘따라 차는 또 왜 이리 흔들리는지 쉴 새 없이 구역질이 올라온다. 거대한 협곡 앞에 서지만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리고 풍경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 해맑은 얼굴들 사이에서 혼자 죽을 상을 하고 토할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 투어를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한다.
숨이 막힐 듯 답답한 8인실 도미토리. 밤새 이층 침대를 오르내리며 여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길고 괴로운 밤을 보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같은 방에 자리가 없어 그는 다른 방에 묵고 있다. 집 떠나 가장 서러운 순간은 역시 아플 때인데, 오늘은 철저히 혼자이기까지 하다.
다른 여행자들에 방해가 될까 자는 것을 포기하고 밖에 앉았다. 고산의 밤처럼 바람이 차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안경을 두고 나와 밤하늘이 희미하다. 세상에서 별을 보기 가장 좋은 사막이라던데...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 그를 깨운다. 당장 오후 버스로 산티아고에 가자고 한다. 그 몸으로 스물네 시간짜리 버스를 탈 수 있겠냐고 걱정을 한다. 언제나 사막을 만나면 심장이 두근거리며 에너지가 솟구치던 나였는데, 이번만큼은 이 건조한 공기와 텁텁한 바람을 견딜 자신이 없다. 기나긴 고산 생활 끝에 만난 반가운 사막바람이 만 하루를 꼬박 달리는 장거리 버스보다 무섭게 다가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몸이 두렵다고 말하고 있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마주치지 못한 인연은 남겨두고 다음을 기약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핑계를 남겨두었다 생각하면 마음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다시, 3월의 가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자며 버스 이동을 견딘다. 왜 페루의 장거리 버스처럼 먹을 것을 주지 않느냐며 옆에 앉은 고집불통은 나와 함께 스물네 시간을 쫄쫄 굶는다. 한참을 자다 눈을 떠보니 창 사이로 다시 촉촉한 바람이 내려앉았다.
산티아고에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10월의 가을날 시작했던 여행이 다시 가을로 돌아왔다.
3월의 가을.
낮에는 포근하고 밤에는 시원한 공기가 딱 좋다. 몸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라며 부엌 달린 아파트먼트를 빌려 쉬어가기로 한다. 다시 걸을 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한인타운. 딱 동대문시장 느낌이 나는 한인타운에서 그리웠던 식재료를 담는다. 다시 시작될 트렉킹에 대비해 산에서 해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도 꼼꼼히 살피고 또 하나의 소중한 아이템 때밀이 수건까지 챙긴다.
설날부터 그렇게나 먹고 싶던 떡국 떡을 사다가 한 그릇 만들어 먹고 나니 아픈 것이 다 나은 것만 같다. 어딜 가나 현지 음식이 입에 맞는다며 자랑했지만, 아프고 힘들면 장사 없더라. 뜨끈하고 익숙한 국물로 속을 데우는 것이 먼저다.
고산지대를 벗어나니 감자는 이전만큼 맛이 없지만 과일은 정말 심하게 달다. 달아서 먹다 지칠 만큼. 게다가 볼리비아에 없던 싱싱한 해산물이 있고, 언제 먹어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달콤한 디저트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이 거리에 넘친다. 세련된 박물관과 거대한 쇼핑몰과 아기자기 한 거리의 카페들까지. 반년 만에 세계 최첨단 도시에 온 듯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멈출 수가 없다.
여유롭다.
단지 볼리비아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도시라서가 아니다. 칠레에 와서는 바로 전 안데스의 고산 마을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다온 도시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거기나 여기나 높다란 빌딩이 늘어선 것은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살던 도시에서 찾을 수 없던 몸에 배어있는 이 자연스러운 배려와 여유는 무엇으로 설명될까.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묻어난다. 운전자는 웃으며 멈춰 서 보행자를 배려하고 자전거도 걷는 사람이 먼저다.
우연히 '기억과 인권 박물관'을 찾게 되었다. 1973년 칠레에서 일어난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와 이후 군사 독재 시절 인권이 어떻게 유린당했는지 전시되어있는 박물관이다. 아옌데 대통령과 피노체트의 생생한 육성부터 사람들의 증언과 사진 기록까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몰입해서 보고 이해할 수 있게끔 전시가 잘 되어있다. 칠레 사람들의 역사와 인권에 대한 관심에 한번 놀라고 박물관의 규모와 세련된 디자인, 깔끔한 관리 수준에 또 한 번 놀란다. 심지어 무료. 흔히 생각하는 경제나 소득 수준만으로 한 사회를 판단할 수 없겠구나 생각한다. 개개인의 사람다운 삶을 존중하고 역사를 직시하는 사회의 태도에서 나오는 투명한 여유가 부럽다.
몸이 회복되고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보자 했더니 노트북이 아파졌다. 어느 순간 피융- 소리를 내며 꺼지더니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천만다행으로 우유니 사진은 외장하드에 옮긴 직후. 노트북은 망가졌는데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노트북, 너도 그동안 아팠구나.
다음날 이동할 생각으로 사놓았던 버스표를 급히 바꾸고 주말이 지나가길 기다려 머나먼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관광객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동네까지 물어 물어 갔더니 사무실이 아니라 무슨 창고 같은 곳이다. 구글 번역기로 어렵게 대화를 이어가며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아보지만 문제가 된 부품을 중국에서 가져오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린다는 답이 돌아온다.
새삼 깨닫는다, 여긴 남미라는 걸. Y는 매년 이날을 컴퓨터 해방의 날로 선포하고 이날을 기념하며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다. 잊지 않겠다며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꽤나 충격이 컸나 보다.
한 달 동안 부품을 기다리느니 당분간 노트북 없이 아날로그 여행자가 되기로 한다.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나마 멀어지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배낭에 든 옷가지들이야 던져도 끄떡없고 젖으면 말리고 잃어버리면 다시 사면 그만인데, 잃어버리지 않을까 망가지진 않을까 조심스레 다뤄야 하는 진짜 '짐'은 언제나 노트북이나 카메라 같은 전자기기들이었다. 기록을 핑계로 들고 다니고는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것들 하나 없이 가볍게 길을 걷는 나름의 묘미가 있지 않았던가.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아무리 작고 가벼워진다한들 없는 것보다 가벼울 수 없다. 편리함이 커질수록 다른 이의 일상, 남들의 여행은 들춰보기 쉽고 개인의 취향은 희미해졌다. 예상치 못한 길 위의 만남을 기대하는 일보다 헤매지 않는 완벽한 하루의 강박을 키우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