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icgirl Nov 26. 2016

D207. 여행 제 2막, 겁 없는 로드트립의 시작

Part2.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건너는 법, 북미 로드트립_미국

시작이 반. 우리에겐 남미가 반. 


남미 이후는 계획이 없었다. 대충 1년이라고 했지만 돈이 떨어질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니, 일단 다녀보고 남는 경비 봐서 그때그때 마음 가는 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 전부였다. 비행기 티켓 때문에 미국으로 오긴 했지만 얼마나 머물고 어디를 여행할지 정해 놓은 것이 없었다. 딱히 흥미 있는 곳은 없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름이 되기 전에 더 궁금한 유럽으로 가는 게 어떨까 가늠하는 정도였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했던가. 여행 전에는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귀가 얇은 사람들인 줄 몰랐다. 어디 가면 꽤나 줏대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는데... 남미에서 여행 중 듣게 된 솔깃한 이야기 한방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캐나다의 체리 픽킹 시즌을 기다려 경비를 더 모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제 5월. 여름까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미국이나 여행해볼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렌터카 비용은 부담스럽고 숙박비도 만만치 않으니 일단 캠핑. 짐 싣기 편한 낡은 중고차를 알아보기로 했다. 


미국 로드트립은 어이없을 만큼 심드렁한 마음으로 시작되었으나 운명처럼 나타난 빠알간 랜드 크루저는 우리 마음에 다시 불을 지폈다. 오프로드 마니아인 전주인이 엄청 큰 타이어에 몸체를 마구 높여 놓은 거대한 랜드크루저를 보자마자 그가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사실 오프로드를 일부러 찾아서 달리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한 차는 아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차를 타보겠냐며. 차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던 두 사람 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넘쳐흘렀는지 “이거 오토 맞지?”라는 어이없는 질문을 날리고 덥석 중고차를 사버렸다. 


우리 참 귀도 얇고 대책 없이 패기까지 넘치는 사람들이었구나!







이제 이 18만 킬로미터를 달린 20년 된 랜드 크루저가 둘이 함께 가져보는 첫 번째 집이자 미지의 장소로 데려다 줄 우리의 마법의 양탄자! 잘 부탁해, 김치야! (감격에 겨워 이름까지 붙여줬다. 원래 이런 건 좀 촌스러워야 제 맛이라며 빨간색에 어울리는 김치)


김치를 데려오고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진행됐다. 배낭 하나씩 메고 떠돌아다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우리를 먹이고 재워줄 공간이 생겼고, 정해진 도시로 데려다주는 버스가 아닌 우리의 힘으로 길을 찾아 나서는 새로운 여행의 시작, 그리고 따뜻한 이모 식구와의 작별도 갑작스레 다가왔다. 하지만 차가 생겼으니 더 이상 신세 지고 있을 핑계가 사라졌다. 캠핑에 필요한 기본적인 장비를 갖춰 길을 서둘러 길을 떠나기로 했다. 


크나큰 미국 지도를 쓰윽 살펴보고 몇 군데 갈만한 곳을 대충 정해두고 길을 나섰다. 캠핑을 할 테니 어디든 캠핑장만 찾아 들어가면 되지 않겠어?라는 안일한 생각과 언제나 한 곳을 보고 나서야 그다음 여행지를 정해서 옮겨 다니던 배낭여행의 관성이 덕분이다. 오래된, 그리고 거대한 중고차와 호흡을 맞추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지 못했던 철없는 여행자들의 호기로움이었달까. 





겁 없는 로드트립의 시작


아, 우린 정말 겁 없이 이 여행을 시작했구나. 


길을 떠난 첫날 우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처음 운전해보는 거대한 차는 어찌나 뒤뚱거리는지 가뜩이나 긴장 잘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져갔고 새로운 시작의 설렘을 즐길 새도 없이 이모와 작별의 여운이 남아 나는 주책 맞게 보조석에 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왜 항상 뒤늦게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러는 걸까. 로드트립 기분을 내본다며 잔뜩 볼륨을 잔뜩 키워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노래와 뜨거운 태양이 무색해진다.


차는 무거워서 밟아도 속도가 나질 않고, 익숙하지 않은 mile로 표시된 거리들은 km로 환산해 가늠했는데도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시간은 예상보다 몇 배씩 더 걸렸다. 기름은 또 얼마나 많이 먹는지 계기판의 바늘이 무섭게 떨어졌다. 


목적지는 애리조나 동쪽의 뉴멕시코주 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뉴멕시코는 미국에서도 나름 지대가 높은 고산지대인데 그것도 모르고 나온 우리는 애리조나를 벗어나 뉴멕시코에 입성하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해는 산 너머로 숨어버렸는데 목적지는 가도 가도 가까워지지 않고 문틈으로 스미는 바람의 온도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애써 우리의 기분을 감추려 틀어두었던 라디오 볼륨은 점점 작아지고 낯선 도시는 무섭기까지 해서 어둠 속에서 긴장감은 더해갔다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무리고 근처 캠핑장을 겨우 찾아내 들어가려 하니 시간이 지났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어쩔  없이 캠핑장 근처에 차를 대고 자기로 했다. 첫날부터 노숙이라지만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멈춰버리지 않은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그랬다, 아무데서나 퍼져 버릴 만큼 막 나가는 차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정도의 불안을 안고 달려온 것이다. 인적 드문 사막에서 차가 고장 나 버리면 휴대폰 하나 없이 밤새 어떡하나  상상을 다하면서 서로 내색은 하지 못한 채. 


여행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어느  그는 나에게 고백했다. 사실 로드트립 첫날 속으로 절망하고 있었다고차는 무겁고 흔들리고 기름값이 우리가 하루 예산의 절반 이상을 잡아먹는  보면서 차를 잘못 샀나, 남은 여행은 어쩌나,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다만 내가 불안할까 봐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물론 훗날 그조차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준 김치는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었지만. 


아침에 애리조나를 떠나올 때만 해도 더워서 숨이 막혔는데 같은 날이 맞나 싶게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차 뒷좌석을 접고 누우면 나도 다리를 겨우   있을까 말까 한 공간. 얇은 여름 침낭 안에서 온몸의 관절이 쑤시고 아프다샤워는 커녕 화장실도 없는 레알 로드트립이 이렇게 바로 나타날 줄이야. 미국 와서 놓고 지낸 정신이 냉큼 돌아온다.


“아... 이모집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이미 600km도 넘게 달려와 놓고 부질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이모님은 나와서도 우릴 먹여주고 재워주고 계시잖아.”


차 한구석 이모가 잔뜩 싸주신 식재료를 보며 그가 말한다. 시린 머리맡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너무나 차가운 공기에 눈이 시린 건지, 따뜻한 집이 그리운 건지, 이모가 그리운 건지, 엄마가 그리운 건지 알 수가 없다. 남미를 떠나온 이후,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지만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정말 쉬운 게 없구나. 더럽고 퀴퀴해도 남미 호스텔이 백만 배 더 편했어.”







누런 산맥과 건초만 가득한 허허벌판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밤새 추위에 떨며 다리도 못 펴고 잤더니 온몸이 삐그덕거리는데, 아침부터 퉁퉁 부은 얼굴로 콧물을 훌쩍거리고 있는 서로가 하도 웃겨서 깔깔거리며 요 모양 요 꼴로 노이즈 가득한 사진을 남겼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곳에 있는데 어제의 걱정은 어디 가고 빛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안도할 수 있는지. 이제부터는 꼭 해지기 전에 뜨거운 물 나오는 캠핑장을 찾아가자고 다짐한다.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거지 뭐.




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하필이면 이런 날 새하얀 곳에 가는 건 뭐람. 국립공원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하얀 모래 세상을 만나러 간다. 






2억 5천만 년 전 바다였던 곳이 융기되고 다시 가라앉으며 남은 투명한 석고의 결정체가 바람에 날려 깨어지고 부서져서 모래가 된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우리가 너를 만나러 어제 그 고생을 해서 달려왔다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하얀 곡선 위에서 간밤의 충격이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한동안 잊고 지낸 벅찬 감정들이 다시 샘솟는다. 밤사이 하얗게 눈이 쌓인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발자국을 만드는 기분으로 아무도 없는 새하얀 언덕 위를 걷는다.




















파랑과 하양만 남은 세상 속 우리의 빨강.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시금 놀라운 세상에 우리를 데려다 준 아이,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든든한 집이다. 아침이 오고 나니 어제의 무거웠던 엔진 소리가 묵직하고 믿음직스럽게 다가온다. 자, 이제 정신 차리고 다시 김치와 호흡을 제대로 맞춰볼 시간.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낭!















매거진의 이전글 D199. 불편함이 그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