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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21. 2022

내가 되고 싶은 건

영화 <애프터 양>

"저기 봐. 구름이 산에 걸렸어."


장마가 시작되려나.

아이 학교 데려다주러 가는 길. 아파트 정문 나와 우회전하면 지하차도. 그 뒤로 산 그리메 병풍.


"그때 생각난다. 겨울에 산에 갔는데, 비 와서 엄청 몽환적이던 날."

"어, 그날 기억나. 저어 앞에 길도 안보였잖아. 막 뭐가 튀어나올 것처럼."

"그래서 <도깨비> 장면 같다고, 그 노래 들으면서 걸었잖아."

"옷 다 젖어서 막 덜덜 떨면서."

"맞아. 다 내려와서 짬뽕 먹고. 도서관 가는 길 짬뽕집에서. 그 집 짬뽕 맛있는데."


살아 꿈틀대는 기억.

숨 쉬고 살이 붙는 듯하다 어느 틈에 메마르고 홀쭉해져 뭐가 막 엉겨 붙나 싶더니 흩어지고 뭉개지다 그예 저무는. 사실에 토핑처럼 얹어지는 예감과 희망, 혹은 상상. 그 위로 뿌려지는 그날 대기 온도와 풍속, 습기, 거리에 밴 냄새, 빛 입자, 그림자 농도. 카메라 각도와 이어 붙인 장면이 달라질 때마다 다른 그림이 되고 다른 이야기가 되는 영화처럼 틀 때마다 닮은 듯 다른 풍경 다른 표정 다른 말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기억. 그러다 아주 가끔 부활하기도 하는.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뭘까? 과정과 결과 중 더 가치 있는 건? 만약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존재가 있다면, 모든 상황에서 그 존재가 인간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겉으로 봐선 인간과 테크노(안드로이드 인간), 복제인간을 구분할 수 없는 미래에도 다른 존재가 인간을 동경할 거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인간과 비인간의 가르기에 공들이는 인간. 그 애씀은 오만일까. 아니면 다른 존재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겁에서 시작된 방어의 일종일까. 내 보기엔 다른 존재가 인간을 부러워하고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괴로워할 거라고 자신하던 인간이야말로 기계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 고유의 요소를 지우고 부품 교환하듯 몸을 기계로 대체하더니 탈피하듯 썩어 문드러질 몸뚱어리에서 빠져나와 의식을 데이터로 전환해 디지털 세상에서의 영생을 꿈꾸는 인간. 그렇게 살아남은 존재는 인간일까, 기계일까? 새로이 탄생한 그 존재가 기계도 인간도 아닌 새로운 종이라면, 그 종은 개체일까, 집단일까?


몇 년 동안 토굴 같은 집에 살며 빛에 굶주린 탓에 지난겨울 이사 오면서 커튼을 달지 않았다. 단 한 개의 창문에도. 빛에 질릴 때까지 살아보자. 사생활 침해를 염려하는 이도 있었지만, 개념치 않았다. 그런 내가 거슬리는 이가 있을는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나와 나를 보는 누군가는, 괜찮다. 모든 창이 열려있어서 불편한 점이라면 매일 집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느라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 뭐, 그 정도. 처음 이사 왔을 땐 해가 앞 베란다 쪽으로 뜨더니, 지금은 뒷베란다 쪽에서 뜬다. 흐르는 계절. 요즘은 저녁 여덟 시 무렵 거실 책상에 앉아서 고개를 왼쪽으로 15도가량 들면 달이 보인다. 크고 노란 달이. 지금 이 순간도 저 달처럼, 언제고 이지러지겠지만 기억하고 싶다. 오래오래. 느티나무 잎사귀를 훑고 이제 막 시작된 여름 밤하늘로 달아나는 저 바람 소리랑 드문드문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랑 어느 집 열린 창을 타고 들려오는 아기 울음 소리랑 어느 집 식탁에 오른 옅은 된장찌개 냄새 같은. 싹 다.


존재는 기억이고 기록인 줄 알았다. 그랬을 적엔 무진장 찍고 써댔다. 누굴 위한 기록일까, 문득 든 의문. 나 혼자 보고 듣는 기억조차 꺼낼 때마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린데, 타인의 시선을 염두에 둔 기록? 당연한 찌그러짐과 덧칠. 그런 왜곡은 둘째 치고라도 기억을 다 긁어 모은들 그걸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해도 되나. 기억이 나일까. 회의는 소홀로 이어지고 곰방 시들해진 기록 행진. 걍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에 담자. 어떤 SF 드라마에선 기억을 데이터로 옮겨 영원히 가족과 소통하려던 암 환자가 기억은 자신이 아니라며, 마지막 순간 기억이 존재라는 걸 부정했다. 그렇다면, 존재는 뭘까?


아이 방 침대에 누우면 창밖으로 보이는 아까시나무랑 하늘.

"눈 떠봐. 하늘이 정말 이뻐."

아침마다 잠에 취해 눈도 못 뜨는 아이.

"눈만 떠봐."

겨우 눈을 뜨고 창밖을 보는 아이.

"이쁘지?"

파란 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아까시나무 초록 잎사귀. 새소리.

"침대에 누워서 하늘을 볼 수 있으니까 좋지? 꼭 기억해. 지금 보이는 저 하늘. 흔들리는 나뭇잎. 새소리. 언젠가 그리울 거야. 지금 이 순간, 이 저 초록이. 이 풍경이."


'애벌레에겐 끝이 나비에겐 시작이다.'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저는 괜찮아요.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게 자기한테 맞는 질문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테크노 양. '인간답다'건 '끝'이 다른 시작이라고 믿으려는 건 아닐까. 고장 나면 폐기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땅 속에서 부패하고 썩어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돌아와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끝없이 돌아오는.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존재는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믿음과 가당치도 않은 희망이 덕지덕지 붙은 볼썽사나운 미련투성이.  


수없이 반복 재생한 기억들이 빼곡히 저장된 양의 기억장치. 양은 뭘 기준으로 어떤 기억은 버리고 어떤 기억은 저장했을까. 인간인 나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그가 저장한 기억에 라벨링을 해본다면, 어떤 단어가 어울리려나.


그리움 두근거림 속삭임 물들임 엿봄 무너짐 나른함 처짐 홀림 머뭇거림 무딤 갑갑함 스침 어른거림 눈 맞춤 텅 빔 겁 축축함 저림 쓸쓸함 이지러짐 저묾 놓음 흘림 낯섦 끌림 


테크노의 기억이라기엔 너무 인간적이려나. 아니, 내가 본 양의 기억은 저 단어가 의미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적인.


암 환자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주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 처음엔 꽤나 비장하고 진지한 바람과 환상과 대비와 각오가 있었다. 지금은? 그냥 산다.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살아온 날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갈지 어떨지는 알 순 없지만, 그 순간 떠올릴 황홀한 순간이나 채집하면서. 두 눈 부릅뜨고 콧구멍 벌렁대고 두 팔 활짝 펴서 들어 올리고 두 다리는 폴짝폴짝, 싹싹 긁어모으면서.


오래전 가을, 인사동에서 노란 은행잎을 주워서 하늘로 던지던 다섯 살 아이 웃음소리. 작은 어깨 위로 부서지던 가을 햇살. 유치원 버스 기다리다 그 자리에 쪼그려 앉을 때 길바닥에 닿을락 말락 하던 작은 엉덩이. 물 냄새 맡으며 걷던 강둑에서 이어폰 나눠 끼고 듣던 비투비 노래 멜로디. 팔뚝 위로 스치던 후덥지근한 여름밤공기. 와글와글 달려들던 모기떼. 모자를 날릴 정도로 강한 겨울바람에 마른 나뭇잎을 이리저리 쓸고 다니며 파도소리를 들려주던 숲길. 그 길 위로 비스듬히 내리던 늦은 오후 햇살. 오후 4시면 어김없이 아파트 단지에 울리는 두부 트럭 종소리. 자고 있는 아이 발을 괜히 쓸어주던 새벽녘, 창밖으로 보이던 푸르스름한 빛. 어젯밤, 유튜브에서 우연히 들은 15년 전 어느 방송에 나와 말하는 그 애 목소리. 매듭짓듯 유달리 어미에 힘주어 말하던. 집에서 혼자 앓던 저녁, 방바닥으로 스멀스멀 번져가던 어둠. 학교 앞에 아이를 내려주고 집으로 달릴 때 차창 위로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른 아침 햇살. 가로수 그림자. 교복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들. 나풀거리는 머리칼. 저 푸름.


지난 일주일 사이 양을 세 번 만났다. 처음 만나고 온 날 쉬이 잠들지 못해 다음날, 또 만나러 갔다. 가장 떨린 건 세 번째 만남. 양을 몇 번이나 더 만나야 하려나. 그걸 잘 모르겠어서.


내가 되고 싶은 건 양의 기억장치 안에 거의 다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도 양을 만난다. 그때 그 유월만큼 자주는 아니어도.


이 글이, 꼬박, 2년 전 글이구나.

이때, 이 유월에 시작되었구나…. 이 모든 게.

오늘, 다시, 이 글을, 발행해서, 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지없이.


(왜 갑자기 오래전 글을 다시, 발행하나 궁금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까닭은 다음 주 목요일 자연스럽게….)



2022년 집 근처 도서관


2021년 여름, 대학로 학림다방


2024년 6월 19일, 땅바닥에다 나무로 꽃으로 詩를 쓰는 원예가 정영선 할매가 만들어놓은, 지난 몇 해 내가 제집 드나든 병원 울음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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