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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11. 2024

바람등에 올라탄 검은 새 한 마리
-영화<애프터 양>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동상이몽 제작일지 #06

말년의 찰스 부코스키가 한 말. 나야 뭐 고통이라면 이골이 난 놈 아닌가. 종류 안 가리고. 곧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난 그게 참 낯설게 느껴진다. 난 이기적인 놈이라 그저 글을 계속 더 쓰고 싶을 뿐이다. 어쩜, 딱 나네. 원래도 돈이나 권력, 사회적 지위엔 관심도 흥미도 없었지만, 아프고 나서는 아예 그쪽이랑은 등진 것도 모자라 살림이고 가족이고 죄 내팽개치고 눈을 떠도 감아도 쓸 궁리만 하는. 집안꼴이 어떤지 냉장고에 뭐가 들었는지 누가 들어왔다 나가는지도 모르고 낮이고 밤이고 돈도 쌀도 되지 않는 글이나 써재끼는. 그는 또 말했지. 지금 내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나 자신이다. 소설가 최진영이 어느 당선소감에선가 한 말. 사방이 나로 빼곡하다. … 전 썼어요. 난, 나를 사랑하려고 써. 그게 날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 쓸쓸하고 고독해도. 쓰기의 씁쓸한 단내. 불빛도 온기도 없는 검은 밤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바람등에 올라탄 검은 새 한 마리.*


맞아요.

동선 작가님 말마따나 우린 말 많은 공산당이에요. 거기에다 못 말리는 나르시시트. 그러니까 우린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말 많은 공산당. 혼자 있어도 심심할 겨를 없는, 혼자서도 충만한. 동선 작가님은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216쪽)에 썼어요. 인지장애가 올 정도로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도 외롭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만화책들과 영화만 있으면 평생 혼자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었죠. 저 어릴 적 엄마가 맨날 하던 소리. 넌 책이랑 음악만 있으면 살 애야.


휘리릭 써서, 휙휙 던진! 아, 몰랑. 퇴고를 하면 할수록 줄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하던…. 귀신이 곡할 퇴고. 아이고…!


이야기라면 환장했어요. 오랜 투병이 남긴 건 영화랑 책. 그리고 징글맞게 써댄 글나부랭이. 그러고 보니, 온통 다 이야기. 꼴랑 그것뿐이고, 그것뿐이라 깡총, 좋았어요. 암 진단받고 번거롭고 거추장스럽던 일상에서 손을 떼자 문득, 든 허기. 결혼하고 출산과 육아로 채워지지 못한 허기에 휘청였어요. 그 오랜 목마름과 굶주림에 사방팔방 싸돌아 댕겼어요. 허겁지겁. 매일밤 종아리에 쥐가 나 베개에 머릴 묻고 도리질을 해가면서. 아침에 눈 뜨면 숲에 들어섰다 낮엔 사람들 틈에서, 그리고 홀로 책을 읽고 밤이면 누워서 영화를 봤어요. 까무룩 눈이 감길 때까지. 그리고 그 모든 걸 썼어요. 꾸욱꾸욱, 소상히. 그렇게 몇 년을. 그때 저는, 저를 막을 수 없었어요. 따라가기에도 급급해서. 다시, 찰스 부코스키의 말.


그 무엇도 한 인간의 글쓰기를 멈춰 세울 순 없다.

그 인간 스스로 멈춘다면 몰라도.

한 인간이 진실로 글을 쓰길 원한다면

그는 결국 쓸 거다.

거절과 조롱은 그를 강하게 만들 따름이다.

그리고 오래 막으면 막을수록

그는 더 강해질 거다.

엄청나게 불어나 댐을 무너뜨리는 격류처럼.


찰스 부코스키식으로 말하면, 그때 저는 격류에 떠내려가고 있었어요. 악몽인 듯, 시달린 어떤 꿈. 허물을 벗고 다른 존재가 되어 여기가 아닌 다른 땅에 닿고 싶어.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한 뜀박질. 그 숨참. 탈피에의 충동.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형벌이 기꺼운 죄수. 불빛도 온기도 없는 검은 밤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바람등에 올라탄 검은 새 한 마리.*

말 많은 나르시시트 공산당인 것도 모자라 하루에 수십 번도 더 감정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저는 도망치기 선수예요. 저도 이런 제가 감당 안 될 적이 하 많아 타인은 오죽할까 싶어 함께 글 쓰기 전에 동선 작가님한테 언질을 줬어요. 중간중간 찡찡거리고 말없이 사라져도 그러려니, 하시라. 우웩, 한바탕 글 토악질 하고 나면 말짱해지니, 한 귀로 흘려들어달라. (다시 한번, 고마워요, 동선 작가님. 토라지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거기, 있어 줘서.)

늘 문 앞에서 서성였어요. 문고리를 잡지도 놓치고 못하고, 서성서성. 문이 열릴라치면 냅다 달아나면서. 바닥을 밟을 엄두가, 민낯을 볼 용기가 없어서 그랬는가. 그랬던 제가 이 자리, 여기 서 있을 수 있는 건 다 동선 작가님 덕분이에요. 찡찡거리는 저를 끌고 고갯마루 넘어주고, 어느 날 제가 사라져 뵈지 않으면 한 마리 새가 되어 암말 않고 전깃줄 위에 앉아 기다려준. 대학 시절 함께 보낸 연극부 선배가 이제 와 하는 말. 넌 잡히지 않는 애였어. 책 나오기 전, 선배만 만났다 하면 도망가고 싶다고 징징댔어요. 그럴 때마다 선배가 한 말. 5분마다 전화한다니까, 그때처럼. 가긴 어딜 가, 버텨!


동선 작가님이랑 영화 보고 글만 쓴 건 아니에요. 틈틈이 책도 함께 읽고 길진 않아도 사회적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드문드문 얘길 나눴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최진영의 ≪구의 증명≫과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 최진영의 ≪구의 증명≫을 함께 읽은 그 밤은 잊지 못해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처음으로 집 나가 밤을 꼴딱 지새운 날이라. 딸이랑 싸우고.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책은 소설가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세컨드 윈드' '두 번째 바람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2023년 6월 16일, 동선 작가님한테 쓴 글

2023년 유월 즈음, 공기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어요. 그 어떤 근거도 없이, 막연히. 그 어떤 징후도 없이, 그냥. 피부를 핥는 바람이 만져지는  바람 냄새가 났어요. 흙이랑 풀 내음 옴팡 달라붙은. 곧 내 삶이 꺾이겠네. 결이 달라지겠어. 매듭을 짓겠구나. 싫지 않던 그때 그 두근거림. 쿠웅, 쿠웅, 쿠웅, 쿠웅. 먼 데서 들리는 낮은 북소리.


예감처럼, 태양이 머리 위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던 7월 어느 날, 회기역에서 만났어요. 두 번째 바람을. 30여 년 전, 문리대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와 도망치던 절 따라와 어깨를 낚아채고는 깔딱 고개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치던 차은우 선배. "알을 깨고 나오라고!" 그날 그 푸르면서도 붉던 저녁 하늘과 초록 내 짙은 오월의 깔딱 고개를 지금도 기억해요. 알을 깨고 나오라고 소리치던 선배 목소리도, 그 눈빛도. 그리고 제 어깨에 남은 손아귀 힘도. 동선 작가랑 함께 글을 쓰는 건 시간의 방향을 트는 일이었어요. 어쩌면… 어쩌면, 지금 이 매거진도.


그렇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마지막 순간에 이르고 그들은 그 순간을 한번 더 경험한다. 그리고 놀란다. 이토록 놀랍고 설레며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만났던 것인가?

-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지난 글에서 동선 작가님은 '인생 영화'에 대해 말했어요. 지난겨울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정대건 작가와 함께하는 영화 토론에 갔더랬어요. 그때 이야기 주제는 '나의 인생 영화'. 토론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름만 대면 기가 팍 죽는 영화감독의 작품을 말했어요. 저요? 팔랑귀에 금사빠인 저는 인생 영화가 맨날 갱신하는지라… 가장 최근에 본 영화를 말했어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동선 작가님이랑 말을 트고 가까와질 무렵 제 '인생 영화'는 영화 <애프터 양>. 그때 저는 3일 내리 낮엔 <애프터 양>을, 밤엔 <콜럼버스>를 보면서 흥분 상태였어요. 막 사랑에 빠진 양, 부풀 대로 부푼 설렘 한 다라. 그 두 영화가 같은 감독(코고나다)이 만든 영화인 줄은 새까맣게 모르고. 제 기억이 맞다면, 그 얘길 동선 작가님한테 막 퍼붓다 가까와졌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저는 그때보다 더 독한 사랑에 빠졌어요. 그런 것 같아요. 3일이 아니라 평생 함께할 사랑을 드디어 만난 양, 설렘 치사량에 숨이 꼴까닥 넘어갈 지경이거든요. 어떻게 그리 장담하냐구요? 이 사랑은… 절 고대로 베낀 판박이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몽땅 똑닮. 찌찌뽕투성이. 보고 있으면 두 눈이 가느스름해지면서 쏴아 쏴아, 몰려오는 그리움. 바라보기만 해도 뚝뚝, 듣는 눈물. … 그래요.


뭐든 늦된 저는 이제야 알을 깨고 나왔어요.

저어기, 들려요. 바람 부는 소리가.

저는, 또, 바람등에 올라탈지도 모르겠어요.

촉이 와요.


불빛도 온기도 없는 검은 밤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바람등에 올라탄 검은 새 한 마리.*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여름이.


글제목과 '*'는 김복희 시인의 시 ≪잃기≫를 변주했어요. 그림은 영화 <라라랜드>를 그린≪영화처럼 산다면야≫의 표지가 될 뻔한 동선 작가님 그림이고요. 보자마자 홀딱 반한 검푸른 빛!


<더 숲>에서 동선 작가님을 처음 만날 날, 왜 울었냐구요? 동선 작가님이 대머리여서…? 설마 하니 그랬을라구여. … 그랬을라나? 설마. 대답은 노래로 대신하고 동선 작가님이랑 제가 아무도 못 찾게 저 바다 깊은 곳에 빠뜨린 '영화' 건져 올리러, 저는 이만.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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