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야 뭐가 됐든, 장소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시절이든… 한 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선 적.
… 저는 있어요.
처음 동선 작가님 글을 읽고 냅다 도망쳤다고 했잖아요. 글이 전문적이라 저랑 놀 상대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다 어느 날, 유난히 반짝이는 '좋아요'를 따라가 보니 그때 내뺐던 그 방. 어랏, 하고 읽은 <행복하게 늙어간다는 것>.
동선, <행복하게 늙어간다는 것> 중에서
작년 여름, 대학 선배가 한 영화 수업을 들었더랬어요. 그때 수업하다 말고 선배가 한 말. 이연 씨는 뭐에 빠지면 엄청 집중하는 스타일인가 봐요? 네. 저는 그런 사람이더라고요. 그러니 퍼질러 앉아 설렐 일 없다는 동선 작가님 붙들고 저는 이렇게 설렐 일이 많은데 왜애 설레지 않냐며 수다를…. 사람 놀리는 것두 아니고.
가까와진 건 코고나다 감독 때문이지만, 그보다 먼저 동선 작가님이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보고 있었더라는. 이런 기억의 오류!
출간 얘기가 오고 갈 무렵 분량이 넘치는 바람에 (으이그, 말 많은 공산당!) 눈물을 머금고 아무도 찾지 못하게 저 바다 깊이 빠뜨린 영화는 정말 아낀, 그렇게 버려선 안 되는 영화들이었어요. 싹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영화 만듦새를 떠나서 저희 두 사람의 손때와 눈물 콧물이 진득하게 배고 덕지덕지 묻은 영화라. 그 시간과 풍경이. 그때 바다에 빠뜨린 영화 중에 동선 작가님이 고른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있어요. 제가 홀딱 반한.
얼마 전, '전 지금입니다!'라고 한, 강백호 동선 작가님!
그때 제가 쓴 초고를 살짝.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원더풀 라이프> 얘길 하면서 제 인생 하이라이트가 언제냐고 물었죠. 케케묵은 과거를 허구한 날 털어대는 통에 머릿속이 매양 안개 낀 듯 뿌얘도 돌아가고픈 어느 한 시절이 없어요. 희한하게. 그런 걸 보면 저는 과거지향적인 게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거나 현실 추구형일지도요. 어쩌면.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는 내내 저승에 가져갈 ‘딱 한 장면’ 고르기에 고심하기보단 ‘딱 한 사람’을 찾겠다고 낑낑댔어요. 그러다 제 기억 속 파일엔 사람들이 계절별로 저장되어 있단 걸 알았어요. 만나고 떠난 시점과 무관하게 저마다의 계절로. 봄의 사람들, 여름의 사람들, 가을 겨울의 사람들. 계절을 타는 제겐 지금 이 계절이, 이 계절을 함께 지나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지 않나….
“어쩜 이렇게 생생하게…?”
과거 얘길 할 때면 종종 듣는 말. 질문인지 감탄사인지 모호한. 어떻게 그렇게 생생할까…. 그거야 뭐. 떠난 적 없이 거기 살다시피 했으니. 쭉. 제 영혼의 고향, 회기동. 아무리 좋아도 그리움과 회귀 본능은 별개라 도돌이표처럼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어요. 지난여름, 일본에서 3년 만에 귀국한 대학 후배랑 학교에 갔어요. 며칠 쏟아지던 물 폭탄이 멈추고 모처럼 갠 하늘. 버스에 타서 하늘이랑 구름을 보려는데, 버스 유리창에 이런 광고 문구가.
‘남들의 시선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지! - 너만의 찬란한 물보라를 일으켜봐!’
투명 스티커에 쓰인 그 글자들 뒤로 파란 하늘이랑 하얀 뭉게구름이 보이는데,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읽고 또 읽었어요.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지열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 시절을 더듬다가 문득. 목매게 그리웠으면서 왜 그렇게 피해 다녔을까? 그 시절을 마주 볼 엄두가 왜 나질 않았을까? 와봤자 달라질 게 없어서? 그래 봐야 지지리 궁상으로 살 게 뻔해서? 괜히 허파에 바람만 들어갈까 봐? 그럼 내가 그리워한 건 대체 뭘까…. 찬란한 물보라? 타인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던 배짱?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무엇?
바람. 그래요, 바람이었어요. 바람은 꼭 거기가 아니라도 어디서든 언제라도 불어오니, 굳이. 문제는 바람을 일으킬 동력인데…. 내게 그럴 힘이 남았나? 의심하다 절망하고. 설령 남았대도 현실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할까 갑갑해서… 도망쳤어요. 그러다 암이래서. 얼마 못 산다니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갔어요.
그 여름 인 바람이 지금도 불어요. 제 안에서. 위잉 위잉.
제 인생 하이라이트요? 지금!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숲을 걷고 책 읽고 영화 보고 글 쓰고 노을 보는, 지금. 이거면 됐지, 여기서 더 뭘 바라요. 제 안에서 일어난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숨 쉬고 있는 한 제 인생 하이라이트는 매일 갱신 중. 지금!'(이연,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초고 중에서)
맞아요. 그리움과 회귀는 별개예요. 회기동을, 그 시절을 그리워해놓고도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독할 정도로. 겁났나 봐요. 다시, 돌아가고 싶을 게 뻔한데, 그런 저를 막지 못하면 어쩌나. 죽음 뒤에 꺼질 세상 모든 등. 그 시커먼 암흑에 잡아먹히기 전에 가자. 스무 살 적 맨날 앉던 노천에 앉아 두 눈을 감았어요, 그때처럼. 눈두덩이 위에서 노니는 햇살…에 터진 노란 그리움. 가만가만 곁에 와 앉은 스무 살 나. 너, 알았어? 30년 뒤에, 아픈 몸으로 여기 와 앉아 있을 줄?
지독한 수줍음. 그 낯가림에 피해 다닌 빛, 이목(耳目). 빛이 닿지 않는, 비켜간 자리만 골라서, 요리조리. 모든 이가 내 글을 읽었으면 했다가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 했다는 리베카 솔닛처럼, 아무한테도 띄지 않았으면 했다가 누군가한테는 띄었으면 했다가. 공공연한 비밀. 나만 비추고 나만 따라다니는 내밀한 눈길. 그 빛이 그린 유일한 그림자. 쭈뼛거리고 머뭇댈 때마다 한 속엣말. 무대 위보다 무대 뒤나 아래가 좋아. 그 어둠이.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다시, 노천에 앉은 그날. 오래전 그때처럼 달아나지 말고 바람이 불면 냉큼, 올라타자. 초조하고 다급하게 서둘지 말고. 언제가 될진 몰라도… 인 바람에 일어날 나만의 찬란한 물보라를 그리며.
그러다,그때 그 골목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는 소리에 무너져 내렸어요. 제 오랜 은사님이 아끼던 제자들이 툭툭, 지던 그 가을, 은사님이 한 말. 왜 이렇게 가을이 기니…. 길고 긴 그가을 지나 흰 겨울. 시들한 봄이 오고 가고 반가운 여름이. 그런데도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일어날 수가. 글은 쓰고 있는데, 글다운 글은 한 자도 못 쓰고, 내 울기만. 온 세상 흰 설움 빨아들인 커다란 솜뭉치. 그때 절 가장 아프게 한 말. 죽은 사람 중에 너 아는 사람 있어? 사람은요, 아니, 저는요, 모르는 죽음에도, 가여운 모든 떠남에 엎어지는 그런 사람인가 봐요. 철퍼덕. 그렇게 오래 엎디어 있는, 있어야 하는. 울음이 멈출 때까지. 슬픔이 가실 때까지. 구겨진 마음이 싹, 펴질 때까지. 꺾인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갈 때까지. 제가 그러고 있는 동안, 혼자 일어날 때까지, 곁에 있어준 동선 작가님. … 잊을 수 없어요. 그때 들리던 그 숨소리, 그 목소리, 그 마음. …… 그래서 먹은 마음. 동선 작가님이 하자면, 다 할 거야. 뭐든. (그래서 이 매거진도. 하길, 참 잘했다는!)
오래오래 영화 이바구하면서 늙어가자. 어디로든, 어떻게든!
고여 있지 않고 돌아보면서 나아가는 사람, 동선 작가님. 제 오랜 엎딤 사이사이, 동선 작가님이랑 함께 넘은 투병 고갯마루. 2년 가까이 복용한 입랜스에 내성이 생겨 갈아탄 엉덩이 주사 파슬로덱스. 두어 번 맞고는 효과 없어 갈아탄 경구용 항암제 젤로다. (현재 23차 복용 중.) 그 모든 고갯마루 마다 동선 작가님이.(다시, 또, 고마워요, 동선 작가님.) 저, 지금도 항암 치료 중인 말기 암 환자예요. 말하는 나도 지겨운데, 듣는 사람은 오죽할까 싶어 삼킨 말. 운동은 안 해? 왜 그렇게 누워만 있어? 아직도 아퍼? …… 대답하기도 안 하기도 뭣한 물음, 물음들. 어느 늦은 밤, 주점. 아프냐고 묻는 대학 선배 눈앞에 쫙 펼쳐 내민 양 손바닥. 마디마디 갈리지고 찢긴. 선배 두 눈에 곰방 차오른 물기. 얼른 감싸 쥔 내 두 뺨. 그러게 왜 물어. 그딴 걸 왜 묻냐구!
어쩌면 저보다 제 아픔을 더 잘, 더 많이 아는… 동선 작가님. 늘 놀라고 배워요.
더 욕망하라. 여한 없다....그러니 슬퍼마라.
얌전한 모범생인 줄 알았더만 아프고 나서 걸신들린 듯 써대더니 급기야 책까지 낸 저한테 언젠가 은사님이 한 말. 너 이렇게 욕망덩어리였어? 작년 봄인가, 블로그에 쓴 '여한 없이'라는 글에 동선 작가님이 단 댓글. 지금보다 더 욕망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여한 없다는 말 하시면 슬퍼진단 말이에요.
냅다 튀었다 홀린 듯 다시, 동선 작가님 방에 돌아간 날을 잊을 수 없어요. 어? 이 분, 그때 그분 맞나? 그날 어쩌면 저는 동선 작가님 방으로만 돌아간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래전 제가 두고 도망친 어떤 시절로도 돌아가지 않았나. 거기 두고 온 '나'한테. 미치게 그리워해놓고도 돌아갈 수 없던, 가지 못해 설웁던 시절, 못 다 부려놓은 '나'한테로. 고요해질 대로 고요해져, 한없이 고요해… 여한 같은 거 없는 줄 알았어요.아니었나 봐요. 여한… 남았나 봐요. 다시, 올라탄 젊음의 열차 멈추는 그날까지 한 자라도 더, 슬럼프마저 찌찌뽕인 동선 작가님이랑 한 마디라도 더, 그런… 여한.
슬럼프마저 찌찌뽕인 동선작가님이랑 열차가 멈추는 그 날, 그 순간까지, 미치괭이로!
동선 작가님이 농땡이 부리고 자알 놀다 삐쳐서 문 쾅 닫고 들어가면 저 혼자라두 열심히 밭 갈고 피 뽑고 김 매고 물 대면서… 그럴라구여. 그때 그 가을, 철퍼덕 엎어진 저한테 동선 작가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듬해 여름까지, 꼼짝 않고.
그리움이든 회귀든 귀향이든 귀환이든
그걸 뭐라고 부르든… 저는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갔어요.
거기서 만났어요. 잃었던 저를. 핏기 가신 얼굴을.
저승에 가져갈 딱 한 장면은… 지금.
바람 지고 비 머금은 자리 메운 매미울음소리 들리는 책상에 앉아 끄적이는, 이 여름 아침.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여름이.
덧
글제목은 한강 작가의 시 <서시>에서 인용했어요. 그림은 동선 작가님이 그리고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에 실린, 영화 <시>를 재해석한 포스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