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뭐든 다 되는 세상에서 제 목구멍으로 넘길 밥 한 술 벌지 못해 남의 피땀눈물 빨아먹는 기생충.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접쓰레기. 어둔 말귀에 눈치코치 실종자.
기나긴 채비 끝에 모험 떠난 우리 책…
몇 해전 시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만난, 일 년이면 한두 번 얼굴 볼까 말까 한 울 오라버니. 장례식장 구석탱이에서 고개 처박고 책 읽던 막냇동생이랑 조카들 불러내한다는 소리. 야, 니들 엄만 평생 한량이었어. 생뚱맞은 그 말에 터진 웃음보. 흐흐흐. 낄낄낄. 끄덕끄덕. 어느 밤, 대학 선배가 한 말. 소설을 써. 왜? 숨을 수 있잖아. 왜 숨어야 하는데? 선배, 내가 뭘 몰라서 그런가. 글은 한 줄을 써도 티가 나던데. 그짓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여기를 치지 않아. 제아무리 필력이 뛰어나고 문체가 아름다워도 그짓말은 여기, 가슴을 울리지 않어. 어떤 글을 쓰든, 쓰기로 맘먹었으면 글 뒤에 숨지 않을래, 난.
모순적이다, 이기적이다, 떠벌이다, 욕망덩어리다, 허세작렬이다.
예전의 저라면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아니라구,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죽일 듯 미워도 웃는 낯으로 날 변호하느라 속 끓였을 거예요. 글은 참 희한해요. 쓰고 쓰고 또 썼더니 보여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민낯이. 자글자글 주름에 깨알 기미, 처진 피부, 푸른 실핏줄. 드글드글 욕망 소굴과 스멀스멀 피어오르나 싶더니 그예 터진 질투 화산, 닦아낼수록 번지는 분노 곰팡이, 벼리고 벼린 앙심 칼날, 터질 듯 부푼 응어리 풍선, 치솟는 자기혐오 분수. 두 손 두 발 들고 포기한 변호질. 그 모든 못남을 끄덕임. 그래. 나, 이런 사람이야. 평생 시달린 적도 없던 더부룩함이 사악, 사라지더니 휘감아 도는 박하향.
진료실 의자에 앉자마자 날아드는 의사 물음. 이연 님, 이번엔 어떠셨나요? ……. 달싹이기만 하고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 더 궁금한 건 없으시고요? ……. 아는 게 없으니, 딱히 물어볼 것도. 당신은 당신을 얼마나 알고 있나요? 당신 몸을, 당신 아픔을, 당신 고통을. 당신은… 당신 마음을 그림 그리듯 훤히 설명할 수 있나요? 척 보면, 딱 알게. 임상 시험할 적에 매번 작성한 설문지. 매 질문마다 1점에서 10점 중 체크해야 하는 설문지를 앞에 두고 길 잃은 아이처럼 헤맨 그 시간. 지금 내 몸은 몇 점일까? 내 마음은? 모르는데…… 정말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대강 하긴 싫구. 어느 날인가. 내 딴엔 솔직하게 체크해서 건넨 설문지에 놀란 임상 간호사가 한 말. 이연 님. 괜찮아 보였는데, 이렇게 우울하세요? 그다음부턴 나도 모르게 낮은 숫자에. 진료할 적마다 의사가 묻던 말. 수술 부위는 좀 어떠세요? 그때마다 대답 대신 한 속엣말. … 본 적 없어요. 안 봐서 모른다구요. 수술하고부터 생긴 버릇. 화장실 들어가면서도, 옷 갈아입으면서도 켜지 않는 전등 스위치, 등진 거울. 수술하고 제대로 본 적 없고, 만진 적 없는 수술 부위. 당신은 당신 몸을 얼마나 자세히 들여다보나요? 웃을 때 얼굴 주름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모양으로 잡히는지, 뱃살은 어제보다 얼마나 더 나오고 들어갔는지, 쳐지고 접히는지. 종아리 근육은 몇 그램이나 늘고 줄었는지, 팔뚝 둘레는 몇 센티나 굵어지고 가늘어졌는지. 흰 머리칼은 어디에 몇 가닥이 빠지고 새로 났는지… 알고 있나요? 통증이 1에서 10이라고 하면, 지금 당신 통증은 어디에 해당하는지, 그 증상은 언제 어느 부위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할 수 있나요? 마음은요? …… 의사 물음에 대꾸하려면 봐야 했어요. 제 몸을, 제 마음을. 그래서 섰어요, 거울 앞에. 환하게 불을 켜고. 어색함과 낯섦, 그 적막을 가르는 소리. 찰칵찰칵. 아, 내 눈이, 코가, 뺨이, 입술이, 가슴이, 허벅지가, 배꼽이… 이렇게 생겼구나. 맨날맨날 찍었어요. 달라지는 저를. 제 몸을. 맨날맨날 썼어요. 달라지는 저를. 제 마음을. 그렇게 저란 사람을 알아갔어요.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디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어떤 마음인지. 어디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모든 숨과 무늬를. 미세한 떨림을.
골목에서 쓰러진 사람들에 휩쓸려 같이 쓰러진 그때 그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그 오랜 엎딤. 손발이 꽁꽁 묶인 것 같았어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어떤 말이 나올 것도 같은데, 누구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 말이,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꾸자꾸만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피가, 온몸 구석구석 돌아야 할 피가 싹, 빠져나간 것처럼, 기운이 없었어요. 동선 작가님한테 뭐라도 하자고, 이렇게 가만있을 거냐고 큰소리 뻥뻥 쳐놓고는 막상 목소릴 내려니…… 아는 게 쥐뿔도 없더라고요. 여기, 가슴이 갑갑해서 터질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런 허세덩어리! 동선 작가님한테 말했어요. 공부 좀 하고 오겠다고. 똑똑해져서 돌아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울 오라버니가 평생 한량으로 놀구 먹었대도 무슨 소리냐구 대들지 않을 정도로 공부라곤 해본 적 없는 제가, 정말, 빡시게, 공부했어요. 손이 벌벌 떨리게 열이 나도 약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고 쓰릴 속 달래줄 약봉지 가방에 챙겨서 공부하러 갔어요. 남편이 코로나에 걸려 강의 빠진 댔더니 당장 마스크 쓰고 오라는 대학 선배 호통에 빨딱 일어나 달려가서 책상에 착, 앉아 공부했어요. 미친 듯 읽고 쫓아다녔더니 …… 부메랑 되어 돌아온 오래전 앓음과 시름. 글이 뭐지? 어떻게 쓰는 거야? 뭘 써야 해? 어떤 글이 잘 쓴 거고, 어떤 글이 좋은 거야? 수문을 연 댐처럼 왁왁, 뿜어져 나오는 글에 쩔쩔매면서도 이 글을 죄 세상에 내놔도 되나? 일기 나부랭이 같은 이런 글을? 거르지도 않구? 글의 노출과 세상의 요구, 또 사람들 욕구 사이에서 길어진 엎딤. 출구 없는 터널에 갇혀.
동선 작가님이랑 수다 떨면서 자주 말한 영화 <인생 후르츠>의 슈이치 할아버지랑 히데코 할머니. 수다를 떨기 시작할 무렵 본 영화라 그런가. 원고 곳곳에 카메오로 등장할 정도로 좋아한 츠바타 노부부. 글 쓰다 서로 지쳐 보인다 싶으면 주고받은 토닥임, 차근차근 천천히! 그 말은 바로 이 영화에… 애정하고 애정한 배우 키키 키린의 목소리로.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영화 <인생 후르츠> 중에서)
나는 전적으로 느낌.
쓰면서 알았어요. 난 느낌, 전적으로 느낌. 더는 밀치지 않고 끌어안은 미침에 툭, 터진 해방감. 그예 깨진 알. 오랜 엎딤 끝에 든 고개. 확 트인 시야 너머로 보인 나만의 방식. 나다운 쓰기. 아니 에르노의 쓰기에서, 두 번째바람 몰고 온 선배가 어느 날 보낸 톡에서. 조앤 디디온, 알어? 이름만, 읽어보진 않았어. 읽어봐. 어. 얼마 뒤, 술자리에서 만취한 선배가 한 말. 니 글 읽는데, 조앤 디디온 생각났어. 왜? 닮았어, 너랑. …. 계속 써. 어. 날 보던 그 눈빛. 선배랑 헤어지고 돌아와 새벽녘까지 떨군 눈물. 거기까지 닿지 못해도 … 못 할테지만, 걸어나 가보자. 뚜벅뚜벅. 타박타박. 차근차근 천천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원작 소설 <헛간, 불태우다>를 쓴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은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고뇌와 땀으로 쓴 작품에 준 거라며 인간 마음을 힘주어 말해요. 진정으로 고뇌하고 땀 흘릴 가치는 거기에 있다면서. 시인을 꿈꾸다 소설가가 된그는 또 말해요. 작가의 임무이자 특권은 '견뎌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라고. 시인의 목소리는 단순히 인간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버팀목이나 기둥 같은 목소리가 돼야 한다고. 기록을 벗어난,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나 기둥이 되는 글.
언젠가, 동선 작가님이 보낸.
(어디까지 읽었는가는 몰라도) <영화처럼 산다면야>를 읽고 어떤 이가 쓴 글. 지금 들리는 현실을 외면하고 꽃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지 말자. 책을 가까이한다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젤 많이 들은 말. 문학소녀. 문학은 그렇다 치고, 참 듣기 싫었던 '소녀'. 그 단어에서 풍기는 코스모스 같은 야리야리함, 순수함, 투명함, 몽롱함에 대한 태생적 밀침. 커서는, 이쁘게 쓰지 마라. 아프고는, 아픈 얘기 고만 써라. 대학 시절 얘기 좀 할라치면, 남자 좀 그만 밝혀라. 이번엔 꽃타령하는 시인? 동선 작가님이 언젠가 제 글에 대한 느낌을 말한 적 있어요. … 울었어요. 아, 이 분은 아는구나. 내가 마냥 이쁘고 아름답게 쓰지 않는단 걸. 뭘 말하려는지. 글 속에 숨긴 게 뭔지. 그걸 읽는 눈이, 읽으려는 마음이 있구나. 놀람과 기쁨. 그리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김진해 교수님 추천사 받던 날. 쌓인 줄도 몰랐던 설움에 통곡한.
'이를 위해 이 두 사람이 택한 전략은 기억입니다. 망각이 편할 텐데, 기억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이 우주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책임감마저 느껴집니다. 놓치지 않으려는 기억, 곱씹어 단물이 배어나는 기억, 삶의 실마리. 그 기억은 그저 낭만적인 추억이거나 넋두리가 아닙니다. 글 속에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나고 입에 씹히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맡은 냄새, 감촉, 맛, 그리고 타인과의 인연이 어떻게 삶과 닿아 있고 삶을 밀고 나가는 힘이자 변곡점이 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줍니다.' (김진해 교수 추천사 <어떻게든, 넘어가겠죠> 중에서.)
한 개인 또한 그의 서사를 기억해야 한다…
김소연 시인이 어느 시에 쓴 문장. 나는 나대로 회상을 한다. 더 많이 기억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으면 추억조차 시들어 생명이 다해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저는 썼어요. 국가가 한 나라의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면, 한 개인 또한 그의 서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상흔이 됐든 영광이 됐든 상실이 됐든, 되새김질해야 한다고. 그러한 몸짓이 청승이나 주책, 혹은 감성 나부랭이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질 수 없는 게 한 개인의 삶이고, 되새김질을 통해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얼마 전, 동선 작가님한테 한 물음. 작가님의 고유시는 언제예요? … 아직 모르겠어요, 솔직히. 애매한 그 말이 어쩐지 맞다, 싶었어요. 사람은 끝없이 변하는 존재라. 당신은 어때요? 당신의 고유시는 언제인가요?
'과연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인가, 아니면 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나 자신인가. 지금껏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 익힌 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아니면 다만 그러기를 바라기만 할 것인가. 적어도 이번이 그걸 알아내는 기회가 되겠지' (윌리엄 포크너, <버베나 향기> 중에서.)
저는 썼어요. 나의 고유시(固有時)는 읽고 쓰고, 글과 함께 있는 시간. 그때 내 얼굴, 내 의식. 글과 함께 있을 때 고유시라던 나는,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에 가까운가? 글 뒤에 숨지 않겠다던 나는 지금 그러고 있나? 한 톨의 숨김도 없이? 옳은 일을 하는 거랑 그러고 있는 날 보는, 즉 타자화된 날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같은 걸까, 다른 걸까?
'영화에서 파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얽히는 공간 중 하나일 뿐인 것처럼, 성남의 직업 역시 그의 인간적인 콤플렉스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거죠. 다른 홍상수 영화에서처럼 <밤과 낮>에서 예술가 성남 역시 그냥 발정 난 개자식으로 나오는데, 옛 연인의 부고를 접한 후 오열하고, 외도 후에 성당에서 참회하고, 팔씨름을 이기고 나서 통쾌해하는 등 귀여운 졸렬함을 보여주기도 해요. 저는 그게 홍상수 감독이 말하고 싶어 하는 현대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선,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에서)
글을 떠나서, '작가'는 뭘까요? 어떤 사람을 그리 부르나요? '작가'는 의사나 변호사처럼 직업군에 속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인가요? 아니면, 쓰는 행위, 그러니까 쓰는 사람을 부르는 단어인가요?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되나요? 등단이나 출간, 돈벌이, 인지도, 경력, 재능, 꾸준함, 열정… 그런 게 '작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그런 건 누가 정하고 언제까지 유효한가요? '으쓱함'과 '추켜세움'을 주고받는 단어, '작가'. 아니 에르노는 그 단어보단 '쓰는 사람'을 선호했다죠. 동선 작가님한테 같이 쓰자면서 그런 얘길 했더랬어요. 비평은 이미 차고 넘치니 우리만의 이야길 하자. 그즈음 해석이나 분석 같은 난도질에 진력이 났던 것 같아요. 해부하듯 헤집고 들쑤시고 모두가 희생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고 모두 지는 글에. 브런치 작가 중에 좋아하고 스승으로 여기는 사하 작가님이 언젠가 쓴 글. 보자기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기는. 울었어요. 그 이쁜 마음에. 아무도 다치지 않는, 품에 안고도 이기는 글. 제가 쓰고 싶은 글은, 캐도 캐도 자꾸자꾸만 딸려 나오는 고구마줄기 같은,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품은 글. 읽을 때마다 다른 맛, 다른 향이 나는. 저한테 그럴 능력이 있으면,있다면, 쓰고 싶어요, 그런… 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곳곳에 박아둔 글. 독주처럼 쓰디쓴 글. 왜냐면, 읽기도 떠먹여 주는 읽기에서 한 걸음 나가길 바라서. 글더미에 숨은 원석 찾아내 나만의 보석으로 다듬는 읽기로. 독주처럼 쓴 질문 오래 머금다 삼키는 읽기로. 행간 오솔길에서 헤메고 문장 담장 더듬다 그 너머 엿보는 읽기로. 한 인간의 고뇌와 땀방울 훔치는 읽기로.
평생 한량인 저처럼 돈벌이엔 관심 없고 맨 쓸데없는 짓에만 몰두한 슈이츠 할아버지가 미울 만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볼수록 잘 생겼다며 웃는 히데코 할머니에 갸우뚱해지는 고개. '히데코'라고 적은 노란 팻말을 체리 나무 앞에 박고는 내 인생 최고의 여자 친구라며 수줍게 웃는 아흔 살 슈이치 할아버지랑 살면서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됐다는 그녀, 히데코 할머니. 그의 받아줌과 응원, 눈길 덕에. 그렇게 60년을 같이 살고도 식탁 위치 하나 딱딱 못 맞추는 이 노부부가 정말 부러웠던 건 자신들이 살고 싶은 삶이 어떤 삶인지 알았고, 그 앎을 실천해서. 여태 그랬듯, 저는, 쭈욱, 똥덩어리로, 살려고요. 츠바타 부부처럼, 끈기로운 어리석음으로. 차근차근 천천히!
눈만 뜨면 우웩 토하듯 써재끼는 저한테 언젠가 은사님이 한 말.
혹시 아니. 하수구에서 연꽃이 필지.
지금 들리는 현실 외면하고 꽃타령한다고 누가 그러던데,
혹시 또 아나요.
똥덩어리 거름 삼아 꽃이 필지.
전쟁 중에도 어딘가엔 꽃이 피지 않았을까요.
어디엔가는 피어야 하지 않나요.
몸이야 소름 돋게 정직하든 말든, 탐험가의 두근거림으로!
동선 작가님이랑 영화 보고 글 쓰는 건 신나고 재밌기도 했지만, 배움이고 자람이었어요. 그뿐인가요. 모험이라면 질색이었는데 좋은 친구(善友), 동선 작가님 덕에 슬슬 모험이 재미있어지려고 해요. 쫄깃한 두근거림과 짱짱한 긴장감. 내내 관찰자였던 저는 탐험가로 기우는 중이에요, 차근차근 천천히!
이 여름 다시, 바람등에 올라탄 검은 새가 된 저는 심장이 뜯겨 나갈 것 같아요. 이는 바람에.
'연구를 해야 해요. 어떻게 해서든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 연구를. 맨날 밥 먹고 그 연구를.'
(영화 <죽어도 좋아!> 중에서)
'오래 살수록 인생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영화 <인생 후르츠> 중에서)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여름이.
덧
글 제목은 김소연 시인의 시 <칠월>에서 인용했어요. 그림은 동선 작가님이 그리고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에 실린, 영화 <죽어도 좋아!>를 재해석한 포스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