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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22. 2024

그대의 여름날은 시들지 않으리
- 영화 <애프터 썬>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동상이몽 제작일지 #18

골목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단 소리에 넘어졌어요. 사람들이? 골목에서? 왜?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고… 죽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길이 막힌 것도 아니구…. 오랜 엎딤. 납작하게 눌린 어둔 마음 조준하던 글빛이 있었어요. 아니 에르노의 벼린, 조앤 디디온의 시린. 그 빛을 쪼이다 동선 작가님한테 한 말. 글을 쓰는, 쓸 수 있는 곳이 제겐 고향이고 영혼의 안식처예요. 그곳이 어디든, 저는 거기서 자유로워서.


자유. 사람들은 자주 그 말을 하고 꿈꿔요. 그래 보여요. 당신은 어때요? 지금 자유롭나요?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간 그러길 바라나요? 근데, 자유가 뭐죠? 사람들이 말하고 꿈꾸는, 당신이 누리려는 자유는 뭐고, 어떤 상태예요? 자유가 행복인가요? 자유로우면 행복할까요? 마냥 기쁘기만? 언제 어디서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모양과 색이 달라질 단어 성질. 전… 모르겠어요. 자유, 자유… 노랠 부르며 안달하다가도 막상 손안에 자유가 떨어지면 손사래 치며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사람들이 하 많아서. 당연하고 놀랍게도.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자유보단 몸에 익은 적당한 구속을, 알맞은 통제를, 까끌거리지 않고 부들부들한 질서를 원해요. 분리와 배척, 감금과 보호의 울타리를. 투명하고 번쩍이는 철창 속 질질 끌리는 행색을. … 저라고 다를까요.


무더운 여름날, 개집, 그리고 사슬에 묶인 개 한 마리.

불과 몇 발자국 건너,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사슬이 너무 짧아 도저히 닿질 못한다.

이 그림에 한 가지 항목을 덧붙여보자.

훨씬 더 길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우리의 사슬,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칠 수 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사슬>)


어쩌면 책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빨간약일지도 몰라요. (동선, <영화처럼 산다면야>)


고백 하나 할까요? 책도 그렇지만, 동선 작가님이랑 수다 떨면서 쓰고 글을 매만진 그 시간, 모은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그 모든 과정이 저한텐 빨간약이었어요. 가을인지 겨울인지, 천지분간  못하구  여름으로 달려가는 땡깡쟁이 뒷덜미 낚아채 시뻘겋게 물들인. (안즉도 사람될라믄 멀었다고요? 눼이눼이.)



동선 작가님  읽고 블로그 뒤져보니 영화 <밤과낮>은 7 꼭지, 영화 <박쥐>는 11 꼭지. 영화 <밤과낮> 초고 제목이 '개 같아져요!'가 아닌 것 같은데 지워버렸는지 안 보이더라고요. (나름 미니멀리스트라.) 영화 <박쥐> 꼭지 제목은 '우주는 카오스'에서 '우주는 무질서', 그리고 '우주는 혼돈'으로. (이래서 제목이 중요하다고들. 흑. 그야말로 카오스와 무질서, 혼돈 속을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고.) 저를 끝까지 애먹인 홍상수 감독이랑 박찬욱 감독. 왜 이렇게나 그들 영화에 매달리고 허우적거렸을까. 그거야 뭣보다 애정하는 감독들이라 …는 눈속임이고, 겁났어요. 다 들통날까. 이렇게 고치고 저렇게 고쳐도 성에 차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빤히 보이는 거짓말 거짓말. 뻔지르르한 문장과 미끈거리는 미사여구에 다른 사람은 깜빡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저는 알잖아요. 제가 가짜라는 거, 허접쓰레기라는 거, 속이 텅텅 빈 깡통이라는 거. 원고를 읽은 대학 선배가 한 말. 레퍼런스가 많아서 산만해. 알어, 나두…. 풀 죽을 새도 없이 흐읍흐읍, 숨 가다듬고 꺼낸 빨간약. 읽고 읽고 또 읽고. 숨지 말자, 더는.


저는 이날까지 제가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골방을 나와보니, 아니대요. 어떤 빛깔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회색은 아니더라는. 난 무슨 색일까. 요즘 저는… 편파적이고 싶어요. 어떤 무리엔 무조건적으로 편들고 싶어요.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볼 수 없는 이들의 눈이 되어주고 만질 수 없는 이들이 손이 되어주고…. 나한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는 몰라도, 자꾸만 기울어요. 한쪽으로 쏟아지는 마음. 어쩌면 이창동 감독님도 그런 마음을 어쩌지 못해 영화 <시>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편을 들려면 내가 어떤 빛깔인지,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지, 먼저 알아야겠더라고요. 모르겠다… 그 뒤에 숨으면 안 되겠다. 먼저 세상을, 사람을 읽는 눈을 키워야겠구나. 그래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되고 눈이 되고 손이 되지 않겠나. 나의 무지와 비겁함을 깨닫게 해 준 '자각약'과도 같았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동선 님과 나눈 이야기.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에서)


골백 번도 더 도진 고질병, 도망질. 혼자라면 진즉에 내뺐어요. 여기, 이 자리에 제가 서 있는 건 저 먼 데서 보고 있는 동선 작가님, 그 가만한 눈길이 있었기에. 저를 눈 뜨게 하고 일으켜 걷게 한. 다시, 고마워요, 동선 작가님. 그리고 또 한 사람. 무섭다고, 다 고만두고 달아날 거라고 징징댈 적마다 글쟁이 숙명이라고, 버티라며 이따금 불러내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 기울여준 은우 선배. 또, 고마워, 선배.


지금은 이름도 바꾸고 글을 몽땅 지운 캐나다 사는 작가님. 보랏빛 라벤더 좋아한댔더니 농장서 사다가 목걸이에 제 이름 적어 걸어놓고 저인양 가꾼. 그분이 한국 나와 울 집 옆에 있는 요양원을 매일 들락거리고도 제가 거기 있는 줄 몰라 만나지 못한 적이 있어요. 출국을 며칠 앞두고서야 그분이 한국에 있단걸, 그것도 울 집 옆에 있는 요양원을 매일 들락거리다시피 했단걸, 병원 가는 길, 한강 다리 건너다 알았어요. 이른 아침 출근길 꽉 막힌 다리 위에서 느리게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처음 듣는 목소리에 반가움보다 더 크게 밀려온 서운함에 나, 거기 옆에 사는데. 바로 옆에 있었는데요. 미안해, 작가님.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출국하기 전까지 꼭 붙어있고만 싶었어요. … 한시도 떨어지지 않구. 그렇게 작가님 떠나보내고 서운함 달래고 있는데,



동선 작가님을 <더 숲>에서 처음 만난 날, 함께 본 영화 <애프터 썬>. 보는 내 가슴이 저려 붉어진 눈시울 들킬까 애먹은 저랑 달리 메말랐던 동선 작가님 눈가. 그럴 일이 아닌 알면서도서먹서먹. 새벽녘 침대맡에 걸터 앉은 영화 속 젊디 젊은 아버지. 온전히 탁, 내려놓지 못한 구부정한 그 푸른 등이 오래 어른거려 동선 작가님이 캐나다로 돌아가고 글을 썼더랬어요. 그걸 읽고 동선 작가님이 한 말. 왜 자꾸 사람을 울리고 그래요. 동선 작가님 눈물에 떠내려간 그날 그 서먹함.





"잘 지내요, 이젠 제가 구하러 갈 수 없으니까요."


언제쯤이면 우린 누군가를 구하러 달려가지 않아도 될까요. 그런 달음박질을 그만 둘 날이 오긴 하려나요. 저와 당신과 우리의 안녕을,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듯, 저는 썼어요. 봄날은 와요. … 올 거예요, 언제고. 온 세상 사람들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봄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정면보다 괜스레 더 끌리던 옆태랑 뒤태. 저 앞에 걸어가는 누군가를, 그 걸음걸이를 뚫어져라. 요새 들어 부쩍. 그러다 문득, 저기 걸어가는 저 사람은 어느 쪽 신발 밑창이 더 닳았을까. 걷는 모양새를 보니, 왼쪽 같네. 아닌가, 오른쪽인가? 저 이는 언제부터 저렇게 걸었을까. 자기 걸음걸이가 어떤지 저 이는 알까. 그렇게 멀어지는 등을, 멀어져가는 발걸음을 가만가만 봐요.  왜인지는 몰라도.


아파트 정문 나와 인도 옆 방음벽 따라 주욱 심어져 있는 사철나무 아래 피어나는 야생화랑 풀떼기. 나만의 정원.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쓰다듬는. 꽃에도 표정이 있고 옆태 뒤태가 있어 제각각 다른 얘길 들려주는데 알고 있나요? 정영선 원예가 이야길 다룬 영화 <땅에 쓰는 시>를 혼자 보러 간 날, 어둔 극장 맨 뒷자리에 앉아 끅끅, 울음을 삼키다 빵 터진 웃음. 집 나설 때 꽃한테 일일이 인사하고 손 흔드는 장면에서. 안녕! 안녕! 나갔다 올게! 나, 간다! 사람보다 꽃이랑 나무랑 있을 때 벙그러지는 표정이며 수다스러운 게 꼭 저를 보는 것 같아서. 안녕! 잘 있었어? 고새 많이 컸네? 에구, 넌 왜 이러고 있냐? 이러면 좀 편한가? 어때?


출간을 앞두고 책 제목 정할 즈음 '여름'에 꽂혀있었어요. 대표님이랑 동선 작가님한테 청춘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는 사무엘 올만의 시(詩)를 적어 보낼 정도로.


                                                                                   

죄 탈락하고 한 글자 바꾸고 살아남아 낙관의 영광까지 거머쥔 '동像이夢'!



아프고는 시작도 끝도, '여름'이었어서. 그런데 가만 보니, 아프기 전에도 그랬더라구요. 삶의 마디를 뚫고 지난 계절은 어쩜 하나같이 '여름'. 그때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두 분한테 적어 보낸 사무엘 올만의 시(詩) <청춘>은 이렇게 끝나요.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아, 시들지 않으려면 희망의 물결을 머리 높이 들고 붙잡아야 하는구나. 명리학에서 청춘을 뜻하는 계절은 여름. 인생 주기로 치면 가을이나 겨울이라 모든 걸 떨구고 슬슬 떠날 채비해야 마땅한 나이. 간당간당 벼랑 끝 목숨이니 더 그래야 하는데 이를 어쩌나요. 제 목숨 야금야금 땅따먹기한 암세포 덕에 죄 뒤죽박죽 엉켜버려 파릇파릇 싹이 돋더니 초록 무성한 여름 다시, 여름 한철이니.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초록 내 후끈한, 이글거리는 태양 째려보는, 좍좍 긋는 빗줄기 벌거숭이로 맞고 섰는 바람등에 올라타고 시리고 푸른 어둠 향해 날아가는 검은 새 한 마리.


허구한 날 들은 물음. 타박인 듯 의심인 듯, 모호한. 어쩜 그렇게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해? 연연함과 게으름을 나무라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아요. 넌 참 한가하구나. 그렇게 과거나 곱씹고 있게. 우리는 먹고 사느라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그거, 알아요? 기억도 되새김이 필요한 거?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흐릿해지고 뭉개져 시들시들. 존재는 뭘까요? 당신은 뭐로 이루어졌나요? 저는 기억이 싱싱하길 바라요. 시듦은… 서글퍼요. 뭐든. 그래서 저는 자주 돌아가요. 그때 거기로. 그리고 겪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질겅질겅. 그때 그 풍경을, 그 소리를, 그 냄새를, 그 사람을. 그때 나를, 내가 사랑한 모든  그때 그 여름, 여름날이 시들지 않게. 질겅질겅.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질겅질겅. 허구한 날, 질겅질겅. 틈만 나면, 질겅질겅. 짬을 내서, 질겅질겅.


책 나올 즈음이었나. 밥 먹으러 나가는 길에 온 친애하는 공저자님의 제안. 반갑고도 반가운!


처음엔 홍보성 글인줄 알구…그랬더니 혼자라두 쓰겠다는… 공저자님. 맘 약해지게스리.

 

그래서 한 발 슬쩍. 그랬다가…


동선 작가님이 하자면 토 달지 않고 무조건, 콜!


동선 작가님이 이 매거진 하자구 할 때만해도 썩 내키지 않았어요. 지금은요? 글 분량 보믄, 누가 더 좋아하는지 딱 답이 나오지 않나요? (공산당 아니랄까 봐.) <영화처럼 산다면야> 작업 과정을 돌아보는 이 매거진도 쓰다 보니 되새김질. 질겅질겅, 단물이 단물이. 질겅질겅, 얼마나 맛있는지.


쓰고 쓰고 또 쓰고.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밑바닥에 철컥, 닿으니 그제야 보였어요. 딸내미 골려먹는 게 인생 낙인, 웃는 딸내미 얼굴 보는 재미로 사는, 건들건들 히죽히죽, 세상 중요할 것도 심각할 것도 없어 뵈는 영화 <토니 에드만> 속 아버지 쏙 빼닮은 울 아부지가. 커다랗고 노옵다란 털북숭이 탈 뒤집어쓰고 있어서 안 보이던, 저 바다 깊은 연니처럼 무르고도 무른 울 아부지 속살이.


쓰고 쓰고 또 쓰고.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밑바닥에 철컥, 닿고 나서야 알았어요. 움트기 전엔 알아차리지 못하는 씨앗이, 그런 욕망도 있단 걸. 뭐든 늦된 저라서, 이 나이가 되어서야 보고 알아챈, 그 모든.


'1차 수정', '2차 수정', '3차 수정', '5차 잔못질', '잔잔못질', '잔잔잔못질', '마지막 못질', '누가 좀 말려줘요'… 징글맞게 쓰고 쓰고 또 쓰고 청승맞게 울고 울고 또 울고. 터진 울음에 드러누웠다 벌떡 일어나 쓰고 쓰고 또 쓰고. 드러누웠다 또, 벌떡 일어나 다시 쓰고 쓰고 또 쓰고. 꽃이 피고 지는 줄도 모르고, 봄이 왔다 가는 줄도 모르고, 울며불며, 부둥켜안은 울 아부지 속살. 놓치고 잃은 줄도 몰랐던 핏기 가신 내 손에 쥐어진 말라비틀어진 씨앗 한 톨.


니 인생 살어.

이제야 말 들어서 미안해, 아부지.


'1차 수정', '2차 수정', '3차 수정', '5차 잔못질', '잔잔못질', '잔잔잔못질', '마지막 못질', '누가 좀 말려줘요'… 그렇게 불 싸지르고 숯검댕이 되어 내 누운, 유월. 멍한, 칠월.


쩔쩔 끓어오르던 여름 한복판.

다시, 바람등에 올라타고 시리고 푸른 어둠 향해 날아가는 검은 새 한 마리.


아픔이 몰고 온 광풍에 휩쓸려 뜯어지는 가슴 부여잡고 예까지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고, 흘러갈, 내 여름, 여름날. 단 하루도 가슴 뛰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단 하루도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단 하루도 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단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단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고… 모든 날이 환희로웠고 고통범벅이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어쩌면 이게 자유가 아닐는지. 이 환희가, 이 고통이. 그 무엇하고도 바꾸고 싶지 않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오르가슴. 꼴딱, 숨 넘어가게.


"수영 못하는 전갈이 물살이 센 강을 건너려고 개구리에게 등에 좀 태워달라고 했어. 개구리는 '넌 전갈이라 분명 독침으로 날 찌를 거고, 그럼 우리 둘 다 죽게 돼'하면서 거절해. 전갈은 '절대 안 찌를 테니, 제발 좀 태워줘'하고 사정했어. 결국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우고 헤엄치며 강을 건너는데, 강 중간쯤에서 전갈은 독침으로 개구리를 찔러 버려. 개구리는 울면서 전갈한테 말해. '우리 둘 다 죽게 되는지 뻔히 알잖아! 근데 대체 왜 날 찌른 거야?' 전갈은 거센 물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에게 울면서 말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독침으로 찌르는 게, 그게 내 천성이라!'" (영화 <크라잉 게임> 중에서)


제 빨간약이자 자각약인 동선 작가님은 영상 만지고 있을 때 고유시(固有時)에 젤 가까워진대요. 당신의 고유시((固有時)는 언제인가요? 언제 젤 당신에 가까워지나요? 혹은 자유롭다고 느끼나요? 고향 품에 안긴 듯. ''하나가 다른 하나를 오려내어 만든 듯'*, 분명 둘인데 하나인 양 고유시(固有時)에 닿을 듯 만났어요. … 그런 적이 있었어요. 우주의 셈법으로야 찰나일망정 온전한 기쁨이었던 그때 그 여름빛. 두 번 다시없을. 마지막 돌아갈 곳은 거기라고, 그 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마음먹음. … 이제야 보여요. 삐죽, 의심의 싹이. 흐물거리고 흐느적거리는 믿음이. 울지 않아요. 씩씩해졌거든요. 여문 마음. 뒤늦게 발견한 천성, 내 고유시(固有時)는 쓰기. 고향 같은 그 품에 안기어.


어느 늦여름, 산에서 내려오는데 저어기, 정자에 굽은 등허리가 똑 울 아부지. 아부지! 수그린 고갤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는 아부지. 한달음에 달려가, 어떻게 왔어? 빙글빙글. 여기까지 혼자 왔어? 끄덕끄덕. 엄마는? 빙글빙글.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아부지 만났냐며, 미장원 가면서 아부지한테 돈 줬으니 삼계탕 먹으라구. 삼계탕? 오늘 말복이잖어. 아…. 아부지, 엄마가 돈 줬어? 끄덕끄덕. 나랑 삼계탕 먹으라구? 끄덕끄덕. 가자, 아부지. 엉거주춤 일어서는 아부지. 냉큼 잡은 아부지 팔. 종종종종. 쫓아가기 힘들어 숨차던, 성큼성큼 아부지 걸음이 이제 막 걸음마 뗀 돌쟁이마냥, 아슬아슬 위태위태. 뻐근해져 오는 가슴께에 슬쩍, 아부지 뒤로. 활처럼 휜 아부지 등허리. 기어이, 왈칵. 머리칼은 언제 또 저렇게 빠졌대…. 조심해, 아부지! 빙글빙글. 천천히 가. 꽈악. 잡은 손에 힘을. 빙글빙글.


맨날 니 인생 살라고 잔소리한 울 아부지 고유시(固有時)는 언제였을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있긴 했으려나. 우리 삼 남매 키우느라.


아부지, 고유시(固有時)는 언제야? 언제였어?



언제나 서성였어요. 문밖에서. 열리길 기다렸나, 싶으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외려 열리면 어쩌나, 두려웠다는 게 더 맞을지도. 벌컥, 열리기라도 하면 이번엔 또 무슨 핑계를 대고 도망치나…. 아닌 척 굴었지만, 쩨쩨했어요. 마땅히 잘하는 것도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대단한 뭐라도 있는 양 기웃기웃. 그랬으니 멀찍이 떨어져 뚫어져라 보고만. 문 안쪽 사람들을 힐끔거리고 들락거리는 이들을 이죽거리기나 하면서. 이젠 알아요. 문이 열리려면 먼저 닫혀야 한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바람등에 올라타고 시리고 푸른 어둠향해 날아가는 검은 새 한 마리.

언젠가 막 내릴, 내리고 말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여름이.



초록잎 사이로 숨은 보랏빛 칡꽃



글 제목은 영화 <노매드랜드>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에서 인용했어요. 그림은 출판기념회를 맞아 동선 작가님이 만들어준 영화 <토니 에드만> 포스터를 변주한 스티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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