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단단한 단어도 앞에 '잡'을 가져다 놓으면확, 풀어진달까. 대야 가득 방금 받아 놓은 물에 똑 떨어진 물감 한 방울 닮은, '잡'. 실처럼 멍처럼 풀어지고 번지는 말간 긴장. 맥이 풀리거나 어수선한 거랑은 다른. 별 볼일 없고 쓸모없어 봬도 찬찬히 뜯어보면 보이는 잔근육. 온 데 다 헤집으며 벌떡벌떡 돋고 솟는, 그 생명력.
떠밀림이었어요. 쓰기와 함께한 날들은. 그래서 좋고 싫다는 게 아니라 그저 그랬다…는. 의지가 생기기도 전에, 감정이 따라붙을 새도 없이, 밀쳐내기엔 뻑뻑한, 무섭긴 해도 내빼고 싶진 않은, 묘한 끌림. 확, 잡혔다 어느 순간 퍽, 떠밀린.
글쓰기를 배운 적 없어요. 글이 뭔지 문학이 뭔지 몰라요. 그냥 막, 터져 나오는 걸 받아쓰기에도 급급해서 이제라도 배워보지 않겠냐… 성가셨어요. 공부고 책이고 나발이고 우왁우왁, 끓어 넘치는 저걸 죄 부려놓고만, 그러기만 해도, 눈 감기 전에 그러기나 했으면…. 문학이요? 예술이요? 그게 뭔지도 모르거니와 그딴 게 저랑 뭔 상관이래요. 딱 하나. 한 마리 짐승마냥 미쳐 날뛰는 제 눈길 닿고 피 쏠리는 걸 쓰자. 볼품없고 사소하고 쓰잘데기 없어 저물고 녹슬고 이지러지고 뭉개지고 쓸리고 밀쳐지는… 어떤. 삐딱하고 투박하게. 실핏줄처럼, 피딱지처럼. 이성복 시인 말처럼, '나'이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
'글쓰기가 날 어디로 데려가는지 따라가 보고 싶다.'
처음 쓰기 시작할 무렵, 저를 매어둔 밧줄.
달아나고 싶을 적마다 꺼내어 다시, 그러매고 그러맨. 꽁꽁.
'그해 여름에 날씨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여름이었는지 세 번째였는지 아니면 마지막 여름이었는지, 프란츠와 내가 단 한 번의 여름만을 함께했는지 아니면 어러 번의 여름을 함께 보냈는지, 혹시 사계절의 변화조차도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나는 말할 수 없다. 프란츠와 함께했던 시간은 내게 있어서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 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시간으로 남았고, 나는 그 이후로 바람이 통하는 어떤 공의 내부에서 살듯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중에서)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 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바람 통하는 어떤 공 안에, 저는, 있어요. … 있었고, 있고, 있을 거예요. 내내. 당신과 함께했고, 당신 떠나고, 떠난 당신 오래 돌아오지 않은, 그 시간, 그 자리에. 모든 사이, 사이와.
영화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책담회가 열리는 그날 그 자리엔 목소리가, 귀 기울임이, 등불이, 먼 데서 오는 발자국이, 설고도 반가운 뺨이, 빤한 눈빛이, 그리고 창문 하나가. 엿보고 들을 수 있는 우물 같은. 지구의 심장과 맞닿은, 푸른빛 친절을 향해 열린, 밤의 향기로 가득한, 한낮의 뜨거운 태양빛 초대하는.*
'사랑 없인 살 수 없어요.'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중에서)
나는 당신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 포루그 파로흐자드
나는 당신 때문에 죽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는 나의 생명
당신은 나와 함께 가고 있었다
당신은 내 안에서 노래하고
내가 거리를
정처 없이 걸을 때
당신은 나와 함께 가고 있었다
당신은 내 안에서 노래하고
당신은 느릅나무 한가운데에서 사랑에 빠진 참새들을
창문의 아침으로 초대하곤 했다
밤이 반복되고 있을 때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은 느릅나무 한가운데에서 사랑에 빠진 참새들을
창문의 아침으로 초대하곤 했다
당신은 우리의 골목으로 등불들을 가지고 왔다
당신은 등불들을 가지고
아이들이 떠났을 때
아카시아 꽃들이 잠들 때
그리고 내가 거울 속에 홀로 남겨질 때
당신은 등불을 가지고 왔다
당신은 두 손을 선물했다
당신은 두 눈을 선물했다
당신은 친절을 선물했다
내가 굶주릴 때
당신은 생명을 선물했다
아낌없이 주는 빛처럼
당신은 튤립을 꺾어
내 머리에 꽂아 주었다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흩날려 불안해졌을 때
당신은 튤립을 꺾었다
당신은 자신의 뺨을 눌렀다
내 가슴의 불안 때문에
내가 또다시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고 말하면
내 가슴의 불안 때문에
당신은 두 뺨을 눌렀다
그리고 당신은 귀 기울였다
울면서 흐르고 있던 내 피에
울면서 죽어 가고 있던 내 사랑에
당신은 귀 기울였다
하지만 나를 보지 않았다
'숨 쉬며 느끼는 나무가 되고 싶어.'
(영화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중에서)
바람등에 올라타고 시리고 푸른 어둠 향해 날아가는 검은 새 한 마리.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여름이.
덧
글 제목과 '*'는 이란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의 시(詩), <선물>에서 인용, 변주했어요. 그림은 동선 작가님이 출판기념회 전시를 위해 새로이 그린 영화책 <영화처럼 산다면야>에 수록된 영화 <업> 포스터고요. 아래 사진은여름날, 숲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