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갓난 아가로 눈을 뜹니다. 새 세상, 새 날, 새 공기, 새 하늘, 새 구름, 새 햇살, 새 바람…… 온갖 새 것에 둘러싸여 기쁨 젖은 속눈썹으로. 그렇게 태어난 저는 매일 밤 허름한 노파가 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걸 받아들고 빨아들이고 맛보고 온 힘을 다해 더듬느라 몸도 맘도 탈탈 털려 관에 기들어가듯 몸을 누이며 내일은 어떤 날이, 어떤 세상이 펼쳐지고 어떤 일이 벌어질까,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눈꺼풀을 덮습니다.
그런 저도 지칠 적이 있습니다.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고, 코딱지만큼도 힘이 없어 눈꺼풀조차 밀어 올리지 못할 때가. … 요 며칠, 그랬습니다. 아슬아슬 감정의 꼭짓점을 걷는 양, 기쁨의 꼭짓점, 슬픔의 꼭짓점, 설움의 꼭짓점, 삐침의 꼭짓점, 어거지의 꼭짓점, 울분의 꼭짓점, 치졸의 꼭짓점, 응어리의 꼭짓점… 무수한 감정의 꼭짓점이 저를 휘갈기고 질질 끌고 다니고 납작 들어 올렸다 패대기치고…… 뱅뱅, 어지러웠습니다. 감정의 덤불에 갇혀 멍들었습니다. 울긋불긋. 언제나처럼 느낄 뿐, 그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하나 해석할 수도,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어서 언어의 늪지대를 배회하기만.
어젠 하루 평균 열댓 명 들락거리면 많다 싶은 제 블로그에 어쩐 일로 방문자가 폭발한 데다 조회수도 깜짝 놀라게 많아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굳게 잠긴 빗장을 슬금슬금 풀어서그랬는지. 그런데 왜인지 그 몰려듦이 쌀쌀해진 날씨에 불가로 모여든 움츠린어느 정겨운 한 풍경을 불러왔습니다. 인간이 그어놓은 모든 작대기를 지우고 한자리에 모인 오래전 어떤 이의 시(詩) 속 둥그런 그림자를. 낮고 자그마하고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와 대상에게 파고들어 너울너울 흘렀을 불빛과 허공에 떠오르며 반짝였을 불티와 그 자릴 떠나오고도 새겨졌을 어떤 온기 자국 같은. 동그랗게 퍼져나갔을 따스함, 혹은 깊게 패였을 어떤 열기 같은.
얼마 전 폴폴 작가님과 동선 작가님이랑 새로이 떠난 모험,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에 두 번째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여기, 당신들 마음엔 어떤 이야기가 들어왔을까요.
저는 다, 좋았습니다.
고백하자면, 동선 작가님이 애써 편집한 이 녹음본을 처음 듣던 검푸른 새벽녘엔 좀 짰습니다. 그간 저희 세 사람이 함께 지나온 그 모든 계절이, 그때 우리 표정이 검푸른 어둠을 뚫고 덮치며 손에 만져질 듯, 귀에 고여 드는 폴폴 작가님과 동선 작가님 목소리가… 참, 좋아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물론이고요. 우에다 쇼지 사진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폴폴 작가님 목소리엔 어느 봄날 그 전시공간 밖 담벼락에 핀 라일락이 딸려왔습니다. 그 봄, 위태하고도 무성한 그 보랏빛 향기가. 동선 작가님을 재즈로 이끈 만화 <블루 자이언트>는 영화를 보고 며칠 OST를 들으며 보내서 그런지 동선 작가님 목소리에 훅, 빨려 들어갔습니다. 우에다 쇼지를 말하면서 폴폴 작가님이 그랬습니다. 어디 대단한 곳에 가지 않아도 내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예술은 탄생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제가 오래 흠모해온 백석의 시(詩)처럼요.
요즘 저를 살게 하는 힘은, 이 모닥불입니다.
이 불가 가까이 다가온 당신, 당신이 내민 손짓과 마음자락, 우리 함께 들이쉬고 내쉰 숨, 그 숨소리 사이로 어른대고, … 댈 여기 당신, 당신들과 쬔 시간.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