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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영화 <토니 타키타니>

by 여름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다지.


눈이 오지게도 오던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마음이 열린다는 절에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웃음소리에 나뭇가지 위 눈더미가 포닥포닥, 은총처럼 가루가 되어 반짝였다. 그 절에서 젤 유명하다는 청벚꽃 대신 자그마한 연못 뒤로 나란한 대나무, 그 댓잎 흔들어대던 푸른 바람이 좋아 절마당에 내려앉는 오후볕을 끼고 한참 노닐다 길섶에서 곧고 굵은 나뭇가지 하나 주워 들고 발끝만 보고 내려왔다.


내년 봄에 다시 오자. 청벚꽃 필 때.

어.


봄, 여름 지나 가을 가고 다시, 겨울.

기차에서 내려 대합실을 나오니 가로등 불빛 아래 나풀나풀, 흰 눈… 저 멀리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조금 멀리 가볼까? 그것도 좋아. 다음날, 못 하나 쓰지 않고 오직 끼움과 맞춤만으로 지었다는 5층 목탑 앞에 섰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그 끝이 보이는.


끼움과 맞춤끼움과 맞춤끼움과 맞춤….

그 말을 왜 계속해?

무슨 말?

끼움과 맞춤.

내가?

어.


궁금했을까. 못을 쓰면 훨씬 빠르고 쉬웠을 텐데 왜 굳이 더딘 방식을 택했는지.

그 목탑은 아비 잃은 백제의 어느 왕이 아비를 기리며 쌓은 탑이랬다. 아비 잃은 자식 마음이야 똑같아도 왕 체면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씹어 삼켜야 했으니 '끼움'과 '맞춤', 그 굼뜸에 기대어 슬픔을 늦출 요량이었을까. 탑이 올라갈 동안 슬픔은 유예되고 그리움은 허했을 테니 그 누구도 틀어막을 수 없는 아비 잃은 왕의 겨움은 그렇게 한 층, 한 층… 오직 '끼움'과 '맞춤'만으로 올라갔으리라. 그리움과 통곡을 끌어안고 더딘 걸음으로. 몇 발자국 물러나 탑을 올려다봤다. 탑 뒤로 펼쳐진 하늘은 푸르고 등에 와닿는 햇살은 따스했다. 겨울이라 오가는 사람도 몇 없어 적막함마저 느껴지던 그때,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와르르, 무너지듯 덮쳤다.


붉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기운이 빛살 문양으로 번지는 아침. 동쪽 하늘에서 날아오르는 새들 지저귐 따라 일어나는 사람들의 기척. 가까이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코끝으로 번지는 흙먼지,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땅의 울림. 달아나는 작은 곤충들의 날갯짓. 시간의 아귀에 벌어진 작은 틈, 그 틈새를 적시는 바람의 곡절과 다정한 뙤약볕. 탑을 두른 계절의 치마폭에 싸인 알록달록한 각각의 사연들. 죽음으로 붉어가는 서편 하늘. 어느 밤 달무리가 감춘 비밀…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고인 땀과 피와 비명과 기도와 신음. 그 감각과 감당이.


목탑을 보고 온 다음날, 눈 뜨자마자 창을 열고 붉게 달아오르는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 또, 하루가 열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커피나 한 잔 마실까 하고 TV를 켰다가 담벼락을 향해 돌진하는 비행기를 봤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TV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같은 장면만 계속 보여줬다. 아니, 같은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줬다. 누렇고 긴 타원형 얼룩. 그 순간, 왜 그 자국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전에 살던 집, 벽에 난 커다랗고 누런 그 얼룩 자국이. 가운데가 샛노랗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색이 옅어지던 그 얼룩. 언제부터 그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고, 내가 언제 그걸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그 얼룩이 생긴 계절과 한 장면이었다. 딸아이가 얼마 남지 않은 수학여행에 한껏 들떠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봄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선 안 되는, 이제 막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터지던 그 봄, 저 먼바다에서 꽃봉오리들이 무더기로 지고 있었다. TV에선 맨날맨날, 하루도 빠짐없이, 꼼짝없이,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배를, 온종일, 보여줬다. 어제보다, 한 시간 전보다, 얼마큼 더 기울었고, 얼마큼 더 바다로, 배가 들어갔는지, 가고 있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줬다. 나는, 모두 나간 불 꺼진 방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면서, TV를 틀어놓고, 고개를 무릎에 처박고, 들었다. 누군가의 울음과 누군가의 절규를. 어느 날, 전화를 받았다.


우리끼리 애들 모아서 수학여행 보낼까요?


그 겨울 아침, TV 속에선 여러 각도에서 비행기가 날아들고, 담벼락을 향해 비행기가 활주로를 계속계속, 끝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가까운 절에 가자. 어. 저 밖에선 불길이 타고 있는데… 동백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선 그 절, 극락전 꽃창살은 만개하고 이제 막 아침 공양을 마치고 나온 스님들은 따뜻한 햇살 아래로 소금기를 털어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선 안 되는 그저 그런 날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면 안 되는. 그 봄, 그 집, 그 벽에 그 얼룩은 생기지 않았어야 했다. 그 봄, 그 바다에서. 그 겨울, 그 활주로에서. 그 가을, 그 골목에서. 그 여름, 그 지하차도에서. 그 가을, 그 다리 위에서. … 그 어떤 계절, 그 어디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누구도 얼굴 없이, 이름 없이, 이 땅을 떠나선 안 된다. 통곡은, 눈물은, 슬픔은, 그리움은, 여한 없이 흘러야 한다. 그래야 하는 거다.


고대 인도어인 범어의 '스투파(स्तूप, stūpa)'에서 유래한 말인 탑은 원래 돔 형태로 만든 흙무덤이란다. 부처가 인도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자 다비를 하여 연고가 있는 나라와 부족들이 사리를 나누어 각각 탑을 세웠고 이를 "팔분사리탑(八分舍利塔)"이라 불렀는데, 그게 불교에서의 탑의 시원이라고 한다. 탑이 무덤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저 누군가의 기도이고, 바람이고, 기다림이고, 그리움이겠거니… 그 비슷한 막연하고 먹먹한, 덩어리만 안고 주위를 걸었다. 저 안에 이미 떠나고 없는 이의 '무엇'이 남겨져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고는 있었는데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물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여기 없는 존재와 이곳에 남아 있는 내가 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그런 장면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제의란 무엇이고, 애도란 무얼까. 또, 그리움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앤 카슨의 오빠는 자신의 북받치는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견딜 수 없어 집을 나가 연락을 끊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앤 카슨은 자신이 '현관을 쓸고 사과를 사고 라디오를 켜고 창가에 앉았던' 그때 낯선 땅, 모르는 이의 품에 안겨 떠난 오빠를 슬퍼하며 그의 사진과 편지와 우표를 붙여 <녹스>라는 아코디언 닮은 아름다운 책으로 오빠를 노래했다. 조앤 디디온은 입양한 딸을 잃었을 때 딸을 맞이하고 딸을 키우며 기쁘고 놀라고 슬펐던 얼굴을 <푸른밤>에 다정하고 시리게 읊조렸다. 그랬던 그녀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던 남편이 맥없이 쓰러졌을 땐 그가 있던 시간과 자리, 두 사람이 머물던 시간과 자리를 샅샅이 훑고 곱씹어 <상실>에 박았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연인이 떠나자 그녀와 함께했던 공간마다 <그리움의 정원에서>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렸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강물에 몸을 던진 연인을 위해 소설 <말리나>에 남은 사랑의 즙을 짜서 흘려보냈다. 시인 허수경은 이국의 거리를 걸으며 잿더미 속에서 젤마 메르바움 아이징어라는 춤추고 노래하길 좋아한 열여덟 소녀를 발굴해 그녀가 연인에게 바친 싱싱하고 아린 시를 읽으며 인간의 잔혹과 그 잔혹에 저항한 아름다움을 꺼내 펼쳐 보이며 잊힘에 대항한 인류를 기억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 상실에서 오는 슬픔, 그리고 그리움.

오도 가도 못하고 아직도, 여전히, 니 세계를 맴돌다, 불현듯 나는 궁금했다.

사랑하는 누군갈, 무언갈 잃어버린 이들은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쏟고 있나. 무얼 하며.

그리고 나는 또, 궁금했다. 우리는 왜 누군갈, 무언갈 잃어버리면 쓸쓸한 그림자가 채 드리울 새도 없이 서둘러 흔적을 지우고 상처를 꿰매고 주변을 훔치고서 말짱한 얼굴이 되려고 할까. 그래야 한다고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말하는 것도 모자라 몰아붙이는 걸까. 물음 끝에, 화가 났다가 어쩐지 서러웠다. 언젠가 나 없는 풍경이 지극히 무표정하고 사무적으로 처리될 게 뻔해서. 맛도, 향도, 색도 없이. 그것 참.


모든 시작엔 끝이 있고, 숨으로 온 존재는 그 숨이 멎으면 돌아가야 한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게 끝난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만은 예외일 거라며, 영원을 기약하는 게 사람이란 족속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원작인 영화 <토니 타키타니>는 고독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고독에 날아든 사랑. 혹은 고독이란 감옥에 갇혀버린 한 영혼에게 날개를 접고 다가서는 영화. 토니는 그림을, 그중에서도 자동차나 라디오, 엔진 같은 기계 그림을 누구보다 잘 그린다. 마치 먼 세계로 날갯짓하는 새처럼,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치듯 옷을 입는 한 여자가 있다. 토니는 그녀를 만나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독했고 얼마나 많은 걸 잃어왔는지 깨닫는다.


'"당신처럼 마음을 끌리게 옷을 입는 사람은 처음이야."

"뭐랄까, 옷은 말이에요. 자기 안에 부족한 부분이 있잖아요. 그걸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저 성격이 제멋대로예요. 게다가 엄청 사치도 부려요. 그래서 월급을 대부분을 옷 사는데 써버려요."'

(영화 <토니 타키타니> 중)


어느 날, 날갯짓하듯 그녀가 먼 세계로 떠나자 그녀의 옷으로 꽉 찬 드레스룸만 남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엔 외로움이 뭔지도 모르던 토니는 고독의 감옥에 갇힌 수형자가 되어 그녀와 신체조건이 똑같은 여자를 찾아 나선다. '사이즈 7호. 신장 165 전후. 구두 사이즈 230cm 여성'. 그녀가 남긴 옷을 입어보던 여자는 드레스룸 한 켠에서 까닭 모를 울음을 터뜨리고 떠난다.


'그는 가끔 예전 그 방에서 아내가 남긴 옷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그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면 그녀의 흐느껴 울던 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런 것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이 완전히 잊힌 후에도 이상하게도 그 여자는 잊히지 않았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 중)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에게 '옷'이 나에겐 '쓰기'였다. 뭔가 채워주는 느낌…. 하루의 대부분을 읽고, 쓰는 데 보내고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는 품목도 그쪽이니.


'나의 본질은 글쓰기다. 글 쓰고 있을 때 호흡이 돌아오고 맥박이 뛰며 생명의 징후들이 보이고 영혼이 깨어난다. 그 순간 행복과 불행은 감정의 하위 개념이다. 글쓰기는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몰입과 희열로 나를 달군다.


내 안의 암세포와 공존하며 글 쓰며 살고 싶다. 그게 죽음 앞에서 만난 나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다.'

(이연,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중)


아니, 틀렸다.

그녀도 틀렸고, 나도 틀렸다.

내 본질은 글쓰기가 아니라 사랑이다.

글쓰기는 사랑으로 향하는 길이자 길잡이였을 뿐 그걸 몰랐다.

앤 카슨, 조앤 디디온, 잉게보르크 바흐만,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고 허수경에게 쓰기는 사람과 자연과 세계를 만나고 그리로 향하는 통로가 아니었을까. 내 보기에 그들에게 글은, 쓰기는 탐험이자 순례였다. 숨이자,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 나도 그렇다.


황정은 소설가는 난간에서 아래쪽을 향해 미련도 두려움도 없이 몸을 던지는 까치를 보며, 우리는 날개가 없어서, 라기보다는 몸과 몸이 맥락으로 연결되어서 날 수 없는 거랬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나 이야길 좋아한 리베카 솔닛도 글엔 자길 만져줄 몸이 없다며 쓸쓸해했다. 죽은 자들이 남긴 목소릴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꽃과 바람이 꿈꾸는 화안한 대낮에, 달과 별이 피어나는 이슥한 밤에도 그 음률 따라 노래하고 또 노래해도 외롭고 외롭고 또, 외로웠다. 어쩌면 나는 내 외로움이 널 삼킨 것처럼, 누군가의 동공에 잠들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고만 떠나자, 수없이 들썩여놓고도 아직 여기 남아 자분자분 쓰는 건, 가붓하게 휙, 날아 몸으로 만난 널 사랑하고… 멀어져간 니 등을 바라보다 잃어버린 널 그리워하고, 먼먼 어느 날을 꿈꾸다 스러지려고…. 그게 다다. 사랑이 머문 여기에서, 너를 축으로 도는 나라는 항성의 탄생 목적이자 유일한 임무. 나에게 쓰기는 너를 더듬는 촉수이면서 지평선 저 너머 니 세계로 접어드는 오솔길.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은 따뜻하지만 나쁜 일을 기억하는 것은 새록새록 아프다. 그 아픔을 견뎌내어야만 하는 것도 기억의 일이다. 기억하지 않고 묻어버린 공동체의 과거는 언젠가는 그 공동체에게 비수를 들이댄다.'

(허수경, <너 없이 걸었다> 중)


때로 어떤 쓰기는 마지막 안녕이나 비문(碑文)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묵은 약속을 쥐고 어둠을 기다렸다 은하수를 건너는 사람이 있다.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 신경림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글 제목은 김광섭 시인의 시(詩) <저녁에>에서 인용했고, 사진은 어느 여름날, 길 위에서.





틈틈이 올라오는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곁에도 머물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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