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이는 말 -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유달리 눈이 많고 추웠던 지난겨울.
추위를 타지 않아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니고 내복은 거들떠도 안 보던 내가 아프고는 춥단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짠돌이 아부질 닮아 어지간한 추위엔 난방을 틀지 않고도 그럭저럭 겨울을 났는데, 지난겨울엔 참질 못하겠더라고. 마음까지 꽁꽁 얼어버려 책도, 영화도, 사람도 들이지 못한 기형의 계절을 버틸 재간이….
너는 물었지. 내가 있고, 널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외로워? 조르주 상드가 말했대. 당신은 나를 많이 사랑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잘 사랑해요. 그러니까 사랑은 '있고'와 '얼마나'가 아니라 '잘'의 문제인지도 몰라. 없어서, 모자라서가 아니라 어긋나거나 삐그덕거려 나는, 내내, 외따로, 이리저리 쓸려 다녔는지도.
지난겨울엔 눈 많고 추워서도 그랬을 테지만, 안팎으로 소란한데 어디서도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그 기이한 고요에 두통은 멈추질 않고 어지러운 마음은 점점 더 새까매져만 가는데,
"시와 이야기는 언제나 진실의 편. 우리는 기다립니다, 계속합니다, 끝까지 시작합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꼭 시(詩)와 이야기가 아니라도 누구나, 언제나, 진실의 편이어야 하지 않나. 진실 앞에서만큼은 치우치고 기울고, 편파적이어야 하고, 그러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데도, 나는 고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어. 적막을 가른 그 목소리가 큰 데다 한참을 우웅, 울리는데다 뭣보다 손이 되고 발이 되어 날 일으켜 걸으라, 걸으라…. 참, 서글픈 계절이었어. 나란 사람에, 인간이란 종에, 회의가 몰려와 고갤 들 수조차 없는. 우리는 기다린다는, 계속해서, 끝까지 시작한다는, 그 말은 말이야, 다짐보다는 간곡한 당부로, 여기, 동그마니, 파문으로 얹힌.
떠나온 자리로 날 불러들이는 손짓이 있어. 한결같은 목소리로, 향기로, 풍경으로, 단어로. 좋지, 좋아. 근데 말이야, 때로는 그때 그 자리가 아닌, 내가 벙그러지는 한낮 빛살에 터진 땀 내음과 비의 각도로, 내가 자라는 계절의 물무늬와 꽃그늘로, 내가 선 각각의 시절에 맞춤한 작법과 리듬으로 날 끌어들이는… 그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게 고팠어. 신형철 평론가가 그랬다지. 위로는 우산을 씌워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거라고. 나는 비를 가리고 막아줄 우산이 아니라 곁에 서서 같이 비를 겪을, 어떤… 기다렸나 봐. 내도록.
지난겨울 어떤 그림책을 읽었어. 표지에 한 꼬마가 자기 몸보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가는 그 그림책에선 시(詩)는 온 마음 다해 환영하는 거랬어. 언젠가의 나에게도 꽃다발처럼 환한 풍경이, 노래가, 사람이, 마음이 있었겠지. 온 마음 다해 꽉, 끌어안은. 그리운 볕 양껏 쐬지 못해 여적지 마르지 못한 꽃잎도, 몇.
삶의 채찍질이 거세질수록 고통은 극한에 달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삶의 찬란함도 맹렬해진다고 말한다면 미쳤다고 할까. 어쨌거나 내 사전에 덤덤함은 없어. … 없었어. 생(生) 앞에서 나는 갓난쟁이였고 이방인이었고 떠돌이였고 허깨비였어. 한 알의 민들레 홀씨.
내 인생 젤 풍성하고 향긋한 꽃다발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바로, 지금.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 속에 든…
남아 있는 나날
- 전욱진
어느 날 네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행방을 묻는 이가
나였으면 좋겠다
그때는 놀라움도 그리 크지 않고
약간의 슬픔하고 더 많은 기쁨
마침내,라고 나 혼자서 하는 말
난 잘 모르겠다, 들리도록 하는 말
우리가 너희를 잘못 알고 있었구나
입맛을 다시면서 사람들은 가겠지만
수런대는 뒤통수들 눈여기지 않고
멀어서 자그마한 그에게 속삭인다
거기 있는 것들이 너한테 상냥하길,
돌이키지 않아도 온 마음인 것으로
모로 누워 가만히 눈 감고 있을 거다
바깥으로 길고 또 시끄럽게
사이렌이 울려도 계속 그래도
………
나는 환원하고 있어.
왔던 자리로.
우리, 남은 나날은, 잘, 사랑하자.
저기 저 봄날, 색색의 꽃다발처럼,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온 마음 다해, 부디….
정태춘이 짓고 박은옥이 노래한, <민들레 시집>.
정태춘이 짓고 노래한, <정산리 연가>
덧
온통 느낌인 데다 뭐든 늦된 저는 지나고 나야 언어가 되고 보여요.
온 마음 다해 환영한,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와 함께한 그때 그 시간이 이제야 조금씩 보일랑 말랑, 말문이 트일랑 말랑. 꽃다발이었던 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