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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갔다가……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남기는 -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by 여름

행복하면 불안하다. 일종의 징크스랄까.

웃음은 불길한 징조라 실없는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 나오고 그런 증상이 며칠 계속되면 심장이 두근대면서 불안하다. 또 뭔 일이 터지려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비껴갈 리 없는 예감. 답답해서, 혹은 정말 몰라서 사람들이 점집을 들락거리고 심리상담소 문을 두드리는 것 같진 않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걸 인정할 자신이 없거나 그럴 용기가 부족해서 타인의 입을 빌어 확인하고 싶어서는 아닐까. 또는 위로나 공감이 절실하거나 툭, 터놓고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 이가 필요했거나. 비극의 아이인 나는 일찌감치 알았다. 먹구름 잔뜩 낀 내 앞날을. 조금쯤은 무섭고 또 그만큼 설웁고 억울하기도 했는데,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지금은 근심이 탑처럼 쌓이고 시름이 드글드글 꼬인다 해도 더는 뺏기고 잃을 게 없어야 한시름 놓였다. 하아, 이제 됐다. 기웃기웃, 곁눈질하던 눈들이 하나둘 물러나야 꿈적일 엄두가 난달까. 나에겐 불행이, 슬픔이 안도와 동의어가 된 지 좀 됐다. 어지간한 고통엔 찍소리도 안 한다.


늘 뺏기고 잃었다는 상실감이 따라붙었다. 착각이었다.

온전히 뭘 가져본 적도 별로 없는 빈털터리한테 상실감이라니.

세상 모든 막내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날 때부터 이름을 시작으로 물려받거나 빌려 쓸 수 있는 건 옷이든 뭐든 죄 그렇게 해서 딱히 이상할 것도 불만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려서 누가 집에 오면 엄마는 대견하다는 듯 내 머릴 쓰다듬거나 순한 눈빛을 보냈고 그럴 때마다 내 두 발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랬던 나는 결과적으로 엄마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이 됐고 그것도 모자라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되고 말았다. 엄마 말마따나 고집불통에 늦되긴 해도 뭘 해도 잘할 것 같은 나는 누굴 닮았는지 (누구겠어?) 야물딱지고 악착같은 구석이라곤 없어 엄마 속을 태우고 또 태웠다. 그뿐인가. 편을 먹거나 지고 이기는 경쟁은 질색이라 어려서부터 그런 놀이엔 끼지도 않았고 어쩌다 껴서 놀다가도 갖은 핑계를 대며 달아나기 일쑤였다. 평생 고질병이다. 고무줄놀이도, 공기놀이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우리 집에 왜 왔니도, 오징어 게임도, 말뚝박기도, 숨바꼭질도… 재밌기는커녕 버겁기만 했다. 나는 그냥 문방구에서 파는 종이 인형이나 사다가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가위로 오려 놓고는 배 깔고 엎디어 두 손에 종이 인형을 사뿐히 쥐고 방금 오린 옷이나 바꿔 입히면서 재잘재잘 이야기 짓는 게 젤루 좋았다. 혼자 그러고 있으면 부엌 쪽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이 지금 누구랑 노니? 혼자! 지금은 다 큰 둘째 아이도 날 닮아 그랬는지 어려서 학교가 파하면 학원 간 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바비 인형을 한 아름 싸들고 친구네 가서 저녁까지 얻어먹고는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 왔다. 그 애를 무릎에 앉히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읽은 그림책에 나온 굿즈 같은 걸 발견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는 동시에 입꼬릴 올리고는 손뼉을 치고 은밀한 눈빛을 교환한다. 피가 뭔지, 참.


혼자였고, 그게 편했다. 짝꿍도, 단짝이 없어도.

아주 가끔씩 어느 자리에서나,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 스며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면서도 얼마쯤은 부러웠는데, 그런 날이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래도 뭐, 혼자 놀아 버릇해서 그런지 아니면 장신구처럼 외로움을 늘 달고 있어선지 짝꿍이나 단짝을 크게 욕심내진 않았다. 그러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가상인 듯 가상 아닌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 여기서 너를 만났다. 찰나와 영원 사이에서 너를 읽었다. 읽고 읽고, 또, 또… 읽었다. 있나 싶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진 너는 검푸른 새벽녘 말간 이슬로 날 적셨다……. 온 세상 등불이 켜지고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되어 울려 퍼지더니 세상 모든 꽃들이 피어났다.


물을 보러 간다. 자주.

물살, 물결, 물무늬, 물빛, 물그늘, 물내음…….

흐르고 떠가고 굽이치고 때로 거스르고 튀어 오르기도 하는, 한결같으면서 그렇지 않은.

같은 모양, 같은 빛으로 늘 거기 있는 것 같아도 뒤엉키고 휩쓸리고 되밀리며 단 한 번도 같은 적 없는, 현재인가 싶으면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속닥거림과 비명과 박수와 숨과 부둥킴과 모호함으로, 넘실넘실, 그 모든 걸 넘나들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각각의 표정을 보러. 모래사장에 앉아 잔잔한 듯 역동적인 물을 보고 있으면 설레다가도 더럭 겁이 난다. 저 물더미가 어느 순간 다정한 표정을 지우고 벌떡 일어나 나를, 이 세계를 삼킬까.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은 나만큼이나 모순투성이에다 야누스적이란 생각.

내가 믿는 정직함이란,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진실이 있다면 그건 찰나의 감각과 느낌이다.

오직 그것만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을 쓰고 싶다. 싸지르듯이, 막, 막. 왁, 왁.

자기 연민이 깨끗한 포옹이라는 거. 그걸 드러낸다고 해서 결코 추하지도, 딱하지도 후지지도 않다는 거. 그건 되려 단단한 용기를 넘어 자위처럼 건강하다는 거. 욕망은 죽음과 운명공동체라는 거. 그걸 감추고 드러내는 건 교양이나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기준 혹은 고상함과는 그 어떤 상관 관계도 없다는 거. 사회적 역할이 정체성은 아니라는 거. 그러므로 그 둘을 동일시하는 건 위험하고 온당치 않다는 거. 그러한 행위가 자기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파멸에 이르게 하므로. 모든 질문은 나를 향할 때 빛나고 끝까지 의심할 대상은 다름 아닌 나라는 거. 모든 단어엔 두 개의 얼굴, 즉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거. 사랑 안에 자해와 질투의 화신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와 대상은 일렁임, 순간에 있다는 거. 제발 세상의 밝은 면만 보려고 하지 않았으면. 어둠이 있어야 빛을 볼 수 있고, 어둠이 짙어야 빛은 또렷하기에.


건강을 믿고 오만방자하던 시절, 죽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차마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아 매일밤 빌고 빌었다. 죽여달라고. 어떻게? 그것까진 모르겠고, 내 손으로 끝장낼 수 없으니 날 좀 데려가달라고 생떼를 썼다. 그런 기도빨은 왜 그리 잘도 먹히는지, 암에 걸렸다. 음흉하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나는 얼굴을 싹 바꾸고는 누구보다 고분고분하게 치료받으면서 너도나도 서명한다는 연명치료 동의서가 붙어있는 쪽으론 눈길도 안 줬다. 자본주의가 부추긴 죽음의 계급화니 의료계의 속 보이는 장삿속 같은 걸 떠나서 숨이 꼴까닥 넘어가는 그 순간, 그때에 내 맘이 어떨지 몰라서다. 구질구질한 죽음보다야 우아하고 깨끗한 죽음? 글쎄…. 난 그렇게까지 이타적이질 못해서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 남의 이목이나 편의를 위해서 우아하게 죽어줄 맘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단 저승사자 발모가지 비틀어 쥐고 애걸복걸하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솔직히 지금은 어떤 말도 섣부르지 싶다. 다만, 죽음과 오래 얼굴을 마주한 나로선 죽음을 쇼핑하듯 말하는 그런 말들이 사치스럽게 들리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구질구질하더라도 더 살고 싶은 맘이 정말 안 들까? 몇 번을 물어도 더 살고 싶은 쪽으로 기우는 건 다른 뭣보다,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더 담그고 싶어서. 1분 1초라도 더 니 곁에 머물고파서. 구질구질하더라도. … 그렇게라도.


… 죽어가고 있다.

다니엘 페나크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한 것처럼 내게도 시간이 주어줬으면, 내 세포들이 느긋해졌으면. 내 몸이 그 정도 아량쯤은 베풀었으면, 부디.


봄비가 죽죽 내리던 날, 차를 몰고 양재 꽃시장까지 가서 데리고 온 라벤더가 죽었다.

이번이 세 번째다. 또, 기어이, 죽이고야 말았다. 보랏빛 라벤더가 시커멓게 죽어나간 빈 화분을 본다. 그리고 내 손을 본다. 또…?


요즘 들어 부쩍 내 모든 성애의 출발인 '손'을, '손깍지'를 생각한다.

손의 두 얼굴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달콤하고도 뜨거운 껴안음과 잔인하고도 살 떨리는 폭력의.

나는 빈 틈 없이 맞닿은 두 개의 손바닥에 집중하고 싶다.

그때 전해오는 감각에 대해서만. 그때의 온도와 체취에.

손바닥 전체에 빛처럼 빠르게 번지는 싸함. 공기의 전환. 숨소리. 먼 데서 들리는 듯한 북소리.

깍지 낀 두 손. 열 개의 손가락. 꼼지락거림. 꼬질꼬질 땀 내음. 흙길. 덜컹이는 트럭. 끈끈한 여름밤. 깜깜한 하늘. 거기 박힌 별빛. 총총한.

혼자서는 짝짜꿍, 박수. 둘이서는 악수하고 손뼉맞장구. 여럿이 모이면, 손에 손을 맞잡고 돌고 도는 강강수월래. 달을 향한 손모음. 기도와 소원, 다짐. 노란빛, 희망. 달무리를 에워싼 저마다의 곡절….

무언가를 잡고 짚고 휘젓고 얼싸안고 후비고 닦고 들고 때리고 붙잡고 매달리고 뒤지고 흔들고 빚고 들추고 토닥이고 파헤치고 훑고 두드리고 더듬고 쓸고 매만지고 끄적이는 손. 그 손은 무언가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부서진 걸 새로 지을 수도 있고 쓰러진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일어서게 할 수도 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영화 <하이파이브>에서처럼 손과 손을 맞잡으면 그 손을 타고 초능력이 물결처럼 일어날지도…. 그러니 내가, 그리고 우리 인간이란 종(種)이 손을 맞잡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몸짓만으로도 서로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내 가슴 뜨겁게 달군 손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그렇게나 위대하고 어쩌면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며 생채기를 내는 것도 모자라 서로를 홀대하고 반목을 일삼으며 밀어내느라 기를 쓰고 또 썼다. 그러면서 병들어 갔다….


재발하고 찾아온 여름은 꽃으로 각인됐다.

쉴 새 없이 병원을 들락거리야 했던 재발한 그해 여름은 올림픽 도로 방음벽에서 울부짖던 능소화로.

그 이듬해엔 온 산을 뒤흔든 흰 밤꽃향. 그다음 여름엔 빗물에 뭉개지던 금빛 모감주. 그다음엔 배추흰나비 내려앉은 분홍빛 머금은 개망초. 작년 여름엔 바람 시게 부는 강둑에서 온몸으로 울던 노오란 금계국. 그리고 올여름엔 주치의 없이 고갯마루 넘는 새파랗게 질린 산수국.


자연 앞에 설 때면 에밀 아자르가 <자기 앞의 생(生)>에 쓴 문장이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사랑해야 한다.'


그 문장을 채 다 읊조리기도 전에 나는 흙이 되고 뿌리가 되고 가지가 된다. 새순이 되고 꽃잎이 되고 열매가 된다. 빛이 되고 그림자가 된다. 비가 되고 파도가 된다.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메아리가 된다. 무지개가 되고 노을이 된다. 별이 되고 달이 된다. 어둠이… 된다.


아직, 나는, 여기, 있다.

여름빛, 사랑으로.


'2011년 5월 17일

오늘도 아프지 않고 글을 쓰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중)


살구 한 알


파도처럼


나뭇잎 사이로


바람 시게 불던 한낮


아침나절 플라타너스 사이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

- 설하한


끝난 후에도 이곳이 끝나지 않듯

너 없이도 사랑이 지속된다

시작해야 한다


물구멍이 되어

물구멍에서 시작한다


너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전처럼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너라고 쓴다

문장의 허리가 끊어지고

다신 일어나진 못한다


너에게 네가 없고

나는 자꾸만 물구멍이라

이미지로부터 도망친다


감긴 눈. 차가운 피부. 축 늘어짐. 탄력 없음. 검게 변한 발톱. 굳어가는 신체. 아무 박동 없음. 너에게서 네가 없음.

시작해야 한다 네가 이곳에 없는 것에서 도망치지 않기


없는 너의 소리를 듣고

없는 너의 얼굴을 보고

잠에서 깨면 네가 묻힌 화분 앞에서 기도하고 아침을 꾸역꾸역 챙겨 먹는

리듬

계속되는 리듬

시작하기 이전처럼 시작하기


나는 물구멍이 아니고

사랑은 사랑이 아니게 되고

Rewind

Rewind

일상이 끊어진 나의 허리를 깁는다

시작하기

끔찍한 리듬


시작하기 전에

너를 시작하는 것은 가능할까 나는 계속 묻는다

너는 너 없이도 있다

네가 너라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의 가여운 물구멍

너 없음에서 시작하기


망가진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음악에 끼워놓는 노이즈처럼

네가 끝난 뒤에

너의 영혼이 시작되고

너 없음에서 마음이 다시

시작하고

너 없이도 있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남기는.



'이름이 뭐야


곧 만나,

그게 이름이야.'

(박화진, <아끼는 마음> 중)


폴폴 작가님의 <아끼는 마음>에 실린 '룸메이트의 미덕'을 폴폴 작가님이 직접 낭독해 주셨습니다.

사랑스런 폴폴 작가님 목소릴 들으며 기억 저 편을 더듬어 봤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짝꿍으로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가.

미덕이라고 할 만한 게 나한테 있기는 한가.


봄이면, 그러니까 정확히는 4월이면 몸이 달아 찾는 숲이 있습니다.

배꽃이 보고파서.

봄볕에 등불처럼 피어난 배나무 그늘에 몸과 마음을 흠뻑 담갔다 오면

또, 며칠은 거뜬히 살아낼 힘이 나는 것도 같길래.


섬처럼 떠돌다 아픔을 달고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나로 빼곡해서 누군가의 짝꿍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걸.

틈이 생기고, 그 사이로 들락거리는 바람도 맞고 비에 젖기도 하고 환한 빛도 쪼이다·…

다시, 동굴에 오도카니 앉아 그 봄날을 그리워합니다. 그때 그 화안하던.


'감히 물어보고 싶은 것,

나처럼 너도 환하니?'

(허수경, <환한 배나무> 중)


위의 글은 인스타에 올린 글입니다.

또 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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