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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에게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남기는 -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by 여름

지난봄이었지.

마지막 녹음하던 날, 각자 책에서 20분 분량의 꼭지를 골라 낭독하자는 동선 작가 제안에 머리가 하얘졌어. 글을 쓰면서는 물론이거니와 퇴고할 때마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읽을 적이면 어이없고도 구질구질하게 찔찔 짜는 통에 클났구나, 싶어서. 그때 번쩍, 한 생각이 쳤어.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먼 데 있는지 가까이 사는지는 몰라도 그런 물리적 거리쯤은 사뿐히 뛰어넘어 주파수를 맞추고 일렁일렁, 기척을 보내오던 그림자가. 부러 짬을 내어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간판을 내걸고 두둥실 모험 떠난 우리 곁에 바투 앉아 기껍게 맞대어준 보드랍고 보드라운 마음결이. 찌질하기 짝이 없는 사고뭉치인 내 목소리여도 괜찮다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낭독은 둥그렇게 모여 앉은 그들 이야기면 어떨까.


어쩜 내 눈에 반짝이는 건 싹 다 그렇게나 쓰잘데기 없는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또 한사코 그쪽으로만 피가 쏠리고 살이 떨리는지. 내 사랑은 말이야, 나를 살리려는 작정인지 말려 죽이려는 건지 도통 그 속내를 모르겠더라. 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면 내 몸에 똬리를 틀고 앉아 틈만 보이면 화르락, 눈을 치뜨고 내 몸뚱이를 불쏘시개 삼아 황홀경을 맛보고는 홀라당 뼈째 태워 자멸할 저 암덩이랑 한패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얼마 전에, 그래, 이제야 들더군. 뭐든, 늦된 나라서.


여름에 시작한 꿍꿍이에 불을 지핀 가을 언저리.

우리가 피워 올린 모닥불가로 흐릿하지만 다정한 그림자가 하나둘 모여들었지.

밤이 이슥해지는 줄도 모르고 두런두런 이야기에 빠져들던 우리 목소리에 저마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어깨동무로 몇 계절을 흘러 흘러 온 이들에게 온마음 다해 꽃다발을 바치자. 그러고서 박지향 작가님이 쓴 책 <서쪽으로 난 창>에 실린 '향수, 남편, 거짓말 - 피어 있는 동안엔 꽃으로, 지고 난 뒤엔 향기로'를 읽었어. 지향 작가 특유의 향기를 가득 머금은 그 꼭지가 좋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심 우리 방송이 피어 있는 동안엔 꽃으로, 지고 난 뒤엔 오래오래 향기로 남았으면 하는 욕심 섞인 바람이 있었던 것도 같아.


내로라하는 프로 부럽지 않아 어깨뽕 한껏 들어가게 해 준 동선 작가의 다재다능한 숨은 끼와 콧물눈물로 설움의 먹구름 찢어대는 진상짓에도 두 눈 질끈 감는 선비의 너른 품, 오타도 유행어로 둔갑시키는 언어의 마술사인 폴폴 작가의 매끄럽고 순발력 넘치는 솜사탕 진행 솜씨. 그 두 사람의 눈부시게 근사한 활약과 애씀에 찬물을 끼얹고 흠집 내는 건 언제나, 늘 나였어. 맥락도 뭣도 없이 툭, 하면 찔찔거리고 근황을 물었을 뿐인데 혼자서 75분 떠들어제끼기. 머리에 꽃 단 양 꼴까닥 숨 넘어가게 웃기. 리시안셔스에 지지 않으려고 툭, 쑥부쟁이 떨구기. (애기똥풀이나 사위질빵, 며느리밑씻개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 주제는 왔다리갔다리, 번번이 순서는 왜 그리 헷갈리는지. 제대로 찾아 읽지도 못할 대본은 왜 맨날 써오고. 하는 말은 죄 도돌이표에.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 가득한 댓글을, 어떨 땐 두 번, 또 어떤 방송엔 세 번도 달면서 우리 아궁이에 불이 꺼지지 않게 군불 지펴준 콜슬 영우 님. 턱 괴고 기다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휙휙, 스치는 풍경 벗 삼아 듣는다던 사비체바타냐 영우 님. 노오란 봄날,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눈 공연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에 그날, 그 무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공연장 밖에 쓸려 다니던 그 봄밤의 공기를 진득허니 묻힌 목소리로 보내온 이름만큼이나 멋진 우주 영우 님. (돌아오라, 둥둥 북은 울리고 계신지.) 동트기 전에 일어나 어둔 도로를 달리고 달려 폴폴 작가가 우리의 첫 모꼬지 장소로 찜한 정동진 바닷가 영화 책방 <이스트씨네>에 입장했다는 깜짝 소식을 전해준 하늘을 날아 영우 님.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듣고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미쳤다'는 최고의 칭찬을 날려준 이강순 영우님, 알고리즘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딱 한 번 '좋아요'를 누른 용감무쌍한 수필버거 영우 님. 간만에 보물 같은 에이에스엠알을 찾았다며, 호출에 감사하다던 slowst2525 영우 님, 동선 작가 목소리가 미남(?)이라고 폭풍칭찬을 아끼지 않던 이정연 영우 님. 우리 방송 청취자에게 '영우'라는 (영화를 사랑하는 벗) 애칭을 안겨준 고마움에 푸짐한 선물을(?) 준지가 언젠데 여지껏 튕기는 콧대 높은 rcmk9001 영우 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쏟아지는 잠을 물리쳐가면서 대체 뭔 소리들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쩐지 못 들으면 나만 손해가 아닌가, 하는 뜬금없는 억울함인지 오기로 듣다가 계피맛 사탕을 맛보고는 짱 맛있어서 딸이랑 몇 번이나 들었다던 조르바더붓다 영우 님. 설연휴 첫날, 창밖으로 나리던 하얀 눈발을 함께 바라보는 선물을 안겨준 능내책방지기 영우 님. 라이트 형제의 키티호크 초록풀밭에서 꿈의 날개 돋게 한 하남의 콩트 책방지기 님.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뭔 일이 있었냐며 쪼르르 팟캐스트로 달려간, 지각생이라 더 반가웠던 이진민 작가님.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뿐만 아니라 저 먼 캐나다에서 첫 책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를 낭독해주고 있는 지나 정 님 방송까지 챙겨 들어준 것만도 감사한데 따스한 발자국을 남긴 복숭아빛 서무아 영우 님, 시즌이 끝난 줄도 모르고 왜 이리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느냐던 내 오랜 늙은 친구, 은사님. 팟캐스트 까는 것부터 만만치 않은 고행길을 기어코 해낸 찐 영우 님, 박지향 작가님. (짝짝짝!)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모르고

보이지 않아도 느껴져. … 그랬어.

모닥불가에 둘러앉은 숨결,

온기로 모닥불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어.

높이, 노옵이 날아오르고.

이 세상 어떤 목소리도

열린 귀, 들으려는 한 자락 마음 없인

공허하고 시린 울림으로 낙하하리라.

부질없고도

외롭게.



오직 한 사람

- 황화자


유방암 진단받은 나한테

남편이 울면서 하는 말.

"5년만 더 살어."


그러던 남편이

먼저 하늘 나라로 갔다.


손주 결혼식에서 울었다.

아들이 동태찜 사도 눈물이 났다.

며느리가 메이커 잠바를 사줄 때도 울었다.


오직 한 사람 남편이 없어서.




오직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날이 있었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아 잠으로 도망쳐

꿈결에 사랑을 지어먹던.

오직 한 사람

나는 노래하고 춤출 거야.

바람등에 올라타고 검푸른 어둠을 향해 날아오르는

겁 없는, 한 마리 새로.


오직 우리가 서로를 휘익, 감아 안을 수 있는 두 팔이 있어서

나, 좋아.


나는

여전히, 여기에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

오직, 내 곁에.




모든 영우 님들의 댓글이 소중하고 귀해.

유난히 박지향 영우 님의 댓글이 빛났던 건

개인 사정상 '목숨 걸고 남긴' 댓글이라서.





아래 글은 박지향 작가님이 2025년 3월 7일 올린 <맛을 보다> 편을 듣고 보낸 개인톡으로 팟캐스트에 댓글을 남겼다가 오타가 많아 삭제했다길래 대신 써드리겠다고 졸라 남겼던 것도 같은데, 다시 보니 사라지고 안 보이길래 여기, 올려놓아. '목숨 걸고 남긴' 귀한 댓글이라.






오직 사랑하는 영화를 손잡고 나섰던

폴폴, 동선, 이연

우리 세 사람 모험길에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날아오른 모든 영우 님들

다시 한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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