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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일 Jul 13. 2023

운이 좋았습니다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이 될 수 있던 이유


그 유명한 "농구가 하고 싶어요" 밈

UX 리서처라는 제 업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걸 넘어서 사랑스러운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요. 경력이 늘어갈수록, 햇수가 늘어날수록 경계가 중요하진 않지만 그래도 사용자 경험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직접 사용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경험, 문제점 등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매력적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잘하고, 선호하는 일이었지만 어느덧 정말 잘하고 싶은 분야, 사랑하는 업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누군가 UX 리서처가 무엇이냐 물으면 업에 대해 명확히 설명은 못하지만요...ㅎㅎ)


계기가 있었습니다. 2018년, 해외 송금 서비스에 대한 UX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었고, 어렵게 해외 유학 중인 자녀를 둔 부모님을 리쿠르팅해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늘 하던 일이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도착하신 인터뷰어를 인터뷰 룸으로 모시고 아이스브레이킹을 진행하는데, 마치 TV에 출연하시는 듯 세상 곱게 차려입으시고 수줍게 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1시간을 위해 긴 시간을 투자하셔서 곱게 꾸미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포근해졌습니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자 필요한 답보다 풍부한 경험들을 이야기해 주셨고 덕분에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1시간짜리 심층 인터뷰였지만, 사용자들에게는 본인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수 있구나 생각이 들어 'UX 리서치'라는 업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인터뷰를 마치며 잘 부탁드린다 말씀해 주시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가끔 UX에 대한 설득이 필요할 때 '상대적 가치(Valueation)'라는 단어를 설명합니다. 사실 주식 시장에서 쓰이는 단어인데, 저는 이 단어를 UX에 적용해서 활용합니다. 오락실에서 '원코인'의 가치는 어떨까요? 우리가 말도 안 된다며 욕하는 '막장 드라마'는요?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백 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활동이 참 많았습니다. 군것질을 사 먹거나, 딱지나 팽이 등 놀이 도구를 사는 등 선택지가 다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락실에서 10~15분간의 유희를 위해 게임 한 판을 선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게임 속에 또래들만의 경쟁(랭킹 시스템), 기술에 대한 공유(커뮤니티), 게임 엔딩(콘텐츠) 등 다른 무엇보다 큰 가치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막장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히 드라마 작가 김순옥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인터뷰 기사에는 막장 드라마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명작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드라마가 하루하루의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내일을 궁금하게 하고 기다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이대학보(https://inews.ewha.ac.kr)

제가 욕했던 그 막장 드라마의 장면들도 누군가에게는 내일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었다는 것. 무엇을 위해 서비스와 솔루션을 제공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계기였습니다. "한마디 말, 하나의 의견을 사용자가 말하기까지 얼마나 간절했을까." 그 뒤로 사용자 행태를 조사하면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가치를 아는 것이 UX 리서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사용자 중심으로 정말 필요한 솔루션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처음 입사했던 회사에서 한 번의 퇴사, 그리고 재입사 후 분사. 그렇게 8~9년 정도를 UX 기획자, UX 리서처, UX 컨설턴트로 일을 했습니다. 서툴고 부족함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꽤 많은 성장과 성취를 얻었죠. 면접에서 제 소개를 할 때 항상 하는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퀴닝의 서사' 

체스에는 퀴닝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등급의 말인 '폰'이 상대편 체스판 끝에 다다르면, 가장 강하고 자유로운 '퀸'으로 변하는 규칙입니다(엄밀히 따지면 퀸이 아닌, 원하는 말로 변하는 규칙입니다). 인턴에서 시작해서 제 팀을 맡으며 퀴닝의 서사를 경험했고 그 경험을 함께 나누고 기여하고 싶습니다.


물론 누구나 저마다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저는 저의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금까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던 것도 모두 선물 같이 느껴집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많고, 기준만 높아 당시에는 너무 괴롭고 고민스러웠지만, 결국 시간이 흘러 경험이 되어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처음 퇴사를 했을 때,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업을 바꿀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하거나 했겠지만, 당시는 이걸 나눌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막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흔히 말하는 번아웃이 와버렸죠. 며칠을 방안 침대에만 있으면서 베갯잇에 숨어 현실을 도피하다 처음 입사하던 날 저 스스로에게 써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정말 이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느려도 좋으니 지름길 말고 길을 걷자고


대학교 4학년 UX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남들만큼 스펙도 없고, 성적도 엉망이던 저는 운이 좋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 간절함이 오롯이 담긴 편지는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 이 분야에서 일할 방법을 찾아다녔거든요.


고민을 끝내고 나서 'UX를 하는 나'보다 'UX'에 집중하면서 좀 더 유연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도메인에 국한되지 않고 '경험'이라는 핵심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들을 더해보며 이것저것 시도해 봤던 것 같습니다. 운이 좋게도 저의 이런 업에 대한 고민을 나눌 동료들과 지인들이 있었고, 이런 주제의 대화만으로도 꽤 성장하며 관점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8년간 몸담은 두 회사

물론, 평탄하지만 않았지만 남들보다 빠르게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실패를 반복하는 중입니다. 두 번째, 정말 좋아하던 회사를 나오며 마음을 추스르며 업을 다시 정의하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꼬박 걸렸으니까요. 다만, 이전과 달라진 점은 업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묵묵하기를 겁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UX 리서처를 구인하는 기업의 면접들에서 탈락을 반복하며 주눅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용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제가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저의 UX 리서처로서 짧은 배움과 경험을 나누며 직장인보다는 직업인이고 싶습니다.


혹시, UX리서처로서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느슨한 연대를 통해, 서로를 도우며 가치를 더해가면 좋겠습니다.

UX Researcher 최승일
seungil.offic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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