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영화를 찍었다

예천 국제 스마트폰 영화제 탈락 후기

by 다윈이야기

아내와 함께 단편 영화를 찍었다.

제목은 <좋은 부모 나쁜 부모(2020)>

다윈이까지 카메오로 출연했으니 이제 온 식구가 배우가 된 셈이다.


돌이켜보니 이상하다. 한 번도 영화를 찍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절반의 영화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언 십 년에 가까운데...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에서 밥벌이를 해오면서 단 한 번도 직접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니. 정작 가장 틀에 갇혀있던 것은 나였다.


우연히 예천 국제스마트폰 영화제의 출품 공고를 본 아내가 먼저 촬영을 제안했다. 올해가 2회 차인 만큼 아직 주목도가 높지 않으니 조금만 잘 만들면 본선 진출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달콤한 꼬임도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휴가지 안동과도 가까우니, 이참에 본선 진출 후 예천까지 짧은 휴가를 다녀오자는 그럴듯한 계획도 세웠다.


영화도 찍어본 적 없는 것들이...
시나리오도 없고 배우도 없고 장비도 없이 그저 뇌내 망상을 200% 풀가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출품까지는 체 일주일이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감은 임박했고 주어진 환경은 척박하니 고민하고 궁리할 시간이 없었다. 영화 찍자고 휴가까지 낼 수는 없고 결국 주말인 당일에 찍지 않으면 출품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지체할 틈이 없으니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해가지기 전에 다윈이 산책 겸 밖에서 찍기로하고 가까운 공원을 로케이션 장소로 잡았다. 까짓 거 차 타고 가면서 수다 떨듯이 시나리오 쓰고, 벤치에 앉아서 대사 몇 번 주고받고, 스케치 영상 좀 따고, 인물 별로 테이크 몇 개 가면! 좋아~ 영화가 별건가. 총 촬영 시간 2시간 이내로 5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해냈다.


강아지까지 데리고 둘이서 모든 것을 하다 보니 프레임은 다 틀어졌고

해가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테이크를 충분히 가지 못했고

따로 녹음 장비가 없어 오디오는 분리되지 못한 체 엉망이었고

연기 연습시간이 부족해 대사는 칠 때마다 달라졌고

결정적으로 스마트폰 카메라 해상도를 바꾸지 않아서 저화질로 녹화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땀범벅이 되면서도 이 모든 것을 해냈고 하루 만에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는 안도감에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다음날 후다닥 편집까지 끝냈다. 이거 뭐 영화가 별건가? 물론 결과적으로 편집점은 의미가 없었고, 스케치 영상은 찍다만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PC로 옮겨놓고 보니 화질까지 처참했지만, 깔끔 5분 20초로 딱 떨어지는 분량을 보니 벅찬 마음도 들었다.


본상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누구에게 이 영광을 돌려야 하나 봉준호 감독님 아카데미 수상소감을 다시 한번 돌려볼까? 고민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응 그런 일 없어.


결과적으로 오늘 공개된 본선 진출작을 보니 나와 아내의 이름은 없다. 잠시 후 [죄송합니다]로 시작되는 본선 탈락 문자를 받았다. 작은 지역 행사라고 생각했는데 출품에 이어 탈락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사무국의 깔끔한 일처리를 보니 탈락의 아쉬움이 조금 가시는 듯... 하지 않았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급하게 기사를 찾아보니 올해 유독 출품작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훨씬 훌륭한 작품들이 많아서 당연히 우리가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각오해야 한다. (곧 온라인 투표로 작품들이 공개되면 낱낱이 살펴봐 줄 테다!)


지난 몇 주간 로또를 가슴에 품은 것처럼 즐거웠는데, 막상 꽝인걸 확인하니 섭섭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원히 세상에 내보일 일 없는 작품일지라도 작은 영화가 하나 남았고 거기에 우리 모두가 담겼다. 그렇게 우리의 7월은 작은 사건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2020년 여름, 우리는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함께 연기를 했고, 각자 맡은 바 스태프로 분했다.

처음으로 영화를 편집했고, 자막을 달고 집에서 시사회를 했다.


내년에도 도전해달라는 집행 사무국의 문자가 야속하지만 밉지만은 않다. 모쪼록 사고 없이 행사가 잘 마무리되기를... 본선 진출하신 모든 분들 격하게 축하드리며, 탈락자는 이만 물러갑니다!


PS. 여러분 영화 찍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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