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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튜버 여우눈 FOXSNOW Mar 31. 2017

그림으로 하는 기도

기도로 그린 그림 이야기

김현지_바다의 얼굴(The face of sea)_acrylic paint on silver paper_27.3 × 37.4cm_2008

제13장 바다의 얼굴


   바다에 얼굴이 있다면 어떤 표정일까. 바람에 의해, 태양에 의해, 하늘에 의해 시시때때로 변하는 바다의 생김새. 달라지는 바다의 모습처럼 당신 또한 주변의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으로 감정과 마음이 변할 때가 빈번했을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영국 유학길에 오르고 싶은데, 정작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신문 배달부터 시작했다. 새벽에 아파트 단지마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신문을 돌렸던 때였다. 일이 고단했는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위를 반복해서인지, 신문 뭉치가 무거웠는지, 신문 배달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에 복근이 새겨져 거울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신문 배달을 갔다 와서 그림 그리는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맘먹고 내 방 책상 위에 올려놓은 은색 종이에 푸른빛 아크릴물감을 묻힌 붓으로 마음 가는 데로 붓질했던 기억이 난다. 시원하게 뻗어서 만든 붓으로 낸 길로 <바다의 얼굴>을 그렸다. 계절은 기억이 안 난다. 여름이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지점이었을 거다.  


  반추하고, 또 반추한다. 빌어먹을 미술을 못하게 된 시점부터, 지금은 글을 쓰고 있는 나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이때의 그림은 내 마음속 원대한 꿈과 이상 그리고 이것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현실 그 중심에서의 나다. 


  신문 배달하면서 10층 이상 되는 목동 아파트단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서 비치는 나무들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뛰어든 내 몸을 큰 손이 받쳐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신문을 배달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봤을 때, 내가 종잇장처럼 흔들거리고 가볍게 느꼈다. 누군가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공간 속으로 내가 뛰어들었고, 어떤 큰 계획에 의해 내가 그 속을 유영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그림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헤엄치는 방향의 끝은 내가 알 수 없었다. 큰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삶은 이미 내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준비와 묵상뿐. 그래.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 실오라기 같은 느낌을 잡아 마음에서 작게 피어나는 의지에 의지해 <바다의 얼굴>을 그렸다. 


  처음의 제목은 <자화상>이었다. 자화상. 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란 뜻이다. 내 마음, 내 세계. 남이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중동.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었다.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다. 집착했던 꿈과 욕망, 신념, 욕심 등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았다는 것은 종교인이 어떤 것을 포기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내려놓음' 덕분에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 몸뚱어리 외피 안에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마음과 영과 생각이 말해줬다. ‘너를 던져’라고. 나를 던지는 대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 그분의 크신 계획.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그 세계 속으로 믿음에 의지해 나를 던지는 경험이었다. 


  내가 뛰어들고 싶었던 바다의 물줄기. 그리고 신문 배달을 하면서 아파트 높은 곳에서 바라본 아래의 나뭇잎이 우거진 풍경. 이 두 이미지가 오버랩 돼 그림으로 나왔다. 내 표정을 그릴 수 없었 다. 자연으로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더듬더듬 그려가는 과정을 넣고 싶었으나,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그저 내 손과 마음이 가고 싶은 만큼만 가게 했다. 그래서 비움을 넣을 수 있었다. 


  다른 욕심을 넣지 않았다. 그림의 완성도, 내 그림 존재의 의미 그런 것에 대해 고민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순간을 담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그 순간에 느꼈던 마음이 그림 속에 전달된다면. 내가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누군가 같이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저 내가 그림 그리는 순간 행복할 수 있다면, 내면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면. 


  바다는 어쩌면 내 마음. 얼굴은 내 마음의 표정. 울고, 웃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바다의 표정. 그러나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바다는 평온하다. 수심이 깊고, 물도 많다. 모든 것을 잠재운다. 


  나는 지금도 미술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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