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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색머리 Dec 11. 2016

이별의 기록 2

네가 쏟아낸 모든 비난에 난...




8.



처음에는 헤어지는 과정에 기록해 두었던 글을 날짜별로 정리해서 올리려고 했다. 매일 무슨 일이 있었고, 나와 그의 관계는 어떻게 얼마큼 멀어져 갔는지. 나는 그의 태도나 행동의 변화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지극히 내 관점에서  기록된 글이지만 지난날을 되새기며 글을 정리하다 보면 내 생각도, 마음도, 남은 감정과 미련과 아쉬움도, 조금은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전에 써두었던 글을 이곳에 옮겨서 처음부터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또 편집했다. 하지만 며칠에 걸친 몇 번의 수정에도 왠지 발행이 꺼려졌다. 우리의 일들을 발행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 아닌가, 생각했고, 혹여나, 정말 혹시나 그가 이 글을 보게 되었을 때 받을 상처가 걱정됐다. 결국 나는 모든 글을 지웠다.


대신, 나는 내 이야기와 내 마음을 적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나와 그 사이에 있었던 사실보다도 더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내가 그와의 관계를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내 마음에 더 진득이 묻어 나올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와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이별의 기록 1)


그가 나에게 보여줬던 마음과 사랑과 행동에 단단히 사로잡혀있던 나는, 그래, 그가 한번 나를 두고 전 여자 친구에게 돌아가는 걸 선택했지만, 그것이 순간의 정이고, 연민이고, 익숙함일 거라고 애써 자위했다. 그를 다시 만났지만, 나는 전과 같이 그를 완전히 신뢰하고 내 마음을 까보여 줄 수가 없었다. 그가 낮잠을 잘 때, 화장실에 갈 때, 요리를 할 때에, 나는 그의 휴대폰을 살펴보았다. 그가 내 눈을 보며 사랑한다고 이야기해도, 나는 그의 고백을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바쁘거나 피곤하거나 아파서 나에게 조금만 소흘 해진 것 같아도 나는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우리가 다시 만난 순간부터, 이별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무척 아팠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같은 날, 나도 아팠다. 몸이 아픈 그는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나는 아픈 그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쉬지도 못하고 움직였는데, 내 컨디션은 생각도 않고 본인이 아프다며 애처럼 칭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짜증이 솟구쳤다. 아니, 사실은, 내가 왜 널 위해 이렇게 해줘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걱정되고,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었다. 나는 아픈 그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나는 그가 필요할 때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려주고, 물을 가져다주고, 밥과 약을 챙겨주고 싶었다. 그래, 내가 지금 힘이 들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아픈 그가 곁에 있는 나의 존재로 인해 조금의 위안을 느끼고 조금 기운을 차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곁에서 그를 돌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그런 마음은 그에게로 전달되지 못했던 것 같다.


이틀 밤낮을 꼬박 아픈 그의 곁에서 밥을 챙겨주고 손과 팔을 주물러주고 이마에 아이스팩을 올려주고 물을 먹여주며 함께 있었다. 그는 몸에 내 손이 닿으면 답답하다며 내 손을 쳐냈다. 나는 그의 몸에 손을 대기가 무서워졌다. 이틀째 되던 날 저녁, 그는 내가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싫다고 했다. 나 때문에 더 아픈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스트레스를 준다고 했다. 내가 그의 집에 있는 게 불편해서 싫다고 했다. 컨디션 안 좋을 때는 그냥 각자 알아서 회복하고 만나자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해해주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말했고,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잘 자라고 말하고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꺼주고 문을 닫고 그의 집에서 나와 내 집으로 갔다.


그 밤, 나는 집에 도착해서 조용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가 컨디션을 좀 회복하고 나서 다시 만났을 때, 상처 주는 말 해서 미안해,라고 말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웃어 보였다. 점심을 먹고 침대에 나란히 엎드려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발장난을 쳤다. 그러다 내 정강이를 침대 프레임에 세게 박았는데, 그가 해주는 성의 없는 위로에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막 났다. 정말 엉엉 울었다. 그게 내가 그의 앞에서 보이는 첫 눈물이었다. 그는 당황하다가 내 머리를 끌어안고 쓰다듬어줬다. 그래, 어이없게도 나는 정강이를 박고 나서야 그 앞에서 울 수 있었다. 나는 말할까 말까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그에게 말해버렸다.


우리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는 진심이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후, 그는 바빴고 많이 피곤해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봤다.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최대한 그의 행동과 말투와 표정에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잔뜩 스트레스받은 그의 곁에서 긴장상태로 몇 시간을 붙어있으면 숨이 막혔다. 나는 그가 어려웠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든 것이 어려웠다. 그를 만나면 우리 관계의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나 문제들을 덮어두고 다른 가벼운 이야기만 하는데, 그게 마치 위태롭게 얇은 유릿장 위를 어깆어깆 걷는 것 같아서 가끔 실없이 웃음이 났다.


뭐,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는 나의 말과 행동과 눈빛에 반복해서 마음이 상했고, 힘들어했고, 나는 숨이 막혔다. 그는 내가 짜증 난다고 말했다. 나와의 관계 때문에 할 일에 집중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바쁜 걸 알면 내가 알아서 조심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배려 없이 우리 관계 문제를 계속 꺼내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나랑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쉬지도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서로를 더 알아가고 서로의 본모습을 보면서 더 깊게 사랑에 빠지는 연애를 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만나면서는 본인의 모습을 편하게 드러내지 못해서 힘들다고 말했다. 나 때문에 밤에 잠들기가 힘들어서 공부가 안된다고 말했다. 나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 계속 뒤로 밀린다고 말했다. 그의 모든 비난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나는 그저 숨을 쉬려고 노력했고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그에게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 친구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그 정도라서, 그동안 내가 그에게 전달했던 다짐의 말들과 꿈꾸던 생각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결국 이 정도 대접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밀어내는 그의 모습보다, 맥없이 밀려나고 있는 내 모습이 더 선명했다. 그의 말속의 내 모습은 왠지 찌질하고 어리석고 또 참 별로인데, 또 그게 그렇게 낯설지가 않아서 그게 슬펐다. 그가 말하는 나의 모습은 내 전부가 아닌데, 그의 말속에 나는 그게 전부 같아서,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미지를 심은 것이 결국 나라서 그게 너무 숨이 막혔다.


그는 매번 그렇게 한참을 쏟아붓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말했다. 상처 주는 말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를 한번 안아주고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조용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내 자존감이 떨어지는 걸 느끼고 나서, 나는 그와의 관계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내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밥을 먹고 내가,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거부했다.


내가, 우리는 지금 서로 독이 될 뿐이야,라고 말했고 그는, 나한테 상처 주는 말 하지 마,라고 말했다. 나는 그와 대화가 되지 않아서 답답했고 그도 나와 대화가 되지 않아서 답답해했다.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나와서, 그냥 현관문 닫고 가줘,라고 말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어놓고 거울을 보다가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는데 울음이 났다. 벽에 기대앉아 엉엉 우는데 그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옆에 앉아 내 머리를 안았다. 나는 그를 밀어내며 제발 가라고 말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번 그에게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말을 꺼냈지만, 내 굳었던 결심은 그 앞에서 매번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잘 자라는 문자가 오지 않고, 일어났냐는 전화가 오지 않고, 만나자는 말이 없어지고, 만나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더니,


나 이제 마음이 많이 정리됐어.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라는 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




너무도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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